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됨이라는 여행이란?
지난주에 이어 이번에도 ‘혼자’라는 말이 생각할 거리로 나왔습니다. 여행과 관련된 글이니 ‘고독, 혼자, 고립’이 당연한 이야깃거리라 생각했는데요. 여행에서 왜 고독을 떠올리는 걸까요? 저는 여행을 즐기는 편이 아닌데다 혼자 하는 여행에 두려움까지 있는 터라 ‘혼자 떠나는 여행’은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그런데 여행을 혼자 했거나 그런 여행을 원하는 학인이 더 많네요. 괴테도 바이마르 공국(독일)에서 10년간 행정가로 살다가 여행을 떠납니다. 어느 날 새벽, 잠든 친구들을 두고 ‘혼자’서 이탈리아로요. 지난주에 우리는 이 ‘혼자’라는 말을 괴테가 밝힌 여행의 이유, ‘본연의 나 자신을 깨닫기 위해서’(84쪽)와 관련지어 생각했었는데요.
이번 주에는 ‘혼자’라는 것의 가능성을 떠올렸습니다. 우리는 이야기하면서 혼자라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요. 그것은 괴테의 여정에 나타나는 무수한 사물들 때문입니다. 잠든 친구들 사이를 홀로 빠져나온 괴테가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집을 나서자마자 탈 수 있던 마차덕분이었습니다. 그의 초기 여행기록에 이 마차와 마부가 등장하곤 하는데요. 매번 마부, 마차와 말에 그의 몸을 의탁했지요. 풍경(광물, 동물, 식물, 기후, 날씨 등)을 이루는 것들과 그 시기 ‘민중 또는 인민’이라고 명명되기 시작한 이들, 그 외에 건축과 회화, 조각을 비롯한 예술작품, 연극, 오페라 등 그의 여행기에는 쉴 새없이 새로운 것들이 등장합니다. 그의 여행을 가능하게 한 것은 괴테 자신이 아니라 이런 만물들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이번 여행지, 로마에서는 티슈바인라는 화가와 동행합니다. 그리고 여러 사람을 사귀어 그의 글을 들려주기도 하지요. 떠나기 전에도 떠날 때도 떠난 후에도 어느 한 순간, 고립되어 홀로 있었던 적은 없습니다.
혼자의 불가능함을 이야기했음에도 괴테의 여행에서 ‘혼자’임이 2주에 걸쳐 우리에게 소환된 이유가 궁금해집니다. 저도 학인의 글에서 혼자라는 말에 주목했는데요. 요즘 여행 하는 사람은 호텔이나 숙소에서 방콕만 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 여행을 보여주는 유튜버에 접속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하는데요. 혼자되기를 욕망하는 것일까요? 어쩌면 ‘혼자’일 수 있다는 환상이 만들어내는 ‘가짜’ 욕망은 아닐까요. 숙소라는 사물만 보아도 그것이 유지되려면 이미 많은 것이 함께 작동하기 마련인데요. 유튜버 혹은 그것에 접속하는 이들 모두 접속과 연결을 전제로 하는 행위이구요. 혼자, 단독, 이탈이 ‘가짜’ 자유의 이미지와 혼용되어 관계 속에 유지되는 삶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기는 그야말로 우리의 매 순간이 얼마나 무수히 많은 의존 속에서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주네요.
여행기에서 박학함과 재능, 관대하면서도 절제된 태도 등 괴테에게 찬탄과 부러움을 보내게 되는데요. 무수한 만남을 즐기고 그 속에서 자유로움을 구가하는 괴테, 이런 괴테에 대해 지난 시간 채운샘은 그가 ‘밑천’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지요. 괴테의 두툼한 밑천을 가능케 하는 것이 궁금했습니다. 학인 중에는 밑천으로 ‘친화력’을 드는 이도 있었는데요, 저는 그 말에 일면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어디서나 무언가 즐길 일, 배울 일, 할 일이 있다’(243쪽)는 그의 말이 저는 사물과 세상에 대한 ‘친화력’을 드러낸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괴테의 긍정에서 세상과 사물에 대한 애정을 느낍니다. 그리고 글에서 자주 아량과 관대함을 느끼곤 합니다. 그래서 그의 탐구와 탐사 등을 보노라면 문득 왜 우리는 알고자 하는 것일까? 묻게됩니다. 괴테의 배움에 만물에 대한 애정 혹은 다가가고 싶음 같은 정서가 근저에 있다는 느낌을 받기때문입니다. 알고자 함은 이런 다가가고자 함이 아닐까, 괴테의 여행기를 읽으며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런 정서를 학인이 ‘친화력’이라고 표현해주고 있는 것 같아 그 말이 반가웠지요.
