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 역사 시즌 2-1 6주차 후기 신현주
방학 동안의 남원 여행길
글쓰기와 역사 시즌 2-1,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과 <혁명의 시대>를 마무리하는 후기를 미루고 미루다 이제서야 올립니다. 새삼 저의 게으름과 조우하는 이 주였던 것 같습니다. 본격적인 후기에 들어가기 앞서, 지난주는 연암과 18세기 조선 시즌에 들어가기 전 일주일 간의 방학 주였습니다. 기행문을 읽는 시즌답게 샘들과 함께 남원에 모여 1박 2일간 남원, 산내, 함양 등 지리산 자락의 소도시와 시골 마을을 여행해 보았습니다. 장마 기간이라 언제 비가 내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남원에 도착한 샘들을 마중 갔는데, 거짓말처럼 여행길 동안은 날씨가 쾌청하더군요! 적당히 그늘지고 시원한 하늘 아래서 뱀사골과 실상사, 상림 공원과 광한루를 걸을 수 있었습니다. 본가가 산내이지만 가끔씩 내려오면 집 안에만 있느라 바깥 경치와 형상을 눈에 담을 일이 없는데 오랜만에 상쾌하게 콧바람도 쐬고 기분 좋은 여행이었습니다. 끄적이고 싶은 말이 많지만, 남원 여행 후기가 아니기에 이상 거두절미하고 후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괴테와 작별하며 얻은 과제
이번 후기에서 꼭 풀고 싶었던 과제가 있습니다. 저는 지난 시간의 ‘순간이 전부다’라는 부분과 연결해 순간에 대한 씨앗 문장을 가지고 글을 썼는데요. 그런데 샘들과 이야기 나누는 과정에서 제가 이해한 순간과 괴테가 긍정하는 순간에 차이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해한 순간은 시간을 분절된 개념으로 나눠본다면 현재에 해당하는, 오직! 지금! 이 순간! 이었습니다. 그러나 괴테가 긍정하는 순간은 과거, 현재, 미래 등으로 나눌 수도 없는 것일뿐더러 정해지고 규격 된 개념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마음에 걸렸던 것은 샘들의 말처럼, 순간의 귀중함을 그저 분절된 현재의 개념에 해당하는 것으로만 인식하게 될 때 뒤따라오는 허무함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재를 제외한 것은 무의미하다고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죠.
순간을 이런 식으로 해석한 저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니 몇 가지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왜 순간을 단일한 것으로 해석했을까? 시간은 나눌 수 있는 것인가? 흔하게들 분리하는 과거/현재/미래의 방식 말고는 뭔가가 변화한다는 개념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일까? 문득 시간을 분절하는 식으로 이해하는 과정에서 나온 현재를 순간의 개념으로 이해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확실하게 들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 1분 1초 그보다 더 작은 단위의 운동성 위에서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계속 변화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실질적으로 행동하는 삶의 현장에서 현재는 순식간에 과거가 되고 미래는 현재가 됩니다. 우리가 직접적으로 변화가 눈에 보이는 어떤 행동을 하지 않아도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눈에 보이지도 잘 인식되지도 않는 몸속 세포까지도요. 그렇다면 당장 일상에서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과거 현재 미래 같은 시간의 개념. 즉 예상되지 않고, 혹은 아득하게 존재하는 듯한 분절된 시간 개념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삶이란 것은 그처럼 커다란 틀 안에서 통계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이제는 뭔가 분절된 것으로 이해하는 시간이 무의미해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문득 순간이란 삶 그 자체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 순간은 어떤 시간적 규정 안에서 그 흐름을 타지 않는 개념처럼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괴테의 ‘순간이 전부다’라는 말은 기존에 제가 해석했던 것과는 조금 다르게 와닿습니다. 이는 순간을 하나의 좋은 개념으로써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알린 것입니다. 즉 분절된 의미에서의 과거나 미래보다 중요한 ‘오직 지금 이 순간 혹은 현재’ 가 아니라 삶 그 자체이자, 단순한 분류 체제 속에서 규정할 수 없는 사건들이 촉발하고 운동하고 해체되는 어찌 보면 생과 사까지의 전과정인 것 같기도 합니다.
