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 역사 2-5주차(6/26) 후기 및 공지
<이탈리아 기행>은 2권을 읽기 시작했어요. 괴테의 글은 기조가 조금 바뀐 것 같아요. 문체가 길어졌고, 자신의 생각을 풀어쓰며 보편에 접근하고자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언뜻언뜻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탈리아 여행 후 근 30년이 지나 2권을 완성하였으니 특히 그의 사유가 녹아 있다는 얘기도 나눴는데요. 선생님들도 <이탈리아 기행>을 읽으며 괴테의 다른 책들이 궁금해진다고 하셨습니다. <혁명의 시대>와 함께 읽는 <이탈리아 기행>은 괴테의 시선이 머무는 지점에 우리의 생각도 머물게 합니다. 인물을 보는 시선, 자연을 보는 시선, 왜 그곳에서 그것을 보았을까? 라고 말이죠. 이번 주는 특히 괴테가 “있는 그대로 본다”고 한 지점과, 그 시선으로 편견 없이 민중의 삶을 판단하는 이야기를 의미 있게 나누었던 것 같네요. 샘의 강의에도 이어집니다.
날씨와 신체
이번 주 샘께선 흥미로운 질문을 여럿 던졌습니다. 그 중 하나가 날씨에 대한 것이었어요. 기후 변화가 시대의 화두인 지금 특히 이 이야기는 생각거리를 많이 주었는데요. 옛날에 우리가 일기를 쓸 땐 날씨를 꼭 적었죠. 일기 쓸 때 날씨를 왜 썼을까요? 괴테의 글에도 날씨 얘기가 많이 나옵니다. 특히 이번에 머문 시칠리아에서는 비가 많이 내려 괴테가 전에 없이 투정을 부립니다. 비가 자주 내려 불편했다는 것과, 경희샘이 공통과제에도 적었는데, 불어난 강물 때문에 사람들과 짐들 가축들이 건너는 것을 돕는 일을 생계를 삼는 민중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괴테 시대 여행의 핵심은 기후입니다. 18세기 자연 과학에 대한 관심은 날씨에 대한 개인의 감수성을 민감하게 만들었다고 하는 걸 책에서 보았는데요. 편지나 일기에 날씨에 대한 언급이 많아지고 다양한 수사법이 생겨났다고 하더군요. 비오는 날은 대체적으로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시칠리아의 흐린 날씨 때문에 괴테가 고생한 걸 보면 십분 이해가 됩니다. 지금도 날씨는 쿠션어나 인사를 대신하며 쓰이죠. 그런데 괴테 시대의 날씨는 배경이 아니라 날씨 자체가 신체이자 삶이었고, 특히 길 떠나는 사람에게는 절대적인 요소였습니다. 날씨를 피해 갈 길이 너무나 요원해서이겠죠. 지금은 여행에서 언제까지 쉴 것인지 일정이 더 중요하지, 날씨는 약간의 변수 정도로 생각하죠.
날씨는 삶을 만들고 사유를 만듭니다. 샘은 사상은 신체성에서 나온다고 하셨네요. 니체가 따뜻한 남동부 돌아다니며 사유의 여정을 펼쳤고, 러시아의 추운 날씨는 그들의 예술과 문학을 무겁고 어두운 무게감으로 드러나게 했죠. 러시아 소설을 읽으며 두꺼운 외투와 털모자를 연상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맑은 날이 거의 없는 영국의 음울함은 핑크 프로이드와 라디오헤드, 오아시스의 등의 밴드에서 느낄 수 있는 무겁고 깔리는 음악을 만들었죠. 늘 볕이 좋은 곳에서는 나오기 어려운 정서입니다.
