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고 머뭇거릴 수밖에 없는 길 위의 시간
시작이라는 두터운 시간
연일 내리던 비가 멎었다. 비가 멈춘 지 이삼일이 지났음에도 집 주변에 물 흐르는 소리가 자못 크게 들린다. 비가 멈춘 하루이틀은 그 물소리에 비가 계속 오나 싶어 창밖을 유심히 바라보곤 했다. 초목이 잡아뒀던 물이 물길을 따라 내려오는 양이 상당해서 나는 소리였다. 비로 인한 산사태와 침수, 사상자와 이재민이 생긴 탓인지 불어난 강물에 발이 묶여 소일하는 연암의 처지가 전과 달리 크게 느껴진다.
사라지고 끊어졌거나 있어도 길로서 역할을 할 수 없는 그 앞에서 길을 떠나야 하는 이의 처지는 초조하고 답답하다. 본디 길은 없었다며 굳이 사라진 길 앞에서 서성이면서 조급해하지 말고 다른 방도를 찾아보라고 쉽게 충고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끊어진 길 앞에 선 당사자는 막막할 것이다. 그 길을 되돌아서서 떠나는 것 자체를 접어버릴까도 싶고, 그냥 끊어진 그 길 앞에 눌러앉아 버리고 싶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길을 떠나려 먹은 마음을 쉽게 접는 것이 더 어려운 이도 있고, 나설 수밖에 없다는 사명감 같은 것으로 떠나지 못할 길 위에 망연히 서있는 자도 있을 것이다. 연암은 어땠을까.
열흘이나 객관에 묶여 있었던 터라 다들 몸이 근질근질하여 훌쩍 날아가고 싶은 심정이다. 장마로 불어난 강물 때문에 마음이 더욱 조급해졌다. 바야흐로 떠날 시간이 닥치고 보니 이제는 강을 건너지 않으려 해도 어쩔 도리가 없다. 멀리 앞길을 바라보니 찌는 듯한 무더위다. 고향을 돌아보니 구름 덮인 산이 아득하다. 문득 서글퍼져서 돌아갈 마음이 솟구친다. 장쾌한 유람이라면서 ‘꼭 한 번 구경을 해야지’하고 벼르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것도 딱 맞는 말은 아니다. 저들도 말로는 “오늘에야 드디어 강을 건너는군!”하며 떠들어 대지만, 진짜로 흔쾌해서 하는 말은 아니고, 코앞에 닥쳤으니 어쩔 수가 없다는 뜻이다.
약관 김진하는 늙고 병이 깊어 여기서 되돌아가기로 했다. 그의 정중한 하직인사에 왠지 서글퍼진다. (박지원 『열하일기 上』, 고미숙 외 2인, 북드라망, 40쪽)
길을 떠나기에 앞서 누군가는 설레임과 기대가 앞선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심란함과 걱정스런 마음 상태가 되는데, 종잡을 수 없고 흔들리는 듯한 마음이 영 못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천하의 연암마저 마음이 요동친다. 훌쩍 떠나고 싶다가도 걱정에 조급해지고, 떠난다는 행위가 어쩔 도리가 없는 닥쳐버린 일이 되었다. 연암은 무더위를 유독 힘들어했던 것 같다. 그런 그에게 기다리는 연행길은 ‘찌는 듯한 무더위’처럼 보인다. 불현듯 서글픈 마음이 솟구쳐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인다. 연암의 말대로 장쾌한 마음은 과거의 일이 된 듯하다. 사람들의 왁자함도 즐거워서 떠들어대는 것이라기보다는 이젠 정말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는 자들의 거짓 호기처럼 보인다. 그럴 것이다. 연암의 길을 떠나기 전 마음에 십분 공감이 간다. 나에게도 여행은 코 앞에 닥쳐서 어쩔 수 없어 떠나게 되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선지 여행길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은근한 서글픔을 느낀다. 떠도는 길 위에서는 안정감을 잃고 미묘하고 오묘한 감정들에 휩싸이는데 그런 상태가 싫다. 초등학교를 거쳐 청년기까지 봄을 싫어했는데 그 종잡을 수 없는 변화무쌍한 날씨가 주는 불안과 미묘함에 동요가 일었기 때문이다. 연암의 심사는 조선의 국경인 압록강을 건너기 앞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놓인 이로 인해 서글픔이 더해진다. 늙고 병들어 더는 연행길에 오를 수 없는 김진하는 연암일행과 다른 방향이지만 그의 길을 떠난다.
