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 역사 2-6주차(7/3) 공지
괴테는 알수록 새로운 면모를 계속 보여줍니다. 표현 너무 진부하지만 양파 같다고 할까요? 격정에 휩싸인 소설가 괴테인 줄 알았는데, 시인이자 화가, 생리학자, 식물학자, 광물학자, 정치가인 괴테입니다. 몇 생을 살아도 이걸 다 하는 게 가능할 거 같지 않은데 한 인간이 한 생애에 이룬 것이라니 그저 놀랍습니다. 저희는 일명 괴며들었어요. 서서히 괴테에 빠져들었습니다. 급기야 글역 선생님 중엔 자꾸 괴테와 자신이 닮았다고 “우기시는” 분도 계시는데요, ㅋㅋ 채운샘께 근거를 요구받았을 땐 묵묵부답이었는 건 비밀입니다. 재미있게 공부한다는 뜻이죠. 이제 괴테와 마지막 한 시간을 남기고 있습니다. 글쓰기 수업이어서 그렇지 지금까지 만난 작가들의 작품을 깊게 읽어보는 세미나도 하고 싶네요. 또 기회가 있겠지요.
철학자의 고독
이런 괴테에 비하면 우리 근대인은 참으로 왜소합니다. <혁명의 시대>에서도 분석하지만 지식의 분화는 부르주아의 요구입니다. 앎을 표준화 시켜 바로 사회에 적용하여 써먹을 수 있어야 했으니까요. 행정가 은행원, 변호사, 등등 교육받은 계층이 체계적 교육을 필요로 했고, 학교는 이걸 충실히 실행하고 있죠. 한때 “전인교육”이라는 말이 유행했었죠. 통합 교육이니 통섭이니 하는 말이 교육계에 흘러다닐 때가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 그마저도 우리 사회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신자유주의 파고가 거세지면서 한 가지만 잘하면 먹고산다는 생각이 급속히 번졌고, 이젠 자명한 이치처럼 통용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괴테에게 반했다면 아마 이런 사회적 흐름에서 벗어난 사람, 동화되지 않는 사람이어서일 겁니다. 채운샘께서 고른 문장인데요, 책 읽을 땐 너무나 스피노자의 사유와 닮아 있어서 놀랐습니다.
저는 현재 세상과 온갖 세상사에서 몹시 떨어져 있기에 신문을 읽고 있으면 참으로 기분이 묘하답니다. 세상일은 흘러가 버리는 것이기에 저는 영속적인 관계의 일에만 전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스피노자의 가르침대로 먼저 제 정신에 영원성을 부여하고 싶습니다.
그가 ‘온갖 세상사에서 떨어져’ 있다고 하는 것은 여행 중이라 사람들과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상황을 묘사한 것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알던 것, 익숙한 방식과의 ‘거리두기’를 말합니다. 여행은 스스로 공무, 사교계, 유희, 쾌락 등과 거리두기를 시도한 것입니다. 전 스피노자와 괴테를 동렬에 놓고 나서 괴테의 글들이 재조립되는 걸 느꼈는데요. 스피노자 역시 부, 명예 정욕이 자신에게 최고의 기쁨을 영원히 맛보게 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어느 한쪽은 반드시 멀리 해야함을 알았다고 말합니다. 부득불 선택해야 한다면, 자신에게 가장 유용한 것을 행하겠다 ‘결심’하죠. “이런 사유들 쪽으로 향하는 동안 정신은 저것들에서 멀어지고 새로운 삶의 짜임”(지성교정론, 13번)이 만들어지기 때문이죠. 정신의 “영원성”도 인간의 지성을 최대한 확장해 신의 인식의 지평까지 다다르는 걸 말합니다. 필멸하는 인간이 신 안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기에, 내세에서가 아니라 현세에서의 영원을 구하는 것이죠. 철학자들은 모두 “고독”합니다. 이 고독은 지금 발 딛은 땅에 동화되지 않으면서 구원을 찾고자 하는 존재적 고독을 말하는 것이죠. 괴테의 고독이 느껴지나요?