공통과제에도 이 얘기가 많이 나왔는데, 괴테가 북국과 남국 사람들의 모습을 비교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당시의 보통 지식인들이 남국 사람들이 게으른 것에 대해 비판을 많이 했나 봅니다. 괴테는 여기서 새로운 이야기를 제시합니다. “날씨가 추운 북국에서는 여름철에는 겨울철 준비를 해야 해서 가장 즐거운 날들을 노동을 위해 바쳐야 한다.”라고 안타까워 합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북방 얘기하면서 남방 사람들을 북방에 사람들에 기준해 비추어 준엄하게 비판한다”고 다시 비판하죠. 남방이어서 견유학파 같은 사상이 나올 수 있었다고 피력합니다. 괴테라면 북방의 왕을 하느니 남방의 견유학파로 사는 삶을 옹호했을 것도 같네요. 저희도 주역을 공부하며 사계절이 뚜렷한 지역의 사상이다 라는 얘기를 많이 했었는데, 사계절 자체가 풍요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괴테는 환경에 따라 존재 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었습니다. 지금은 날씨까지도 수량화해 버리죠. 날씨가 덥고 추운 신체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 온도 몇 도인지를 말하는 식으로요. 이런 무감한 태도가 기후 위기라는 사태에 직면하게 만든 건 아닐까요? 장차 이런 기후는 어떤 사상을 만들고,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킬까요? 추우면 히터, 더우면 에어컨이 당연한 지금 우리 신체도 매끈한 것 이상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지금은 소용돌이(revolution) 치는 중
혁명 다음엔 무엇이 있을까요? 평화가 찾아올까요? 평화는 혁명의 결과일까요? 샘은 혁명과 평화의 관계를 흥미롭게 풀어주셨어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혁명 다음은 평화가 아닙니다. 혁명은 우리 신체로 비유해 보면 수술을 한 것입니다. 수술은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후의 관리가 중요하죠. 혁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시간에 보았듯, 혁명은 이후의 엄청난 숙청은 평화를 상상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그럼 혁명은 무얼하는 걸까요? 혁명이 하는 일은 사람들 마음 안에 들어 있던 체념의 씨앗이 건드려져 터져 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혁명은 그런 의미에서 완성이 아닙니다. 그 다음을 전개시켜 나가기 위한 시초에 불과한 거죠.
자연 안에는 수많은 힘들이 교차합니다. 하나의 방향으로 운동하는 물질은 다른 방향으로 운동하는 물질과 상호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지요, 그 방향을 틀도록 만드는 소용돌이 같은 것이 물질에 내재해 운동하듯, 유기적으로 운동하는 역사 속에도 그 소용돌이가 늘 잠재해 있습니다. 그러다 어떤 미세한 조건 하나가 딱 맞추어질 때 혁명은 일어납니다. 이러저러한 힘들을 가지고 있던 것들이 한 순간 폭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revolution(소용돌이)입니다. 평화는 소용돌이를 내포한 일시적 안정의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이중 혁명 이후에 잠시 평화가 오고 다시 혁명이 일어나는 일이 <혁명의 시대>에서도 반복되고 있구요.
평화는 그래서 누구의 평화인지를 물어야 합니다. 이로운 평화인지 또 다른 혁명을 내포하고 있는 평화인지도 물어야 합니다. 그 평화의 시기 혁명의 열매가 누구에게 돌아가는지도 보아야 하구요. 프랑스 혁명이 부르주아의 승리로 끝났을 때, 그건 부르주아만의 승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혁명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죠. 누구와 함께 할 것인가가 남는 문제이지 혁명 없는 세상을 꿈꿀 수는 없는 일이죠. “세상에 실패하지 않는 혁명이 있는가? 혁명에는 성공이라는 것이 없다.”고 들뢰즈는 말했다고 하죠.
그럼에도 우리가 혁명을 꿈꿔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혁명은 배제된 목소리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68혁명은 동성애자, 흑인들과 같은 소수자의 목소리를 전면화하였죠. 소비에트 혁명은 배제되었던 프롤레타리아트의 목소리를 외부화했습니다. 그들을 호명함으로써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주의할 것은 하나의 목소리가 나오면 그 목소리는 또 다른 목소리를 잊혀지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한국의 노동운동이 노동자 계급의 목소리를 전면화 했지만 그 사이 여성의 목소리는 계급성 뒤로 밀어버린 것처럼요. 우리 시대 혁명이란 이런 배제된 목소리를 찾는 것이고, 최소화하는 것 일텐데요. 샘께선 동물권, 보호 속에 있으나 속은 터져 벌릴 것 같은 사춘기 청소년들을 예로 들었어요. 이 얘길 들으면서 배제된 것을 찾기 앞서 나는 누구를 무엇을 배제하고 있는지 보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재순샘께서 다음 후기 순번인데 이번 주 담당자가 없는 걸 아시고 후기를 올려주셨네요. 감사드리고요. 별 얘기 아닌 후기 및 공지를 며칠을 묵여 올립니다. 저의 고질병인데 큰일이네요. 벗들께 도움을 청하며 늦은 공지 죄송합니다. 내일 뵈어요.
*** 2-5주차 (6/26) 공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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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책
《이탈리아 기행2》 : 3부 로마 11월(~272p)
《혁명의 시대》 : 11~13장 (381p ~ 468p)
* 과제
- 문학 : 나누고 싶은 문장을 뽑고 생각을 담아 숙제방에 올립니다.
- 역사 : 연표 정리하여 숙제방에 올립니다
줌에서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