물론 맞게 해석했는지는 모르겠고 시간이 없어서 더 진득하게 생각하거나 이것저것 찾아보진 못했지만 이전과는 조금 다른 방법으로 접근했다는 사실에 일단은 만족합니다. 후기를 쓰게 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다시 정리해 볼 기회도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물론 에세이 주제로 가져와보고 싶다고는 생각했습니다...^^)
도피처 없는 일상
지난 글에 여행을 도피처로 삼는 게 아니라 일상을 도피처가 필요 없는 곳으로 만들면 되지 않을까라는 문장을 넣었습니다. 거창하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고 그저 번갯불처럼 퍼뜩 떠오른 생각이었습니다. 문장을 써낸 뒤에도 이에 대해 추가적으로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강의 시간에 채운샘은 일상에서 도피처를 원하는 것은 단순하게 말하면 낭만주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낭만주의는 내가 살고 있는 이곳, 현실을 견디지 못해 어떤 이상을 그리는 것이며 그들은 실제 건 상징적으로 건 죽음을 갈망한다고 덧붙이셨습니다. 동시에 이들의 죽음과 긴밀하게 연결되는 것이 사랑이라고 합니다. 낭만주의자들은 사랑할 때 죽는, 즉 죽음으로써 사랑이 영원히 지속되길 바라는 이상을 꿈꾼다는 말에서 문득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떠올랐습니다.
이 부분이 유독 인상 깊었던 것은 낭만주의자들은 어째서 영원과 이상을 꿈꾸지? 어째서 현실을 보지 못하고 이상에 빠져 살지?에 대한 답답한 의문과 동시에 내 안에도 분명히 그런 면이 존재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즉 비루하고 아름답지 않은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을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그 속에서 살아가려고 노력하지 않고 다른 이상적 세상을 꿈꾸고 그곳으로 회피하는, 끊임없이 도피처를 찾아다니는 삶. 채운샘은 초기의 괴테에게는 분명 그런 낭만주의적 사고가 존재했지만 뒤로 갈수록 그는 그 기질을 현실의 차원으로 가져오려고 노력했다고 하셨습니다.
내게도 분명 그런 낭만주의적 기질이 존재하기에 괴테의 행동과 이상을 경계하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도피처 없는 일상을 만드는 해답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피처는 왜 필요해질까요? 조금만 생각해도 내가 사는 환경에서 벗어나길 원한다는 욕망 때문인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 많이들 도피처로 사용하는 여행이나 음주 등의 방법으로는 내가 사는 곳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난 것 같은 기분만 안겨줄 뿐 그 밖의 어떤 대안도 마련해 주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답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찾게 됩니다.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이상이 현세의 범위를 넘어서서 결국 허무와 우울감을 불러일으키게 되니까요.
채운샘은 괴테가 말하는 ‘성숙’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삶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 속한 세계의 부조리함과 비루함도 존재한다는 걸 받아들이는 것. 이 세계 외에 다른 유토피아는 영화나 동화에만 있는, 환상의 세계라는 걸 인지하는 것. 질문하고 방황하더라도 이상에만 빠져 떠다니지 않고 현세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것을 괴테는 긍정합니다.
도피처 없는 일상을 만드는 건 제 생각처럼 거창하고 어려운 게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너무도 어렵고 고통스러운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내 삶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순간 스스로가 너무 비루하고 보잘것없는 먼지처럼 느껴질지도 모르니까요. (앗 그래서 괴테가 현명한 자들은 행복한 순간을 많이 갖도록 행동하는 자들이라고 했나?) 그러나 결국은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세계를 떠다니는 한 톨의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화려하지도, 아름답지도, 거창하지도 않은 세계를 살고 있는 똑같이 화려하지도, 아름답지도, 거창하지도 않은 나와 현실을요. 또한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허무주의와 우울함에 빠지지 않으려면 괴테의 말처럼 합리적이고 행복한 순간들을 많이 갖도록 실천하는 일이 중요하겠죠?
우왕왕~~왕. 학습능력이 정말 빠릅니다. 순간을 이리도 순식간에 해석하다니.
질문이 곧 공부라는 걸 너무나 잘 보여주는 후기네요. 토론에서는 현재와 미래를 분리해 도달할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현재에 결여와 부정을 도입하는 것이란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요, 순간이 삶의 흐름 안에서 이루어진 현재라는 걸, 이렇게 이해하는 후기를 써 주셨네요. 우리 줌에 현주샘 등장하면 환호하며 맞이하기로 했는데, 잘했군요. ㅋㅋㅋ
앗 샘들이 갑자기 환호하신 이유가 이것이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