이번에 읽은 『열하일기』의 대목은 ‘도강록’이다. 6월 24일부터 7월 9일까지의 기록이며 압록강을 비롯하여 삼강(애랄하), 삼가하, 유가하, 금가하, 팔도하 등 여러 강을 건너는 일정이다. 어떤 물은 말을 타고 건널 수 있는 것이었지만 물살이 센 강물에 떨어질 뻔한 위태로운 순간도 있었다. 여러 차례 강을 건너야 하던 이 때, 연암이 쓴 글에 날씨는 종일 맑은 날보다 비가 오는 날이 많다. 길을 떠나는 이에게 이 비는 얼마나 걱정거리였을까 싶다. 침구며, 필요한 것들을 이고 지고 길을 나섰을 터인데, 연암은 그렇다 치더라도 장복과 같은 하인과 창대와 같은 마두의 여정은 또 어떠했을까. 잔뜩 젖은 옷을 갈아입지도 못하고 밥을 해먹고 한데서 잠을 잤을텐데, 생각만으로도 감히 나설 수 없는 길이다.
너희가 ‘사이’를 아느냐? - ‘…….’
이 도강록에는 압록강을 건너면서 수역 홍명복에게 ‘길을 아느냐’고 물으면서 말을 이어가는 연암의 모습이 있다. 열하일기를 읽어본 사람들은 한번쯤 들어봤음직한 대목이다. 그런데 읽는내내 알쏭달쏭 하던 것이 학인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도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고 난 지금도 시원하게 해결된 것이 없다. 그럼에도 연암이 말한 ‘경계’와 ‘사이’를 재밌게 풀어준 학인들의 말은 기억에 남아있다.
“길이란 알기 어려운 게 아니야. 바로 저편 언덕에 있거든.”(중략)
“이 강은 바로 저들과 우리 사이에 경계를 만드는 곳일세. 언덕이 아니면 곧 물이란 말이지. 사람의 윤리와 만물의 법칙 또한 저 물가 언덕과 같다네. 길이란 다른 데서 찾을 게 아니라 바로 이 사이에 있는 것이지.”(48쪽)
이분법을 넘어선 삶, 그 경계와 사이에서 발견할 수 있는 길이란 시도라는 행위에 가깝다. 집권세력인 노론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벼슬길에 나서지 않은 연암의 생애에 주목했는데 그는 이미 길이 없는 곳에 삶을 자리매김했다. 길을 건너야 하는 물도, 언덕도 그 자체가 길은 아니다. 어찌보면 그것은 그 자체로 우리의 갈 길을 막는 장애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건넘 또는 오름이라는 행위를 통해 길이 되어버린다. 길은 별도로 있는 것, 주어진 것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일 뿐, 그 행위를 통해 길이 아닌 것이 길로 작동하는 것이다. 물, 언덕이라는 이것과 저것의 명확한 구분을 위한 것으로써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 구분이 무화되고 넘어서는 것으로서 그 차이를 받아들이고 행위하는 것으로서 경계는 있는 것이다. 그것은 차이를 나타내는 표지일 뿐 한계를 정해놓고 있지 않다.
따라서 우리가 사이를 본다는 것은 편견이나 선입견을 떠나는 행위의 실천이다. 더불어 이런 자세에서 또다른 길 제3의 길을 만들 수 있다. 다른 길이란 ‘견고한 자신의 입장을 떠나 관계의 변화를 경험함으로써 만들어지는 달라진 태도’에서 발견할 수 있다. 자신과의 관계에서 다른 길을 모색하려면 그 관계맺음을 볼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자신의 처지를 수용하고 알아가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여기서 처지란 하나로 단정할 수 없는 여러 힘의 장에 놓여있는 나약한(?)모습의 인정이기도 하다. ‘갈등하고 머뭇거리고 주저하면서 가야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연암이 연행길에서 마주한 비단주머니를 매고 손으로 월금을 뜯는 ‘소경’의 처지. 자신에 속한 것을 정작 스스로 볼 수 없지만 그것을 운용하면서 머뭇거리며 길을 나서야 한다. 게다가 불합리하게만 느껴지는 세상을 믿고 자신을 내맡기지 않으면 한 걸음도 내딛을 수 없다. 내딛지 않으면 삶을 영위할 수 없고. 세상은 늘 미지의 것으로 펼쳐져 있어 그때 필요한 것이 용기와 담대함이다.
위의 두 문단은 인용문을 두고 학인들이 나눈 이야기 중 일부다. 아직 연암이 말하는 물과 언덕의 경계와 사이의 삶이 마음에 ‘척’하고 다가오지 않는다. 하지만 연암의 이 질문에 학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으며 엷은 흥분과 기쁨, 즐거움 같은 것을 느꼈다. 같이 공부하는 이의 깊은 울림같은 것이 와닿는 느낌때문이었다. 함께 공부하는 이의 말소리가 종소리의 울림처럼 전해지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연암이 말하는 '사이'와 '평등'에 대한 문제 제기로 시간을 꽤 들여 토론을 했었지요. 사이와 경계를 제 3의 길로 풀기도 하고, 시도라고 말해보기도 하구요. 이것이 '어떻게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갈 것인지'와 관련되어 있다고 얘기 했던 것 같네요. 이 우기(雨期)에 실감나는 후기를 올려주셨네요. 경희샘 짱1!!
그냥 주름으로 끝날수 있었던 우리 이야기를 부채처럼 활짝 펼쳐주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