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 역사” 시즌1-1 3주차(2.27) 공지
《허클베리핀의 모험》을 통해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첫 시간 토론에서도 여러 토픽이 제기되었는데, 앞부분을 읽은 후여서 그런지 이번 시간엔 생각에 밀도를 더해주셨어요. 관계에서 믿음과 신뢰를 형성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기 고백과 자기 발견으로 드러나는 인간의 숭고미, 인식의 전환이 어떻게 관계를 다르게 만드는지, 양심과 본능에 대하여, 노예와 자유에 대하여 등등. 거창한 주제들에 비해 토론은 소설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지만 2시간의 토론시간이 부족할 정도였습니다. 매 시간 선생님들의 과제가 기다려질 거 같아요.
양심적 자기 고백
이번 토론에서 모두가 공감을 일으켰던 부분은 짐의 자기 고백 부분이었어요.
『그러곤 주먹으로 귓방맹이를 후려갈겼더니, 그냥 나가자빠지더라고. 근디 옆방에 가서 10분쯤 있다가 다시 돌아왔더니만 문이 열려 있고 애가 그때 꺼정 문 앞에 서서 아래만 쳐다보며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거여.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다시 패려고 가는데 바람이 휙 하고 불더니, 열려 있던 문이 바로 애 등 뒤에서 꽝 하고 닫히는 거였어. 근디 애가 꿈쩍도 않는 거여. 갑자기 숨이 턱 막히데. 벌벌 떨리는 기분으로 기어와 문을 살짝 열고는, 애 뒤통수에다가 얼굴을 대고 있는 힘을 다해 〈야!〉하고 악을 질러 봤어. 그런데도 꿈적 않는 거여. 헉, 그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라고. 애를 껴안고는 〈하느님 아버지! 세상에 이럴 수가 있슈. 불쌍한 우리 새끼! 주님, 부디 늙고 불쌍한 짐을 용서해 주슈. 전 평생 저 자신을 용서 못할 거여유!〉하고 울부짖었어. 글쎄 그 애가 말을 하지도 듣지도 못 하게 돼버린 거여. 헉, 귀머거리에다 벙어리가 된 거라니께. 난 그런 딸내미를 패버린 몹쓸 아빠였단 말여!』 (220쪽)
노예 짐은 누가 봐도 시대적, 사회적 약자입니다. 노예제가 합법인 시대에, 노예가 물건과 같은 재산이라고 인식하는 사회에서, 부당한 대우와 폭력 앞에 내던져져 있지요, 그런데 헉이 ‘가족’에 대해 물어보는 질문에 짐은 대뜸 자신의 공격성과 폭력성을 고백해버립니다. 자신이 딸에게 행한 부끄러운 폭력과 그로인해 귀머거리가 된 일에 대하여 말이죠. 백인 노예주들로부터 폭력을 당할 때 그는 너무나 치욕스럽고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이 치욕과 고통은 그대로 짐의 폭력에 실려 딸에게 전가되었겠지요. 짐은 내내 딸에게 행한 폭력 때문에 치욕과 고통을 느꼈을 것이고요. 그가 딸에게 날린 귓방맹이는 짐에겐 이중의 치욕이자 고통이었던 것입니다. 짐은 양심적 고백을 통해 자신의 부끄러움과 대면하고 있습니다. 짐의 자기 성찰은 그가 ‘흑인 노예’가 아니라 ‘인간임’을 고스란히 알리고 있습니다.
토론을 하며 우리도 내내 ‘피해자’ 짐을 생각하다가 인간의 본질에 대해 다시 환기하게 되었어요. 위계가 바뀌면 언제든 누구든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사실과, 인간이 그토록 혼종된 존재임을 짐의 고백을 통해 새삼 깨달은 거죠. 자신도 모르게 저지르는 위계적 폭력에 대한 고백도 있었구요, 이걸 알고도 인정하지 않고 합리화해버리는 뒤틀린 내면에 대한 보고에는 모두 공감했었죠.
