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04. 03 글쓰기와 역사2-1 후기
후기란 세미나의 여운이 가시기 전 다시 한번 복기차원에서 올려야 좋은데 두 번째 수업이 끝나고서야 올리게 되어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루쉰의 글은 참 건조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렇다고 와서 닿는 느낌이 없지도 않구요. 어찌 보면 볼테르나 마크트웨인의 글과 일정부분 닮은 느낌도 듭니다. 계몽주의의 영향이 아닐까 혼자만 생각해 봅니다. 루쉰은 저에게 생소한 작가입니다. 물론 어느 작가가 제게 익숙할까마는요... 그래서 어느 시대에 어느 환경에서 어떻게 살아갔는지 알고 싶어 조금 찾아보았습니다. 우리 정옥샘이 극찬해 마지않는 루쉰이 정말 궁금했습니다.^^
루쉰1881.9.25. ~ 1936.10.19.
중국 저장(
浙江)성 사오싱(
紹興)에서 태어난 ‘루쉰’(
魯迅)은 그의 필명이었으며, 원래 성은 저우(
周)씨였고, 어린 시절의 이름은 장서우(
樟壽)였습니다. 본명으로 알려진 수런(
樹人)은 그가 17세 때에 학교에 들어가면서 바꾼 이름이라고 하네요. 지역에서는 제법 위세 있는 사대부였던 루쉰 집안은 루쉰이 13세 때 할아버지가 뇌물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고 아버지가 병사함으로써 갑자기 집안이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려서부터 전통 교육을 받고 한때 과거에도 응시했지만, 가정 형편상 학비가 무료인 난징(
南京)의 수사학당(해군학교)에 진학하였고, 광무철로학당(철도학교)으로 옮겨 본격적으로 신학문을 접합니다. 졸업 후인 1902년에는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센다이 의학전문학교에 입학(1904)하여 의사의 길로 들어서는 듯 했지만, 강의 도중 중국인 처형 장면을 보여주는 영화상영에 분노한 나머지 의학 공부를 파기하고 자퇴합니다. 공부를 중단한 뒤 작가의 길로 들어서나 했지만 가정 형편상 장남인 루쉰은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을 돌봅니다.
1909년에 귀국한 루쉰은 항저우(
杭州)에서 교사가 되었지만 보수적인 학교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금세 사직하고 1911년에
우창(武昌) 봉기로 인해 루쉰은 사범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지만, 몇 개월 만에 고위층과의 갈등으로 사직합니다.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이 수립되자 난징 임시정부의 교육부 장관이 된
차이위안페이(
蔡元培)가 루쉰을 찾는데 이때부터 그는 교육부에서 일하게 되었고, 이듬해에 임시정부를 따라 베이징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이즈음의 루쉰은 일종의 허무와 자조 상태에 빠져 있었고, 한동안 교육부의 업무 외에는 거의 두문불출하며 고전 연구에만 전념했는데, 유학 시절에 품었던 계몽주의적 포부가 귀국 이후에 현실에 부딛혀 차츰 허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 루쉰이 갑자기 적극적인 문필 활동 쪽으로 선회하게 된 한 가지 계기가 있는데, 그것은 한 친구가 찾아와서 잡지에 수록할 원고를 청탁하자, 그에 대한 반론을 제기 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가령 창문이 하나도 없고 무너트리기 어려운 무쇠로 지은 방이 있다고 하세. 만일 그 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깊이 잠이 들었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이 막혀 죽을 게 아닌가. 그런데 이렇게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가 죽는다면 죽음의 슬픔을 느끼지는 않을 걸세. 지금 자네가 큰소리를 쳐서 잠이 깊이 들지 않은 몇몇 사람을 깨워, 그 불행한 사람들에게 임종의 괴로움을 맛보게 한다면 오히려 더 미안하지 않은가?”
그러자 친구는 이렇게 반문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이 일어난 이상, 이 무쇠 방을 무너트릴 희망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잖은가.”
친구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루쉰은 글을 한 편 기고했는데, 1918년 5월 15일자 [신청년]에 실린 그 작품이 바로 첫 번째 단편소설 [
광인일기]였다고 합니다. ‘루쉰’(
魯迅)이라는 필명을 처음 사용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하지요. 현대 중국문학의 아버지로 손꼽히는 루쉰이지만, 정작 그가 남긴 문학 작품은 중편 1편, 단편 32편으로 상당히 적은 편이며 수준도 들쑥날쑥합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의 문학 작품이 당대에 끼친 영향력만큼은 누구도 감히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1920년부터 루쉰은 베이징의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는데, 학내 투쟁에 가담한 학생들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던 루쉰은 결국 13년간 몸 담았던 교육부에서 파면됩니다. 1926년 3월 18일 학생 및 시민의 평화시위에 대한 정부의 무력진압으로 제자들을 잃은 루쉰은 “민국 이래 가장 어두운 날”이란 표현이 담긴 기고문을 통해 분노와 슬픔을 표현했고, 반정부 지식인에 대한 수배령이 발표되자 루쉰은 여제자인
쉬광핑(
許廣平)과 함께 베이징을 떠나 상하이로 도피합니다. 루쉰은 일본 유학시절 어머니의 강권으로 결혼한 아내 주안(
朱安)과는 이혼도 하지 않고 17년 연하의 제자 쉬광핑과의 동거로 유일한 혈육인 저우하이잉(
周海嬰)을 낳았습니다.
