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 역사 시즌1 마지막(5/15) 공지
시즌1의 긴 장정이 이제 에세이와 암송과 역사시험만(?) 남겨 놓고 있네요. 마크 트웨인, 루쉰과 함께 ‘유머와 풍자’를 주제로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간이었어요. 더불어 그들이 살았던 19세기를 중심에 두고 전후의 역사도 함께 보며, 시대적 배경 속에서 그들의 글을 보고자 했습니다. 역사가 스며있지 않은 글은 없다고 했는데, 우리 글 속에도 모두 역사가 스며있게 하라는 말씀.... 어떻게 에세이 쓰기는 순조로우신가요? 자신의 글쓰기를 돌아보는 좋은 시간이 되길 바래봅니다. 이렇게 기계처럼 말할 수 밖에 없네요 ㅋㅋ
희망도 절망도 없이
이번에 읽은 <고사신편>의 마지막 세 이야기는 <노자><묵자><장자>를 모티브로 각색한 것입니다. 장자나 노자 묵자는 사람에 대한 존칭이자 텍스트명이죠. 고전 텍스트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한 존재의 말이자 행위가 텍스트가 된다는 것이 우리 시대나 자신의 공부를 돌아보게 하는데, 루쉰의 글을 보면 그 자신 말이나 글과 어긋나지 않게 살았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중 하나가 섣부른 희망으로 갖지 않는다는 것인데요, 세 편의 글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는 태도입니다.
노자는 좋은 말을 기다리는 대중들 앞에서 한 말씀 전하길 요청 받지만, 웅얼거리는 발음에 아무도 그의 말을 알아먹지 못합니다. 그래서 관문지기가 노자에게 했던 말을 글로 남겨달라고 부탁하게 되지만 이 역시 알아먹지 못할 글뿐입니다. 지식인들이 하는 현학적이고 유려한 말이 민중들에게 먹히지 않았던 것이지요. 노자는 그렇게 관문을 나서고 밖에 나가보니 안개가 자욱하고 사막이 펼쳐져 있었던 거죠. 장자도 엉뚱하게 길 가다 만난 해골을 사대신령님께 빌어 다시 살아나게 합니다. 정작 발가벗겨진 채 깨어난 본인은 원하지도 않은 일이자, 살아나게 한 장자도 책임지지 못합니다, 삶과 죽음이 하나라고 말하는 장자지만, 사람들에게 살아갈 어떤 힘도 주지 못하는 지식은 유용한 것인가 묻고 있는 것이죠. 여기서 지식인의 모습은 누구에게 도움이 되지도 못하고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 형국입니다. 묵자는 더 안타까움을 자아내죠. 어렵게 어렵게 설득해 전쟁을 막아내지만 댓가는 커녕 옷도 돈도 빼앗기고 비까지 맞아 감기에 걸린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세 성인은 당대 루쉰이 비판하던 지식인이기도 하지만 루쉰 자신이기도 하지요. 특히 묵자는 실천적 지식인의 적막함과 고독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통해 루쉰은 질문합니다. 앞은 사막이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 그래도 그 길을 가겠는가? 더한 배고픔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래도 가겠냐고 말입니다. 채운샘은 현실에 절망하여 허무에 빠지는 자도 나아가지 못하지만, 섣부른 환상에 빠진 자도 나아가지 못한다고 하셨죠, 환상은 언제나 현실과의 괴리를 만들고 그 괴리 때문에 또 쓰러지게 된다고요. 아이러니하게도 장애를 넘고 나면 또 다른 장애가 오지만 그것이 우리를 나아가게 하는 힘이라는 겁니다. 희망도 절망도 가지지 않을 때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 그저 가는 것만이 있다는 이 공허를 우리는 잘 견딜 수 있을까요? 재미있게 공부하고 루쉰이 던진 묵직한 질문을 받아 안았네요.
문헌학적 읽기
시즌1 마지막 시간이라 그런지 샘은 강의를 시작하며 역사 공부하며 무엇이 남았는지 질문을 하셨어요. 삶은 늘 고달프구나, 인간이 동물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시대건 자신의 이익과 돈이 중요하다 등등 이외에도 여러 답을 해주셨는데요. 채운샘께선 문헌학적 읽기를 즉 넓게 읽기를 주문하셨죠. 우리가 텍스트를 전면적으로 읽지 않으면 ‘알던 것을 확인하는 것에 그치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지 않으려고 공부하는데,
우리가 역사 텍스트를 읽고 있지만 과거가 현재와 다르지 않다는 걸 너무 많이 느끼죠. 루쉰 쪽글 쓰면서 많은 샘들이 ‘지금과 다르지 않다’라는 말을 후렴구처럼 썼던 걸 보면 그런 것 같지요. 그러나 사실 과거란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지점과 같은 것이죠. 그럼 현재 어떤 지점을 보고 있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일차적으로 내가 이 시대 누구와 연대하는지를 보면 됩니다. 에드워드 사이드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쉬울까요? 그는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에서 태어나 미국 콜럼비아 및 유수의 대학에서 교수를 지내는 독특한 이력을 가졌죠. 아랍인 출신에서도 드물게 기독교인이었구요. 그는 동양을 타자화 하는 서구의 동양관을 폭로한 걸로 유명합니다. 서양이 제국지배라는 야욕으로 동양을 하위에 넣으려는 총체적인 힘에 저항하며. 탈식민지화를 주장했죠. 그에겐 다른 누구와 연대할 아주 많은 길이 있었죠. 그럼에도 가장 위험한 팔레스타인과 연대함으로써 탈식민 논리를 정교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지식인의 역할을 아주 강조하기도 했는데요, 역사 속에서 현재를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일겁니다.
루쉰도 마찬가지입니다. 편파적으로 세상을 단죄하려는 심판자적 입장이 아니라, 그 시대를 해석하고 동시대와 진동하고자 했지요. 그럴 때 자신이 어떤 문제 앞에 있는지 볼 수 있었던 것이겠죠. 역사를 본다는 것의 의미는 눈앞의 자잘한 문제에 우리가 함몰되지 않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자잘한 문제는 통념에 따라 살려고 할 때 생기기 쉬운 것이죠. 문헌학적 읽기는 나와 다른 한 생각을 발견하는 것이기도 하네요. 이 훈련을 글역에서 하는 거겠죠.
에세이는 잘 되어가고 계신가요? 공지합니다.
*** 다음 주 에세이 공지입니다.***
* 장소 : 규문각 10:00
* 진행
10:00~10:30 암송
10:30-11:00 역사 시험
11:10~15:00 에세이 발표
* 점심은 간단히 먹고 끝나고 뒤풀이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정옥샘의 공지가 에세이쓰기에서 시작해서 에세이쓰기로 마무리되는 것 같아요. ^^ 샘의 말대로 마크트웨인과 루쉰은 우리에게 웃을 수 있는 담담함을 전해주었는데 ... 에세이를 쓰려는 저는 한없이 무거워지네요. 내일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