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 역사 2-10주차 (8/7) 공지
저희는 <열하일기>와 18세기 조선의 역사를 계속 공부하고 있습니다. 채운샘도 강의 시간에 말씀하셨는데, 조선의 역사가 참 단조롭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덕분에 역사 정리하는 과제도 훨씬 수월하고 암기할 역사적 내용과 용어도 부담이 없어 좀 가볍긴 하지만요.ㅎ 18-9세기 미국사, 명말부터 공산 혁명이 발발하기까지의 중국 근대사, 홉스 봄이 전해주는 혁명사의 숨막히는 소용돌이에 비하면 단조롭기 짝이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문화도 사회상도 학문도 급속한 변화를 겪으며 새로운 세계를 향해 달려가던 시기로. 조선은 너무 단순해서 답답한 느낌마저 들던데요. 조선의 문명이 최고조로 꽃피는 시기였는데 말이죠. 샘이 말씀해주셔서 속이 시원했습니다.ㅋㅋ 이 간극을 연암의 뜨거운 글이 메워주고 있는 느낌이었구요. 한 작가를 만나 글을 읽을수록 빠져들게 되어, 마지막 주가 되면 못내 아쉬워지고 이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서설이 길었는데, 이번 주 <열하일기>는 말을 타고 빠르게 달리듯 붓 가는 대로 기록한 글이라는 의미의 “일신수필(馹迅隨筆)” 부분을 읽었습니다. 붓 가는 대로 썼다는 건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평소 품고 있던 생각들이 새로운 세계를 만난 연암을 자극했고 일필휘지로 토하듯 나온 글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가 어떤 것을 품고 고민하며 살아야 하는지 새삼 느끼게 되었어요.
이용후생 : 무엇을 배우고 왜 배워야 하는가
일신수필은 첫 장의 序부터 뜨겁습니다. “입과 귀에만 의지하는 자들과는 더불어 학문에 대해 이야기할 바가 못된다”고 하며, 직접 보고 들으며 배우는 것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중국에 대해 관념적으로 이해하지 말고 직접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라 말하는 것이죠. 건륭제는 한족의 훌륭한 문명을 그대로 수용했을 뿐 아니라, 그 자신도 매우 학구적이어서 늘 책을 가까이하며, 그 때까지 발행된 모든 학술 자료를 모아 <사고전서>라는 총서를 만드는 불후의 업적을 남기기도 했죠. 이런 청나라를 감히 ‘머리 깍은 사람들’이라고 업신여기며 아직도 명나라의 미망에 사로잡힌 ‘일류 선비’들은 청의 휘황한 문명을 보고도 “허, 도무지 볼 것이라곤 없다”고 합니다. 연암은 스스로를 삼류선비라 칭합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문장을 남깁니다. “중국에서 제일 장관은 저 기와 조각과 저 똥덩어리에 있다”고 말이죠. 담을 쌓을 때 깨진 기와 조각으로 무늬를 만들고, 또 바닥에도 깔아 비가 와서 진창이 되는 것을 막기도 한다는 것이죠. 말똥도 거름으로 쓰기 위해 반듯하게 쌓아 올린 모양만 보아도 천하의 제도가 다 갖추어져 있다고 말하죠.
그 많은 중국의 절경을 두고 이것이 가장 장관이라고 하는 연암의 시선이 독특합니다. 연암은 살아갈 만한 토대를 만드는 것으로 이용, 후생, 정덕을 중요하게 생각했죠. 채운샘께선 연암에게 이용후생은 물질의 발전이나 새로운 것을 찾고 만들어야 하는 게 아니라고 하셨죠. 있는 것을 활용하고, 버려진 것, 쓸모없어 보이는 것을 자기화하는 것에서 이용후생을 찾았다는 게 중요한 점이라고 짚어주셨어요.
