글쓰기와 역사 3-2주차 후기 신현주
『돈키호테』 라만차의 이달고와 정상성에 저항하기
글쓰기와 역사팀 책을 읽으며 이렇게 배꼽 잡고 웃어본 게 얼마 만일까-! 2주 차 글에도 적었지만, 개인적으로 『돈키호테』는 매주 300페이지 가까이 읽는 분량이 무색할 정도로 재미있는 것 같다. 1주 차에,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 각각의 인물들에게 몰입한 상태로 시대의 상황과 모험의 과정을 읽어보리란 다짐은 포기했지만.. 인물에 이입하는 걸 포기하고 책의 바깥에서, 내가 독자임을 인지한 채 한 발자국 떨어져 모험을 관전하니 그것에서 오는 묘미도 있었다.
돈키호테는 미치광이일까?
이야기를 나누며, 또 글을 쓰는 과정에서 계속 생각한 지점이었다. 『돈키호테』에 대한 사전 지식이 부족한 내게도 당나귀를 타고 다니는 중년의 미치광이 남성 이야기일 거야, 라는 상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돈키호테가 미치광이 취급을 받는 것은 크게 정리하자면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시대와 맞지 않는 망상이 만든 자기만의 세계에 너무 깊이 빠졌기 때문에. 후기를 정리하며 다시 한번 주목하고자 했던 건 ‘시대에 맞지 않는’과, ‘자기만의 세계’이다. 샘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돈키호테에게 자기와 같은 세계를 공유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그 모험 길이 얼마나 더 즐거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3주 차 불량으로 갈수록 산초 판사도 그의 광기(달리 대체할 말이 없기에 작가가 언급하는 대로 두기로 하자)에 동요되어 죽이 맞는 부분이 생겼지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시즌 2 연암의 『열하일기』를 읽을 때 흥미로웠던 지기에 관한 부분이 떠올랐다. 그러나 천하의 돈키호테는 자기를 믿는 사람이 있든 말든, 미치광이 취급하든 말든 굴하지 않는다. 이미 자신만의 세계가 너무 확고하기 때문이다. 어찌나 확고한지 제 말에 토를 다는 사람들은 마귀나 귀신이라거나, 마법에 걸린 게 틀림없다며 창으로 찌르고 다닌다. 심지어는 나처럼 분별력이 어두운 사람이라면, 기사 이야기를 할 때 너무도 활발히 돌아가는 그의 입담과 재치를 당해내지 못하고 정말로 그 이야기들을 사실이라고 믿을 정도였다.
여기서 두 번째 키워드인 ‘자기만의 세계’는 짚고 넘어갈 부분이 더 많다. 돈키호테의 망상과 광기를 주제로 잡고 오신 샘들의 글에 유독 세계에 관련된 키워드가 자주 보였다. 내가 2주 차 글에도 썼듯, 우리는 모두 각자가 믿는 것들을 기반으로 구성한 세계를 살고 있다. 진실이 별도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저 내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실체처럼 믿으며 사는 것이 전부라는 경희샘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돈키호테의 세계는 그런 의미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말에도 흔들림이 없는 철옹성 같은 곳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사내에게 광기라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부분에 있는 것 같다. 재영샘의, 세상에 변혁을 불러일으키고 뒤집는 사람은 이렇게 하나에 몰두한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말과 연결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편중된 세계에 몰입해서 끌어낸 결과물로 장인, 거장이라 불리는 사람들도 존재하니 말이다. 이 부분은 조금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더불어 광인이란 부정적 성향이 강한 어감이 담고 있는 의미에 대해서도 새롭게 정의해야 할 것 같다.
자유란 어떻게 쟁취하는가?
이번엔 놀랍게도 샘들이 가지고 오신 주제가 거의 다 달랐다. 그중에서도 유독 기억에 남는 건, 내가 그냥 스쳐 지나갔던 부분에서 의문을 제시하고, 또 조목조목 근거까지 마련하셔서 눈길을 끌었던 재순 샘의 주제였다. 재순 샘은 법과 자유에 대한 주제로, 돈키호테가 길을 가던 중 만난 죄수 일행을 풀어주는 에피소드에서 문장을 발췌해 오셨다.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를 빌어 법에 대한 전면적 부정을 하게 됐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셨다.