상하이에서 루쉰은 창작보다는 논쟁과 강연에 몰두하는데, 이미 신문학 운동의 대표자로 자리 잡은 루쉰을 향한 신세대 작가들의 비판이 거세었으며, 논쟁을 위해 루쉰은 뒤늦게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공부하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그 즈음에는
쑹칭링(
宋慶齡) 등이 결성한 중국자유운동대동맹에 발기인으로 참가했다가 신변 위협을 느껴 한동안 도피 생활을 했는데요, 1930년에는 중국좌익작가연맹(좌련)에 가담했는데, 이듬해 초에 좌련 소속 작가 여럿이 검거되면서 루쉰도 수배자가 되어 또다시 한동안 도피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1936년에 들어서 루쉰은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었으며, 결국 그해 10월 19일 새벽에 상하이의 자택에서 55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사망 한 달 전에 발표한 “죽음”이라는 글에서 루쉰은 평소의 직선적인 성품에 걸맞는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장례 때 조의금 받지 마라,” “가급적 빨리 매장하라,” “기념행사 치르지 마라,” “나에 대해서는 얼른 잊고 당신들이나 열심히 살아가라”
그리고 그는 임종에 직면하면 오랜 원수조차도 너그러이 용서하는 서양의 관습을 언급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결코 원수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단언했다고 합니다.
“그들도 얼마든지 증오하게 내버려 두어라. 나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루쉰이 현대 중국을 대표하는 위인 가운데 하나로 부각된 데에는 문학 자체만이 아니라 정치적 측면의 영향도 없지 않았다고 합니다. 즉 공산주의 정권의 ‘루쉰 찬양’에서 비롯된 과대포장과 확대해석이 없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단지 위대한 문학인일 뿐 아니라 또한 위대한 사상가이자 혁명가였다“
마오쩌둥의 이러한 발언은 당시 루쉰에 대한 중국 정부의 인식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뚜렷이 보여줍니다. 결국 루쉰의 생애와 작품에서 혁명 관련 부분은 과대평가되는 반면, 그 이외의 부분은 과소평가되었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반공을 국시로 삼은 대만에서는 루쉰을 좌익 작가로 간주한 나머지 1980년대까지 그의 작품을 금서로 취급했고, 중국 대신 대만과 교류한 1960년대와 70년대의 우리나라에서도 루쉰은 단지 계몽주의 소설가로만 이해되었습니다. 1980년대 이후로는 우리나라에서도 ‘혁명가’ 루쉰의 면모가 강조되었지만, 이것 역시 당시 중국의 편향된 관점을 답습한 셈이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따라서 최근 들어서는 중국에서나 한국에서나 루쉰을 보다 종합적인 맥락에서 바라보려는 시도가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루쉰은 결코 어떤 한 가지 이념이나 주장을 맹신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의 정신에서는 항상 뭔가를 물색하면서도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하는 회의적인 측면이 강했고, 루쉰의 현실 인식은 냉철하다 못해 오히려 비관적이었다고 합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유명한 강연 “집을 나간 노라는 어떻게 되었나?”를 읽어보면, 루쉰이 단순히 중국 여성의 현실을 비판한 것뿐만이 아니라, 그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중국의 전반적 무기력을 한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루쉰이 비록 말년에 좌련에 가담하고 공산당의 정책을 지지했음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루쉰이 전적으로 공산주의에 경도된 것은 아니었으며, 루쉰의 이런 모순적인 태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는데, 어쩌면 초기의 이상주의자 겸 계몽주의자로서의 목표가 현실과 갈등을 빚는 과정에서, 점차 자포자기하는 태도를 지니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위에 소개한 비유를 원용하자면, 그는 ‘무쇠 방’을 무너트린다는 ‘희망’을 이야기했을 뿐이지 본인조차도 ‘확신’을 품은 것까지는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쉬광핑에게 보낸 1925년 5월 30일자 편지에서 루쉰은
“솔직한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 내가 하는 말들은 정작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다릅니다. 어째서 그런지는 [외침] 서문에 밝혔습니다만, 나의 사상을 다른 사람에게 전염시키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원하지 않는가 하면, 나의 사상이 너무나 어두운 탓입니다. 그리고 스스로도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항하겠다’는 말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라고 썼다고 하지요. 루쉰의 정치색은 잘 모르겠으나, 자타를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어둡고 회의적이고 비관적이며 저항하는 작가임은 틀림 없는 것 같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현대 중국을 찾아서1 - I정복과 통합
16세기 말, 명 왕조의 영화는 절정에 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화나 예술면에서의 성과도 뛰어났고, 도시생활과 상업은 전례 없이 번창했으며, 인쇄,도자기,비단 제조술은 동시대 유럽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독보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시기를 '근대 유럽'의 탄생기로 보는 것과 달리 중국의 경우 근대의 확실한 출발점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당시 서양은 폭넓은 지구 탐험의 중심지였던 데 반해, 명의 통치자들은 오히려 해외원정과 그것에서 얻을 수 있는 지식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그로부터 50년도 채 못되어 왕조의 비극적인 종말을 초래한 일종의 자기파괴적 형태를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 명 왕조의 방만한 관료,경제 체제는 여러 부분에서 해이해지기 시작했는데, 세수는 군인들의 보수를 제때 지불할 수 없을 만큼 줄어들었고, 빈번한 탈영은 적대적인 부족들의 국경 침임을 부추겼습니다. 또한 서양에서 유입된 은은 중국 경제에 예상치 못한 압박을 가했고, 곡창지대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이 약화되었으며, 모진 기후 조건으로 인해 농촌 사람들의 영양실조와 전염병은 극에 달했습니다. 결국 1644년 명의 마지막 황제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맙니다.