여행 즉 공부
괴테에게 여행은 공부입니다. 일상의 일에 밀려 하지 못했던 것을 일상을 벗어난 여행지에서 하는 것이죠. 다시 온 로마에서 그는 그림을 배우고 건축을 다시 공부합니다. 예술가들을 만나고 예술 작품을 보며 끊임없이 탐구하고 온갖 지질 탐사와 지난 시간에 본 배수비오 화산에 오르기까지, 그의 지적 여정은 끝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여행은 곧 ‘휴식’으로 연결되죠. 열심히 노동한 댓가로 자신에게 제공하는 보상처럼요. 니체도 여행을 하는 근대인의 무지에 대해 비판했다고 하죠. 열심히 노동하면서 이윤 창출에 이바지하고, 여행 가서 소비함으로써 이윤창출에 기여하는 이중의 무지를 말입니다. 우리에게 여행은 무엇인가요? 어떤 걸 휴식이라고 생각하나요? 괴테의 여행에 견주어 본다면, 여행은 통념에 새로운 길을 내주는 것입니다. 여행은 비움의 장이 된다면, 새로운 생각의 길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지난 시간 채운샘의 인생여행 리스트에 있던 현장 법사의 구도의 길, 이런 여행을 말하는 걸까요? 그래서 마지막 주 쪽글의 주제는, “괴테에게 여행이란 무엇이었을까? 여행을 어떻게 삶의 실험으로 생각해 볼수 있을까?”입니다. 여행의 개념을 뒤흔든 괴테의 여행을 보며, 여행에 대해 재정의하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아울러 우리에게 여행이란?
중류계급과 상상의 공동체
우리는 18세기 후반 이중 혁명 이후의 변화를 홉스봄의 시선을 따라가며 배우고 있습니다. 그가 또 하나 주목하는 것이 “nation”의 탄생입니다. 민족이란 개념이 탄생한 것이라니요, 우리는 민족이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나라, 애국심, 한글, 백의민족...이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따라 나오는데 말이죠. 홉스 봄은 민족과 함께 부르조아, 국가, 학교, 모국어, 전문가, 매체 등을 동일 개념어군으로 묶습니다. 동시대 동일한 필요에 의해 출현해 민족주의의를 형성하는 토대역할을 하였다고 말합니다.
이중 혁명 이전에는 국가라는 개념이 거의 없었습니다. 크게는 로마를 중심으로 한 ‘제국’ 개념이 있었고, 실제적 영토개념은 귀족들이 다스리는 영토인 공국의 개념이 있었죠. 귀족들은 대대로 자신들이 물려받은 자신의 땅에서 절대적 지위를 가지고 다스리고 있었고, 평민들은 그 땅에 귀속되어 소작인으로 먹고 살면 되는 구조였죠. 귀족도 소작인도 국가라는 영토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유럽의 땅은 하나로 이어져 쉽게 넘나들 수 있었습니다.
그럼 이 국가를 중심으로 한 민족 개념을 요구한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그들은 중류계급입니다. 혁명이 일어나고 전쟁이 발발하면서 외부와의 전쟁에 대비해 국경을 수비하는 일과 내부적 치안을 담당할 요구가 생기면서 안에서는 공권력이 강화되었죠.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자연스럽게 내외부를 나누게 되었고, 국경이 생겨났죠. 그럼 어디까지가 지켜야 할 내부가 되는 걸까요? 여기에 중류계급의 요구가 있습니다. 그들은 이전의 계급구분에서 떨어져 나온 새로운 사람들입니다. 전문적 자유직업, 행정가, 전문가 교육받은 계층으로 말해지는 사람들로 귀족도 아니고, 농민도 아닌 자, 지식인입니다. 이들의 당장 현장에서 필요한 체계적 교육을 필요로 했고, 문서로 작성하기 위한 언어가 필요했습니다. 이전까지는 각 나라마다 말은 있었어도, 문서는 학문의 언어 라틴어로 쓰여졌죠. 중류계급이 쓰는 법을 배우는 가장 쉬운 길은 자국어를 배우는 것이었죠. 같은 말을 쓰고 그 언어만으로 표현할 수 있는 정서를 공유하고, 문화를 공유하면서 “민족”이라는 개념은 탄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모국어 개념도 생겨나죠. 원래 민족이라는 것이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민족을 ‘상상의 공동체’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홉스봄이 한 말은 아니지만(베네딕트 앤더슨의 주장) 홉스봄의 주장을 명쾌하게 정리해주는 말이죠. 대상이 먼저 있어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명명하고 명명한 것의 맥락 때문에 대상을 인식하게 된다는 걸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것이 민족이라고 샘도 강조하셨어요.
