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다는 툴툴거림을 계속 기대하면서
뭐, 이리 어렵노. 루쉰의 책을 읽으면서 지난 주에 이어 이번 주도 어렵다는 푸념이 나오려 한다. 새로 고쳐 쓴 신화 3편을 읽고 글을 쓰자니 막막하다. 나오려는 푸념을 참으며 정옥샘이 보내 준, 원래의 중국의 신화 3편을 읽어내렸다. 그 신화를 읽으면 좀 뭐가 잡히려나 싶었다. 그 신화들 덕분에 신화 속 등장인물이 어떤 전형성을 지녔는지 짐작은 할 수 있지만 루쉰의 글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다시 돌아와 루쉰이 고쳐 쓴 신화를 읽는다. 전과는 다르지만 글을 쓸 엄두는 나지 않는다. 행여 도움이 될까 싶어서 오래 전에 읽었던 『루쉰, 길 없는 대지』(북드라망, 고미숙, 채운, 문성환, 길진숙, 신근영, 이희경)를 펼쳐 『새로 쓴 옛날이야기』에 대해 고미숙 샘이 쓴 글을 찾아 읽었다. 한 호흡에 재밌게 읽어내렸지만 역시 내가 루쉰과 만날 접점이나 이 책에 대한 나의 태도를 얻기가 어렵다. 어디에서부터 무엇을 가지고 글을 써야할지 쥐어지는 것이 없어 초조하다. 무엇보다도 루쉰의 글에 대한 나의 입장이랄까, 위치를 잡기가 어렵다. 루쉰의 글은 매번 이런 경험을 준다.
루쉰의 글에서 길을 잃음
아니나 다를까, 세미나에 참여한 학인들의 글도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뿐만아니라 루쉰의 평전(『루쉰전』, 다섯수레, 왕스징)을 읽고 ‘새로 쓴 옛날이야기’에 대한 루쉰의 입장에 접근한 이도 있었고, 루쉰전집 뒤편의 옮긴이의 해설을 읽고 각자 생각의 단초를 마련하려 한 흔적까지. 다른 학인들도 이리저리 정리되지 않는 생각들로 글을 쓰면서 아쉬움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지난 시간에 이어 루쉰의 글을 읽는 어려움을 느끼고 있구나 싶었다. 다른 사라들은 무엇으로 접점을 만들어 글을 썼는지 궁금했던 터라 이제 그들의 글을 듣는다. 하지만 역시 간단하지 않다. 누군가의 글을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와 다르게 이해한 이의 말들이 이어진다. 이 다양함은 세미나라는 열린 공간이 만들어주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루쉰의 글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우리의 푸념을 만들어내는 것에서도 기인하는 것 같다. 루쉰의 글은 우리의 공통감각을 건드리면서도 쉽게 이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면들이 있다.
루쉰의 글을 읽는다는 것에서 어려움을 느끼는 것 중의 한 가지를 꼽아보라면 정서적 혼란이다. 『아침꽃 저녁에 줍다』에서부터 느낀 바이지만, 거기에 글들은 40중반이 된 루쉰이 20~30년 전 일을 회상하며 쓴 글들이다. 그런데 그 글들엔 과거의 회상으로만 여기며 아련한 향수에 젖을 수 없게 하는 힘들이 있다. 그 글을 쓸 때 루쉰이 처한 상황들이 그중 하나다. ‘아침꽃 저녁에 줍다’는 죽음과 테러의 위협 속에서 도망다니면서 쓰여진 글들이다. 쓰지 않으면 그만인 것이 글일 것 같은데...도저히 쓸수 없는 상황에서 루쉰이 글을 썼다는 사실에 그 글들에서 느끼는 것들을 쉽게 단정지을 수 없다. 게다가 그렇게 쓰여진 글들임에도 비장함이나 개인의 곤란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담담함과 솔직함이 느껴져서 읽는 나를 당황하게 한다. 죽음에 쫓기면서 쓴 글이라고 하기엔 내가 예상할 수 있는 것과는 거리가 먼 여러 정서들이 교차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우리가 비일비재하게 겪는 소소한 일상의 감정들이 되살아난다. 그래서 우리가 나눌 이야기는 많아지고 깊은 공감대가 만들어진다. 낯섦과 깊은 공감 사이를 오간다.
『새로 쓴 옛날이야기』는 신화를 고쳐 쓴 이야기다. 하지만 이 신화라는 바탕 위에서 글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현대적(?)이다. 그리고 일상적이다. 신화라고 하면 시공간을 초월한 전체에 대한 환상을 만들고, 집단의식을 고취하는 경향이 있다. 단군신화만 보더라도 ‘단일민족’이라는 순수혈통과 ‘순수’라는 배타적 경계를 만드는 역할을 한다. 루쉰이 고쳐 쓴 신화는 내가 신화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익숙한 감각을 힘들이지 않고 툭 잘라낸다. 신화라고 하기엔 내 개인이 지금 겪는 일상 다반사의 일이 그려졌다. 루쉰의 신화는 사건이 훅훅 건너뛰면서 거시적인 것을 다루는 신화적 사건의 사이, 그 사이에 있는 작은 일들을 다룬다. 영웅들도 깨알같은 일상을 겪는다. 인간을 만드는 노동에 지치고,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종일 일했지만 아내의 타박에 기가 죽는다. 그들도 먹고 배설하고 쓰레기를 만드는 존재들이다. 시간과 관계 속에서 예외자나 초월자가 없다. 세상을 구원하는영웅이나 초월자를 기대하는 나의 신화에 대한 감각이 설 곳을 잃는다.