그리고 그의 밑천으로 '환상 없음'이 떠올랐는데요. 왜 이런 느낌을 받는지는 좀더 두고 생각하고싶네요 . 지금은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어서... 그는 이미 방대한 앎을 지녔으면서도 그 경계가 날로 확장됩니다. 위태롭고 위협적인 순간에도 큰 동요를 보이지 않구요. 새로운 곳에 내던져진 그를 힘들고 짜증스럽게 하는 일이 많았을 것 같아요. 그런데 원망이나 비방 혹은 비난을 거의 찾기 어렵습니다. 저에게는 잘못, 부조리 혹은 불합리한 것들로 보이는데 그는 그저 일어날 수 있는 일로 담담하게 적고 있습니다. 그는 흥망성쇠 앞에서 별로 동요나 과장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태도가 ‘환상’이 없는 것에서 연유한다고 생각되는데, 괴테에 대한 저의 느낌은 더 두고 봐야겠습니다.
홀로됨으로 다시 돌아와야겠습니다. 괴테의 홀로됨이 고립이나 단절은 아니었습니다. 관계의 장을 떠나 우리는 살아갈 수 없으니까요.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떠나기를 원하는 순간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 떠남은 익숙한 것과 거리를 두고자 함이 아닐까요? 나를 있게 한 그 관계가 나에게 더이상 생기를 주지 못하고 그것과 결별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오는 것이지요.
채운샘은 크크랩 수업에서 ‘소진’과 관련해 이야기해 주신 적이 있는데요. 『포스트휴먼 지식』에서 저자가 말하는 ‘소진’(로지 브라이도티 『포스트휴먼 지식』 김재희 외 1인, 아카넷, 35쪽)은 우리가 요즘 말하는 ‘번아웃’ 혹은 ‘노동 후의 피로나 피곤’과는 다른 의미로 생각해야 한다고 하셨지요. 봄이 여름이 될 수 있는 조건으로서 소진. 봄이 자신의 역량을 맘껏 펼친 후 ‘저 에너지’(같은 책, 35쪽)상태가 되었을 때 우리는 여름을 맞이할 신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괴테의 홀로됨에 대한 욕망은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고자 하는 ‘저 에너지’상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절정에서 그 달콤함을 향유하고자 하는 이에게 ‘홀로’됨은 너무 이른, 익지 않은 풋과일과 같은 상태입니다.
바이마르 공국에서 행정가로서 자신의 삶을 유감없이 살았던 그는 미련없이 그곳을 떠나 로마로 향할 수 있었겠지요. 그가 그토록 꿈꿔왔던 로마에 도착하였습니다. 『이탈리아 여행기』는 이것과 저것을 연결하면서도, 이전 것이 끝을 지어가는 ‘매듭’이 되는 시기의 여정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결별과 새로움에 들어서는 이의 여정으로 그의 여행기가 보이기도 합니다.
익숙한 것과 거리두게하는 떠남, 홀로됨으로 떠나는 여행이 세상과 단절이나 고립이 아니라, 새로운 장에서 발휘되는 감수성, 마주하는 사물과 여타의것들과의 친화력이 괴테에겐 여행의 밑천이었군요! 낯선곳을 향해 떠날때 한번쯤 생각해볼 문제인것 같네요! 후기 잼나게 읽고가요^^
괴테가 고독을 자처하고 홀로 떠난 여행은 '소진'의 결과였을까요? 그렇다면 괴테에게 소진은 힘이 변환되는 지점처럼 느껴지네요. 사라지는 것과 함께 발생하는 힘이 있다는 것.
우리에게 고독이 어려운 것은 온전한 비움이 어려워서일까요? 후기 읽다 잔뜩 질문을 얻어가네요. 재미있게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