산업혁명 전에는 노를 직접 저어야 하니까 그런 사람들은 전부 노예나 죄수였다고 한다. 거기서 형을 받다 죽어가는 경우도 많았고, 오늘날 감옥에서 5년 형이라고 하면 죄질보다 전부 너무 약한 판정이라고 생각하는데, 당시 5년은 종신형이나 다름없었단다. 사실 혼자서 책을 읽었을 때는 노를 젓는 형벌 자체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배경 설명을 들어보니 앞선 죄수들의 죄질을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전까지는 그들의 죄질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던 것 같다. 죄인은 그 죄질이 어떻든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하며, 갑자기 죄수들을 풀어주는 돈키호테의 행동에 깜짝 놀라 다른 방향으로 생각이 튀었기 때문이다.
즉, 그 순간만큼은 그 자체로도 너무나 절대적인 ‘법’이란 이름에 압도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재순샘의 글을 읽으며 다시 확인한 죄질은 (더군다나 노 젓는 형벌이 저렇게 무거운 것이었단 사실을 알고 보니) 생각보다 별 게 아니었다. 옷 바구니를 훔쳤거나, 말을 훔친 뒤 고문에 못 이겨 자기의 죄를 자백했거나, 서기에게 뇌물을 먹인 사실을 들켰지만, 변호사를 선임할 돈이 없어 죄수가 됐다고들 한다. 이 정도면 노를 저을 노동력이 필요했기에 작은 죄를 지어도 그 자리를 충당하려 형량을 부풀리는 행동처럼 보인다.
이야기를 나누며 내가 어떻게 이 죄수들을 바라봤었는지 떠올려냈다. 나는 놀랍게도, 이 죄수들이 자기의 죄질을 일부러 약하게 말하며 돈키호테를 회유하거나 속이려는 행동인 줄 알고 잔뜩 경계해 읽었다. 쇠고랑을 차고 길거리를 걸으며 몇 년씩 형벌을 받는 인간들이, 고작 저런 죄를 지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심지어 이들을 풀어준 직후 돈키호테와 산초가 어떤 무시무시한 일을 당하지 않을까(실제로도 당하긴 했지만 그건 일련의 과정들이 있었으니까….) 걱정했다. 내 눈에는 죄수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게 만든 무언가가 씌워져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의 또 다른 이름을, 법이라고 생각한다. 심판자의 자격은 누구에게 주어지는가? 인간에게 또 다른 인간을 심판하고 그에 합당한 벌을 부여할 수 있을까? 그런 것들이 우리의 자유와 사고, 품행을 오히려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지는 않은가? 법이란 것은 절대적인 규칙이다. 그리고 그 제도 아래에서 어쨌든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는 나로서는 그 절대성을 의심할 생각을 못 했다. 아찔하지 않은가…!! 오늘날 우리가 자유를 쟁취한다는 것은 이런 사고의 폭을 넓혀감으로써 이뤄지는 게 아닐까 싶다. 보편성과 진실, 절대성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하는 것. 그런 의미에서 『돈키호테』는 제격이다.
만약 비정상의 세계가 이 이달고와 그의 종자가 겪는 모험이라면, 기꺼이 함께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 다르다는 건, 또 다른 의미로는 자기만의 세계를 구성해간다는 이야기도 될 테니까. 세르반테스가 자기가 만든 이 캐릭터들을 사랑했다는 이야기를 본 것 같은데, 어쩐지 그 마음이 이해된다. 책을 읽으며 한 번도 등장인물들을 이렇게 애정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문득, 2권 차례의 마지막 부분에 나와 있는 돈키호테가 병들어 누웠고 그가 한 유언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읽어나가는 것이 두려워졌다.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가 그렇듯, 내 안에 있는 비정상의 세계들을 부정하나 제거하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는 방법을 선행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 더 마음이 가는지도 모르겠다.
'보편성과 진실, 절대성을 의심하고 끊임없이 질문하기', 주어진 것이 아닌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나이 오십이 넘어서야 생각하고 있는데 ...세대를 넘어 같이 고민하고 공부한다는 게 실감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