익숙한 감각을 잃은 나는 그의 글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 혼란스럽다. 하지만 글을 써서 숙제를 제출해야 하니 어쨌든 되지도 않는 생각들을 적어간다. 글을 쓰기 위해 찾고 싶던 접점 하나가 글을 쓰는 동안에 그제서야 꾸역꾸역 만들어진다. 답을 얻어서 글을 쓰려했는데, 글을 쓰니 비로소 만들어진다.
무엇인가를 하려는 자들의 안간힘
『소와 흙』(글항아리, 신나미 소스케)에서 만났던 사육사들과 루쉰의 삶에 대한 태도가 닮아있다고 느꼈다. 2011년 폭발한 후쿠시마 원전 사고 후에도 경계구역 안으로 들어가 그곳에 남아서 소들 그리고 뭇 생명과 고통을 함께 하던 이들에게서 느낀 그 특이성. 자신을 그 고통 속에서 빼내지 않고 그곳에 속한 것으로서 그곳에서 살아남은 것, 죽어가는 것, 태어날 것들과 함께 살길을 모색하던 이들이 있었다. 나는 그 책의 사람들을 보면서 루쉰이 자신의 시대와 관계 맺고 있던 방식이 이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았다.
루쉰에 대한 낯선 감각. 그와 그의 삶을 어떻게든 빨리 단정짓고, 그로 인해 겪는 혼란이라는 불편함에서 놓여나고 싶었다. 그를 정의할 수 있는 한마디 말을 찾곤 했다. 내 머리 속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일로 여겼다. 하지만 출현은 하는 과정 중에 나도 모르게 생겨나는 것일지도. (이렇게 쓰자니 너무 거창하고 감당할 수 없게 느껴져 이 문장을 지우고 싶다.) 세미나 중 누군가 자기질문을 갖는 태도를 견지하는 것으로 글쓰기와 관련한 태도를 이야기했었는데 차라리 출현을 그런 태도와 관련지어 이야기하고 싶다.
다시 ‘소와 흙’의 사육사와 루쉰의 이야기로 돌아오면, 루쉰은 환등기 사건에서 자신이야말로 구경꾼이라는 자각을 했다고 한다. 구경꾼이라는 자각, 자신을 상황과 고통으로부터 배제시켜 자신의 위치를 갖는 태도. 필요에 따라 세상의 일에 선을 그어 자신의 익숙함을 지키려는 모습. 그렇게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로부터 초월한 존재로 자신을 인식하는 안일함. 그의 글은 어쩌면 어떻게든 그가 사는 세상으로부터 빠져나오지 않으려는 몸부림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이 세상으로부터 놓여날 수 있다는, 놓여날 곳이 있다는 망상과의 싸움. 자신이 빠져나오고 싶을 때마다 자신의 몸을 대지에 더 깊이 뿌리박게 만드는 행위가 글을 쓰는 일은 아니었을까. 아~ 너무 거창해졌다.ㅠ
세미나에서 어렵다는 우리의 푸념으로 다시 돌아와 그 정체를 다시 생각해본다. 글을 읽고 글을 쓰기까지 겪는 어려움에서 빨리 빠져나오고 싶은 마음이 어렵다는 푸념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푸념은 한편으로 무엇인가를 하고있는 이들의 가벼운 소란함 같은 것이기도 하다. 무엇인가를 하고 있기에 겪는 어려움. 무엇인가를 해보려는 안간힘을 우리도 나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곤란함을 겪은 우리는 또 서로에게 어려움을 호소하고 서로를 다독이며 세미나를 시작할 것이다. 다음 세미나에서 학인들은 뭐라 어렵다고 툴툴거리려나.
어렵다.. 툴툴 거린다...(=각자 무언가를 하고 있다...)
루쉰과 소와 흙의 사육사들의 특이성이 무얼까 좀 더 궁금해지고... 경희샘의 망상과의 싸움, 대지에 더 깊이 뿌리박게 만드는 행위로서의 거창한 후기쓰기에 매료되는 구만요..
포장 경희샘 후기에서 자신의 생각을 공부한 것들과 이어가는 것이 무엇일까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고민할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이번주는 처음으로 글역팀 오프로 만나서 툴툴거리고 ~그 힘으로 또 과제를 하고~ 툴툴거릴 수 있는 매주 월요일이 기다려집니다~^^
이 툴툴거리는 공부가 매주 기다려집니다.
자신을 상황과 고통으로부터 배제시키려는 안일함이라는 말이 콕 박히네요. 무엇이 나를 세상으로부터 자꾸 도망가게 하는 걸까요? 음.... 트웨인에게서 루쉰에게서 샘에게서 같은 질문을 받은 느낌... 후기 잘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