글과 관련해 흥미로운 질문도 있었는데요, 바로 문맹률에 대한 것입니다. 19세기 초중반까지 문맹률이 50% 가까이 되었다는 거예요. 특히 러시아는 90% 정도가 문맹 상태였다고 하죠. 근데 이 때가 소설의 황금기라는 겁니다. 괴테를 비롯해, 학창 시절 도저히 그 격정적 정서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하면서도 읽어댔던 대부분의 소설들이 쓰여진 때라구요. 도대체 누구 읽으라고 쓰는 소설인지?, 글을 안다는 건 무엇인지?, 모두가 글을 아는데 우리는 왜 책을 읽지 않는지? 샘의 질문이 쏟아졌어요. 소설이나 신문을 광장에서 읽어주는 사람이 있었던 말의 시대라는 설명이 있었지만 ‘글을 안다는 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남았어요. 주역에서도 글로 써놓고 말을 매달았다(繫辭)고 하거든요. 제 질문으로 가져가 봅니다.
또 저에게 남았던 질문은 존재 증명에 대한 것인데요. 이런 전문가들에 의해 문서의 시대가 열렸죠. 저도 요즘 개인적인 일 때문에 문서라는 말에 악 소리를 지르고 싶어지는데요, 이 19세기의 여파로 우리도 문서로 자신을 증명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요. 그 전에 사람들은 자신을 무엇으로 증명했을까요? 그리고 디지털 시대로 접어든 지금 디지털화가 더 진행이 되면 우리 시대의 규정과 규범들이 조금씩 해체될 텐데, 그땐 무엇으로 우리를 증명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 역시 bold 해 놓습니다. 이외에도 재미난 질문들이 많습니다만, 궁금하면 글쓰기와 역사 같이해요.ㅋ 사실 이번 주 읽은 <혁명의 시대>는 빈민들의 상황, 전염병의 창궐, 대중들이 세속화되면서 절대적 종교성에서 벗어나 비종교화 되는 현상, 종교를 대신해 자유주의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자리하는 것에 대한 부분이었어요. 이건 다음 주에 강의로 넘기고, 담주는 드디어 1848년의 소용돌이로 진입합니다. 혁명은 왜 영국이 아니고, 프랑스도 아니고 러시아에서 일어났을까요?
*** 2-6주차(7/2) 공지합니다***
▶괴테 마지막 시간을 남겨놓고 있지요. 모두 끝까지 읽으면 될 거 같습니다.
《이탈리아 기행2》 : 3부 로마 4월 (~436p)
《혁명의 시대》 : 14~16장 (469p ~ 끝)
▶과제
* <이탈리아 기행>을 읽고 괴테에게 여행이란 무엇이었을지? 여행을 어떻게 삶의 실험으로 생각해 볼수 있을지? 아울러 우리에게 여행이란? - 여행을 나름 재정의해 생각을 적어 올려주세요
* 역사 정리는 숙제방에 올리지 않아도 됩니다. 대신 미니강의가 준비되어 있지요.
예술 파트를 경희샘께서, 과학 파트를 재순샘께서 정리해주시기로 했습니다. 기대기대!!
월요일에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