채운샘께서는 아편전쟁에 대해 좀더 자세히 조명해 주셨습니다.
산업혁명 이후 넘쳐나는 재화를 팔 시장이 필요했던 영국은 청나라와의 교역을 통해 판로를 모색했지만 오히려 청의 홍차 수입으로 무역불균형에 처합니다. 이로 인해 은화의 유출이 심해지자 영국은 청나라 사람들이 치료의 목적으로 쓰는 아편을 동인도 회사를 통해 밀수출하며 청나라 전역을 아편중독에 빠뜨립니다. 사회적, 경제적 파탄에 이른 청나라는 급기야 영국 상인들의 아편을 몰수해 불태웠고, 영국은 보복으로 전쟁을 일으킵니다. 3년 간의 전쟁은 청나라의 완패로 끝났고, 청은 영국에 배상금 지급, 홍콩 할양, 상해와 광둥을 포함한 5개 항구의 개항등 불평등한 조약을 체결하는데 이것이 바로 난징조약입니다.
채운샘께서는 필수재 보다는 기호품이 더 의존성이 강력해서 필수품에 중독되는 일은 없지만 기호품에는 중독이 잘 된다고 하셨습니다. 기호품은 자극성, 마취성, 방향성이 있어 미각, 촉각, 후각, 시각등에 쾌감을 주고, 한 번에 많은 양을 섭취하게 되면 지나친 쾌감과 흥분을 동반하기 때문에 기호품을 넘어 약물이나 독물로 작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얼마전 대치동 마약음료 사건으로 떠들썩 했는데요. 인간의 감각은 참 현명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알아채는 능력이 있기도 하지만 중독이 되면 감각이 무뎌져서 잘 속아 넘어가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공부를 필수품으로 써야 할까요? 기호품으로 써야 할까요?
감각을 지배하는 것은 사유를 무감각하게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 같아요. 예속을 자처하게 만든다는 점에서요. 기호식품을 통한 중독은 인간 지배의 최전선으로 보입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도 그렇고, 중국인도 그렇고 이것엔 굴복할 수 밖에 없었으니까요. 감관을 수호해야 하는 이유. 간단히 소회를 적기로 하시곤 에세이를 쓰셨네요. 덕분에 공부가 되었네요. 잘 읽었습니다.
정옥샘은 이미 알고 계실 내용인걸요…^^ 얼마전 코로나를 앓고 난 후 부터 감관을 수호한다는게 참으로 어렵게 느껴집니다. 이 어렵게 느껴진다는 생각 조차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감관이 무뎌졌다고 생각되는건 정말 기분탓일까요…?
저는 루쉰의 글을 읽다보면 팽팽하게 긴장하고 있는 저 자신을 보게 됩니다. 뭔가 한자도 허투루 읽을 수 없다는 날선 느낌이 돋아나서 좀 피곤하기도 하구요. 이 긴장감이 과도한 의미부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가 싶어요. '한 가지 이념이나 주장'을 맹신할 수 없었던 루쉰이라는 말이 나오네요. 루쉰에 대한 이유없는 동경과 맹신으로 생기는 긴장감은 아닌지... 영민샘이 서두에서 밝힌 루쉰의 글에서 느낀 건조함이란 무엇인지 궁금해집니다.
제가 아무래도 감관에 이상이 온 듯 하군요… 그리 건조하게 느낀 글들이 오늘은 왠일로 이렇게 멜랑콜리하게 느껴지는지요… 아무래도 제 마음이 건조했고 또 제 마음이 멜랑콜리한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후지노선생을 향한 마음 전하지 못하는 애틋함과 안타까움이 건조한 문체속에서 촉촉하게 느껴지니말입니다…
마지막 문장 질문에서 필수품과 기호품을 생각하기 이전에 선생님께 공부가 무엇일까요?
밥을 필수로, 커피를 기호로 줄곧 생각해왔는데 밥보다 커피를 더 많이, 더 자주(규칙적으로) 먹고있는 저를 볼때면 필수와 기호의 경계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공부를 둘중에 한쪽에 둘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둘 중 어느 쪽이라도 욱여넣어 중독이라도 시키고싶은 마음에서 자조섞인 질문을 올렸습니다. ㅠㅠ 선생님의 질문에서 느껴지는 회초리는 달게 맞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