우리는 지금 자고 나면 신상품이 쏟아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발전이 우리에겐 어떤 영향을 줄까요? 테크놀로지의 발달이 인간의 정신발달과 어느 시점까지는 동일하게 상승하다가 어떤 임계점을 넘으면 인간이 기계에 종속되어 버린다고 합니다. 당장 정전(停電)만 돼도 인간이 얼마나 무능해지는지 알게 되죠. 그런 의미에서 연암의 이용후생은 우리 시대 기술 중심주의와 인간의 역량에 대해 생각하게 해줍니다, 토론에서 현주샘이 제기한, 물질적 풍요를 넘어 정신적이고 내적인 부분의 이용후생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있었는데 얘기가 다른 부분으로 흘러 더 나아가지 못했죠, 우리가 어떻게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지, 살림의 역량을 중심으로 다음 시간에 더 토론을 진행해 보면 좋을 거 같네요.
유학자와 천주학의 만남
18세기 조선의 문명이 최고조로 꽃피었다는 건, 그만큼 다양한 교류가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게 조선에서 천주학이 들어온 것인데요, 천주학을 수용한 그룹은 의외로 퇴계 이황의 후계 학자들인 ‘남인’이었어요, 남인은 이황을 중심으로 한 동인 그룹에서 정여립의 모반을 기점으로 북인과 남인으로 갈라진 분파 중 하나입니다. 정통 유학의 학풍을 자랑하는 남인이 천주학을 수용한 대목은 의미심장하죠. 채운샘께서도 이 부분을 주목해보자고 하셨죠. 일단 유학엔 신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어떤 지점이 이 두 학파의 접점을 만들고,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천주학을 지키게 했을까요?
갑술환국(1694년)으로 남인은 서인에게 패해 정계에서 밀려납니다. 그 후 벼슬을 하지 않고 심성론과 예론 연구에 집중하는 보수적 주자 학풍의 영남 남인과 경기도를 중심으로 전통 주자학과는 다른 독특한 학문을 형성한 근기 남인으로 갈라졌죠. 이익을 필두로 한 근기 남인들은 도가 학풍을 수용했을 뿐 아니라, 육경 고문 중심(시경, 서경, 역경, 악경, 예기, 춘추)의 공부를 하며 하상주 즉 요순시대의 정치를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강력한 왕권통치를 구상하는 그룹이었습니다. 통치 체제의 정비, 토지제도의 개혁 등 일련의 개혁안을 제시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추상적이고 철학적으로 개념화된 성리학의 天개념 대신, 중국 초기의 天개념인 ‘상제’ 개념을 수용하였죠. 이익은 천문 역법 등을 중심으로 서양의 과학기술을 수용하였고,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읽은 후 천주란 유가의 상제와 같다고 이해하였으며, 천주교의 철극을 유가의 극기복례와 같은 것으로 긍정적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물론 천당 지옥설이나 영혼불멸설까지 수용한 건 아니지만, 천주학을 통해 이들의 정치 이념을 펼 수 있는 길을 발견한 것 같습니다. 17세기 허균, 18세기 이익, 유형원, 이승훈, 정약전, 정약용 등이 그들이죠.
정조는 남인이 천주교 문제로 공격받게 되면 탕평 정국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는 판단으로 천주교를 믿는 것은 개인적 차원의 문제라고 강조했고, 오히려 주세력이었던 노론의 문체(문체반정)를 문제 삼아 노론이 남인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견제하였다고 합니다. 또 사회적으로 다양한 변화가 생기면서 역관, 의관, 행정실무 담당관 등 중인 계급의 영향력이 점점 높아졌고요. 양반이 될 수 없었던 이들은 천주교에 투신하여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고 교회 활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면서 돌파구를 찾았는데요, 이런 일련의 움직임이 천주교의 세력 확장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유학과 천주학을 비교 대상으로 놓아보지 않았는데, 해석에 따라 서로의 공통점이 생겨나는 지점이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재미있는 역사는 다음 주에도 계속될테니 그만하고 다음 주 읽을 것을 볼께요.
*** 10주차 (8/7) 공지입니다 ***
* 낭송팀 분배 - 연암 : 은옥, 경희, 재순 / 괴테 : 지원, 현주, 정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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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책
《열하일기2》 : 관내정사 (2권 ~139p)
《18세기 왕의 귀환》 : 3부 1장 (166p ~ 211p)
* 과제
- 문학 : 나누고 싶은 문장을 뽑고 생각을 담아 숙제방에 올립니다.
- 역사 : 연표 정리하여 숙제방에 올립니다.
* 9주차 후기 : 재순샘
‘한’여름 몸 잘 보살피시고 월요일 건강하게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