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 역사 2-7 (7/17) 주차 공지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과 홉스 봄의 <혁명의 시대> 읽기가 끝났습니다. 괴테를 통해 18세기 이탈리아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여행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덕분에 저도 생각들이 많이 정리되었어요. 여행이 또 하나의 배움의 길이라는 걸 괴테가 잘 보여주어서죠. 홉스봄을 통해서는 어떤 질문으로 역사를 보는가에 따라 역사가 재구성된다는 것도 보았습니다. 이 때가 과학과 예술에서도 일대 전환이라 할 만큼 새로운 것들이 쏟아졌졌습니다. 예고대로 이번 시간엔 크크랩 에이스이신 경희샘과 전직 과학 선생님이셨던 재순샘께서 예술과 과학 파트를 정리하는 미니 강의가 있었습니다. 요약을 너무 잘 해주셔서 오우 깜짝 놀랐습니다. 역시 “슨생님” 이셨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다른 샘들도... ㅎ
이제 ‘글쓰기와 역사’팀은 18세기 조선으로 옵니다. 갓 잡은 생선처럼 펄떡이는 연암의 글과 조선의 황금시대를 연결해 보려고 합니다. 홉스봄을 읽고 나니 ‘우리’라는 한정이 조심스럽지만 우리가 발 딛고 있는 가장 가깝고 익숙한 지평에 돌아온 느낌입니다. 그래서 더욱 다름과 동일성이 잘 보일 것도 같은데요, 선생님들과 나눌 이야기들이 벌써부터 기대되네요. 조선의 역사는 외울 건 많지만 매주 분량은 많지 않아, 우리의 역사가 세계의 어떤 흐름 안에서 펼쳐지고 있었는지 함께 정리하면서 가볼까 합니다. 19세기 미국과 중국, 18세기 유럽을 이미 거쳐 왔기 때문에 아울러 종합하면서 가도 좋을 것 같아서요.
이번 주에는 두 분이 후기를 준비하고 계셔서 자세한 언급은 사족일 거 같구요, 저는 강의 중 인상적인 한두 개를 나눠볼까 합니다. 저희도 현주샘이 글에서 언급한 ‘도피처’에 대해 토론을 했었는데요, 마침 채운샘께서도 이 부분을 주목해 부연해 주셨어요. 요즘은 여행이 거의 현실의 도피거나 보상으로 이용되고 있죠. 샘께선 왜 현재를 도피가 필요 없는 삶으로 만드는 것이 어려울까 질문하셨어요. 우리에게는 크든 작든 비루하고 이상적이지 않은 현재를 참지 못하고 다른 것을 갈망하는 마음이 있죠. 이런 게 낭만주의 사조에 있다고 합니다. 낭만주의는 더러운 것, 아름답지 않은 것을 참지 못하고 늘 저편을 꿈꿉니다. 그래서 이상적인 사랑이 매우 중요한 테마가 되고 이 사랑이 지속되길 염원하죠. 그러나 모든 것은 변하게 마련이라, 사랑이 변하기 전에 사랑할 때 죽어버리는 것을 아름다움이라 생각했고 사랑과 죽음은 낭만주의의 주요 특징이 됩니다. 베르테르의 죽음이라는 테마도 좀 이해가 되지요. 이 죽음이 괴테가 낭만주의로부터 탈주하겠다는 의지라고 해석하는 것도 보았지만요.
괴테를 특정하여 분류하기가 어렵지만, 낭만주의적 성향이 분명 있는 것 같아요, 로마는 그의 정신적 본원 같은 곳이고, 그에게도 이상주의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괴테는 자신이 낭만주의적 경향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해서 계속 현세로 돌아오려는 노력을 했다고 합니다. 자연주의자처럼 지질, 기후 과학적 지식을 통해 디테일한 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그의 노력이 현세 바깥으로 넘어가지 않으려는 그의 자세가 아니었을까요? 괴테의 여행 당시 이미 폐허가 되어버렸을 몇천 년 전 로마는 오히려 그에게 폐허를 수용하게 하는 장소가 아니었을까요? 샘은 인간이 ‘성숙’해지는 건 현재를 받아들임으로써 가능하다고 하셨죠. 폐허 너머 다른 세계가 있다는 걸 꿈꾸지 않는 것, 이 세계 아닌 다른 세계에서 구원을 꿈꾸지 않는 것, 현재를 감당하며 사는동안 자연히 성숙은 이루어지는 것 아닐까요.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 말년까지 바이마르 공국의 고문관으로 지냅니다. 괴테가 아름답다면 이 현세적 태도 때문일 겁니다. 나는 어디를 무엇을 도피처 삼고 있는지 질문하게 됩니다.