이렇게 진지한 토론만 있었냐, 그건 아니죠. 연결해서 양심과 본능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는데, 사실 양심과 도덕이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것부터 난항이었어요. 양심이 도덕이나 사회적인 것인지, 도덕성을 넘어서는 것인지, 본능은 양심의 선함으로 규정되지 않는 것이지만, 역시 관계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양심과 무엇이 다른지 등이 설왕설래되었죠. “양심이 분별력이 없다”라고 한 문맥 때문에 더욱 혼돈이 생겼고, 이 부분을 서로 상반되게 이해하기도 했지요. 양심이 분별이 없는 것인지, 양심이 분별력을 잃은 것인지. 등등 전 이렇게 엇갈리는 얘기들이 오가는 게 재미있었는데요. 채운샘 강의에서 ‘이 책이 원래 그런 책이다‘ 다양한 혼종을 내포하고 있다고 하셔서 적절한 토론이었던 걸로 생각됩니다. ㅎ
14살 소년, 미국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 대해 좀 얘기해 볼까요? 이 책은 ‘가장 미국적인 소설’로 또는 ‘미 소설을 대표하는 한 권’으로 꼽히고 있다고 하죠. ‘미국적’인 것이란 무엇일까요? 민족은 아니고, 땅? 영어? 마크트웨인이 보는 미국은 ‘혼종’입니다. 이질적인 것의 연합체가 미국이라는 거죠. 이 소설에는 우선 당시 사용하던 다양한 언어가 들어 있다고 해요. 기도할 때의 언어, 명령하는 언어, 백인 귀족의 언어, 흑인들의 사투리, 다양한 민족의 말, 욕설, 은어 등등. (아 참, 이럴 땐 언어가 딸리는 게 아쉽네요.)
언어가 혼종되어 있다는 것은 또 그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이주해 왔다는 뜻이고, 다양한 삶의 양식이 존재한다는 뜻이죠. 또 텍스트 안에는 다종의 왁자한 사건들이 나열됩니다. 이런 것을 미국적인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이질성을 하나로 꿰고 있는 것이 소설 속 미시시피 강이라고 해요. 그 위를 대규모 물자와 수송이 가능한 자본과 부와 권력의 상징 “증기선” 이 달리고, 또 다른 삶의 양식, 자신이 만들 수 있고 변형 가능한 “뗏목”이 흐르는 거죠.
마크트웨인은 당시 독립된 지 100년이 좀 넘은 미국을 14살 소년 헉에 비유했다고 해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중2병’을 고스란히 앓고 있는 헉의 다듬어지지 않은 비일관성, 어떤 것도 결정되지 않는 소년기의 모습이 당시 미국의 상황과 참 흡사합니다. 이질적인 것의 혼종성과 사회적 미규정성을 제대로 대변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런 모순을 통해,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세계에 대해 질문하고 있습니다.
샘은 강의에서 여러 질문을 던져 주셨는데, 그 중 하나가 “이후 헉과 짐은 어떻게 살아갈까?”라는 윤리적 문제였어요. 사회는 문명화 되었지만 결코 문명화 될 수 없는 존재 헉의 선택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과 같은 것일 텐데요. 문명에 길들여져 고상한 삶을 보장받는 것과, 문명화되지 않아 낙인찍히는 것 사이 어떻게 틈을 만들 것인가, 그 틈이 우리의 뗏목이 될 텐데요. 샘이 던지신 “인간의 삶에서 노예는 왜 필요할까?”라는 질문에서 그 샛길을 볼 수 있을까요. 우주 본성에는 착취가 없는데 문명 자체는 착취를 기반으로 하죠. 내 삶을 타자에 대한 착취를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구성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어려운 얘기입니다. 우리는 문명 안에서 함께 살 수 밖에 없는데. 그것이 착취하는 구조가 되지 않게 한다는 것은? 자신이 삶을 책임진다는 것은? 어... 문제가 점점 커집니다. 수습이 안 되네요. 이런 근본적 질문을 잡고 구체적 길들을 앞으로 읽을 것들에서 계속 찾아보도록 하죠. 지난 시간 ‘타자를 어떻게 만날 것인가’를 포함해서요.