공리주의의 탄생
18세기 말 탄생한 개념 중 하나가 공리주의입니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사회 시간에 많이 들어본 말이죠. 이 말에 숨은 함정이 있습니다. 공리주의자들의 교묘한 이익 챙기기 논리입니다. 부의 축적을 대놓고 주장하는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과 달리 공리주의는 모두가 이익을 추구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일은 ‘자연적’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자연스럽게 모든 자는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려고 한다는 것인데, 이걸 담론화함으로써 부의 축적도 자연스럽게 옹호하게 됩니다. 자본주의가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놓고 있던 시점, 빈민들의 반발을 사지 않으면서 그들에게도 먹힐 논리가 필요했던 거죠. 그 때 나온 질문이 "그게 합리적인 것입니까" "다수에게 좋습니까"라는 거였죠.
이 질문은 너무나 현재적이어서 지금도 이 논리의 자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죠. 백 사람에게는 폐가 될지 모르지만 만 명에게 좋다면 그게 합리적인 것 아닙니까? 라고 말이죠. 샘께선 이시무레 미찌코가 이 질문에 문제 제기한 걸 상기시켜 주셨지요. 미나마타병이 있던 마을에 환자가 111명이었는데, 공장의 논리가 공리주의자와 동일한 것이었죠. ‘111명이 병 걸린 것은 가슴 아프지만 공장 때문에 미나마타 시의 4만 5천명이 윤택한 삶을 누리고 있다’는 주장말입니다. 111대 45.000의 극명한 대비와 모두가 이익을 원하고, 다수에게 이익인 것이 합리적인 것 아닌가라는 질문 앞에 우리도 말문이 막히지 않나요? 공리주의의 폭력성은 합리적이라는 질문 아래 묻힙니다. 해서 ‘만 명이 좋아도 한 사람에게 좋지 않다면 그 한 명 때문이라도 하면 안된다’는 논리를 펼 수 있어야 하지 않냐고 샘은 강조하셨죠. 자본주의로 삶의 조건이 바뀌면서 사람 사물과의 관계가 바뀌고, 자연스럽게 감각과 사고도 일대 전환이 일어난다는 것을 공리주의가 잘 보여줍니다. 이익이 아닌 다른 사유를, 진정 무엇이 이익인지를 질문하는 것 자체가 이상해졌으니까요. 많은 소수적 투쟁의 의미는 이런 자명한 것에 질문을 던지게 한다는 것이죠. 우리가 그 투쟁에 주목해야 할 이유가 아닐까요.
이쯤하고요, 저희는 한 주 방학을 합니다. 그 틈을 이용해 ‘남원회동’이 준비되어 있구요. 경희샘께 신세를 지겠지만 잘 놀고 올 겁니다. 룰루랄라~~ 그리고 연암도 뜨겁게 만날 준비를 하구요.
*** ‘글쓰기와 역사’ 시즌 2-7 (7월 17일 ) 공지 ***
*읽을 책
《열하일기1》 : 도강록(~153p)
《18세기 왕의 귀환》 : 1부 1~2장 (처음 ~ 81p)
* 과제
⓵ 인상 깊은 문단을 뽑고 자신의 생각을 적어 일요일 11시까지 숙제방에 올립니다.
⓶ 역사 연표를 작성하여 함께 올립니다.
*후기 : 경희샘, 현주샘
*시즌 전체 일정은 단체방 공지로 올려 놓을께요
남원에서 먼저 만나요~~
공리주의의 논리는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짐이 아이를 둘로 나눠 주라는 솔로몬의 판결을 나무라는 데서도 잘 드러났던 것 같아요. 생명을 숫자로 환원하는 감각, 다양한 경로와 과정들이 일시에 소거된 외피로 상대를 바라보고 있지요. 공리라는 합리 속에 작동하는 이기심과 폭력성, 너무 익숙해서 이기심이나 폭력이 작동하는지도 모르고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