미국의 독립, 안정적 통치의 방식
하워드 진과의 만남은 역시 피의 온도를 올리는 것 같아요. 이제는 보편적 질문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읽는데, 새삼 새로운 생각들을 던져줍니다. 이번 주 <미국 민중사>에서 읽은 대목은 독립전쟁과 법안 마련에 대한 부분이었어요. 강의를 토대로 간단히만 볼께요. 어떤 일이 결정될 때 우리가 쉽게 간과하는 것이 있어요. 결과에 매달리느라 ‘누구를 위한 것인가?, 누가 배제되고 있는가?’ 묻지 않지요. 지금도 이 문제는 유효한데요, 누구를 위한 우크라이나 전쟁인지? 서울시가 전장연과의 협의를 무산시킬 때, 누구를 위한 판단인지 물을 수 있죠.
동일하게 질문해 보죠. 미국이 “독립 선언”을 할 때 “누구를 위한 독립인지? 누가, 어디서 독립한다는 것인지?” 말이죠. “자유와 평등 법안”을 만들 때도 누구의 자유와 평등을 말하는 걸까요? 원주민, 흑인 노예, 여성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자유와 평등인가요? 배제된 이들의 자유와 평등은 어디서 보장 받아야 하는 것이죠? 독립이란 유럽 연합국들이 영국의 지배에서독립하는 것이죠. ‘유럽 연합국’들은 독립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영국’에 대항해 영국의 간섭 없이 미국을 안정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합니다. 이렇게 보면 ‘미국’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네요. 이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백인 귀족과 사업가들입니다. 흑인은 전쟁의 총알받이가 되어 버렸죠. 노예제도 버젓이 그대로라면 누구를 위한 독립인지가 명백하지요. 이런 마당에 자유와 평등 법안 역시 귀속지가 어디일지 분명합니다. 자유와 평등은 ‘문명이 가진 폭력성’ 앞에 무너져 버립니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과 미국의 ‘독립’, ‘자유와 평등’ 감히 이 말을 하지 못할 거 같습니다.
횡설수설 그만하고 늦은 공지 마무리 하겠습니다. 샘이 강의 시간에 던져 준 질문과 글을 읽으며 생기는 키워드들을 정리해 두면 유용할 거 같지요.
*** 3주차 (2/27) 공지입니다 ***
* 읽을 책 : <웃음과 비탄의 거래> (처음 ~ 163p)
<미국 민중사> 6~7장 (186p ~ 264p)
* 과제 : 나누고 싶은 문장을 뽑고, 문장을 뽑은 이유를 간단히 적어 일요일 오후 6시까지 숙제방에 올려주세요. 수업 시작 전 다른 선생님들이 올린 글을 읽고 참여하면 토론이 더욱 활발해질 것 같습니다.
* 역사 쪽지 시험도 준비해주세요. 종합 시험이 기다립니다.
* 2주차 후기 : 은옥샘
3주차 후기 : 호진샘
*<웃음과 비탄의 거래> 읽다가 마크 트웨인이 직접 그린 스케치가 있어 올려봅니다.
나는 곧 잠자리에 들었다. 종종 그랬듯이, 짐은 내 보초 시간이 되어도 나를 깨우지 않았다. 동이 틀 무렵 깨어 보니, 짐이 머리를 무릎 사이에 푹 처박고는 혼자 흐느끼고 있었다. 나는 못 본 척하면서, 차라리 모른 척했다. 왜 그런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짐은 멀리 떨어져 있는 자기 아내와 자식 생각을 하고 있었고, 평생 한 번도 집을 떠나 본 적이 없는 짐으로서는 쓸쓸하고 고향 생각이 간절했기 때문이었다. 백인들이 자기 가족을 그리워하듯이 짐도 자기 가족을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내겐 아주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는 거의 밤마다 내가 잠들었다고 생각될 쯤이 되면 우리 불쌍한 엘리자베스! 우리 불쌍한 조니! 어쩌나! 이제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구먼!> 하면서 혼자 흐느끼곤 했다. 짐은 마음이 너무 착한 검둥이였다 (허클베리핀의 모험, 21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