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 역사1-1 4주차(3.6) 공지
‘글쓰기와 역사’팀은 마크 트웨인의 냉철한 유머와 하워드 진의 뜨거운 시선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매주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경험을 하고 있지요. 이번 주 읽은 책은 “채운 라디오”에도 소개된 바 있는 마크 트웨인의 <웃음과 비탄의 거래> 전반부와 <미국 민중사1>의 6~7장입니다. <웃음과 비탄의 거래>는 짧은 수필들을 모아놓은 수필집인데, 전반부는 자서전으로 읽어도 좋을 글들이 있어요. 매 꼭지마다 많은 문제의식이 들어있어 샘들이 써오신 글을 토대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상황과 기질 그리고 삶의 전환점
‘내 인생의 전환점’은 마크 트웨인이 작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당대에도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로 이름이 있었으니, 그를 작가로 만든 전환점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던가 봅니다. 그는 어쩔 수 없는 상황과 기질이 자신을 만든 것이지 특별한 전환점이란 걸 찾을 수 없다고 합니다. 전환점이라고 보이는 것은 연쇄 고리의 마지막이거나 어쩜 가장 두드러진 ‘고리’일 뿐이라고요. 토론에서도 여러 번 언급되었는데, 자기 인생의 고리를 카이사르와 아담까지 소급해 갑니다.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넌 것은 한 나팔수가 불어 제킨 상황 때문이고 그가 강을 건넘으로써 다른 역사가 펼쳐졌기에 자신이 있다고 하구요. 상황은 ‘그냥 따라야’ 하는 것이죠. 카이사르의 비장한 결단이 강을 건너게 하지 않았다는 말이 의미 있죠. 아담은 어떤가요? 아담은 ‘허약한 존재가 되어라, 쉽게 넘어가는 존재가 되라’고 명령받았고 그것이 그의 기질이었어요. 그러니 사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은 지킬 수가 없었던 것이죠.
마크 트웨인은 이처럼 상황에 기질이 만나 그 연쇄 고리 위에서 삶이 펼쳐진다고 말합니다. 그는 스스로 ‘기질상 일을 벌이는 사람’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주운 50달러로 코카를 사 아마존에 가서 판매하는 일을 마다않고 하게 만드는 것처럼요. 그는 상황이 새로운 고리를 들고 자신을 구하러 왔다고 할 정도죠. 나보다 먼저 상황이 있습니다. 우리가 터닝 포인트라고 생각하는 것에는 무수히 쌓여 온 작은 힘들이 있습니다. 샘이 강의에서 기질을 설명하시며, 자신이 어떤 일을 ‘기억’하는지를 보라고 하셨어요. 그 많은 과거의 일 중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 자신의 기질이라는 것이죠.
우리가 동일한 신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저마다 기질도 다 다르죠. 문제가 된다면 기질이 아니라 ‘자신의 기질을 모른다’는 게 문제이지요. 마크 트웨인을 통해보면 ‘자기 진솔함’이 그의 문체를 만들었다고 보여집니다. 그는 자신을 미화하지 않죠. 50달러를 주워 코카를 사고 팔던, 비도덕적으로 여겨지는 일을 말함에도 자의식이 없어요. 오히려 그것이 글을 쓰는 고리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죠. 자기 연민은 자신을 미화하는 과정에 생기는 것이죠. 그의 날서고 비판적인 글은 자기 자신에게도 똑같은 잣대를 대기에 가능한 것이겠죠. 작년에 주역 철학팀 마지막 에세이가 자신의 삶을 주역의 괘로 풀어보는 것이었는데, 참 자기를 보기가 어렵더라고요. 그리고 자신이 꽂힌 지점에서 남들이 아무리 조언을 해줘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보았구요. 마크 트웨인의 호방하고 솔직한 글쓰기를 보며 기질에 대해 더 생각하게 되네요.
마크 트웨인의 ‘유머’
마크트웨인의 기질이 잘 드러난 문체에서 ‘유머’는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죠. 우리는 어떤 때 웃게 될까요? 웃을 때는 많죠. 철 지난 무도를 다시 보면서도 웃고, 뉴진스처럼 예쁘디 예쁜 아이돌을 보면서도 미소를 짓게 되죠. 또 요즘처럼 차마 입을 뗄 수 없는 뉴스를 볼 때도 ‘썩소’를 짓게 됩니다. 하지만 웃음이 다 유머는 아니죠. 마크 트웨인의 유머에는 웃고 난 다음 생각할 것이 남습니다. 웃음은 철학이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상황을 비틀고의외성을 만들어 사유의 ‘방향성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마크트웨인의 이렇게 미끌어지는 글쓰기는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토론에서도 유머는 뜨거운 주제였고 그의 문체를 잘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죠. 꼭 말해야 하는 일에 침묵하는 지성인의 모습, 노예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의 대목대목을 찾아내는 종교인, 필리핀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 어떤 논평도 달지 않고 침묵하는 신문들에 대해 마크트웨인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나열함으로써 비꼬는 것이죠. 또 중국에서 포교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선교사들을, 한참 법을 무시한 사적인 처벌인 ‘린치’가 문제가 되는 미국으로 불러들여 그들을 선교하는데 힘을 쓰게 하자고 제안하는 식입니다. 웃음에는 공범의식이 숨어있다고 하죠. 기꺼이 마크트웨인과 공범이 되고자 합니다. 다음 시간에도 남은 유머를 찾아보죠.
인디언 이주법
이번의 미국 민중사는 특히 마음을 움츠리고 읽었던 것 같아요. 이중착취의 구조 속에 있는 여성의 삶과 인디언 이주정책으로 소멸되어가는 인디언의 최후가 그려지고 있어서죠. 1661년 노예제 승인 이후 미국에는 많은 흑인 노예들이 들어옵니다. 원주민은 이 노예들과도 다릅니다. 노예로 길들여지기 어려운, 중심성을 갖지 않는 존재들이죠. 미국의 7대 대통령 앤드류 잭슨이 가진 입장은 이렇습니다. “좋아질 가능성이 없으면 죽여버려야 한다”(237) 말 그대로 끝없는 죽음의 행렬이 이어집니다. 전투를 통해 죽이고, 이주를 통해 죽이고, 남아 있는 일부는 회유를 통해 죽이는 것이죠.
1830년 인디언은 참여하지 인디언 이주령이 공표되었습니다. 이주는 자신이 나고 자란 땅에서 살지 못하는 문제를 넘어, ‘본성 상실의 과정’이었어요. 이주와 함께 문명화 작업이 동시에 이루어진 거죠. 문명화란 원주민의 제도, 기억, 이야기, 문화를 백인들의 그것으로 바꾸는 작업을 말합니다. 이와 더불어 원주민들에게 지원과 뇌물이 주어졌는데, 바로 술을 제공하는 것이었죠. 알콜릭이 되어버린 원주민들은 내부다툼으로 분열되고, 자기 부정으로 살아갈 동력을 잃어버립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이자 공존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인데 말이죠. 그들의 거주지를 빼앗고 돈을 주어 술을 사먹게 하고, 그럼으로써 저항의 동력을 상실하고 대신 자기부정의 동력으로 삼게 하는 이 원환구조가 무섭게 느껴지네요. 링컨이 장교로 있던 백인부대와의 전투에서 항복을 선언한 ‘검은매’의 항복 연설 중 일부입니다.
백인만큼 나쁜 인디언은 우리 부족 사이에서는 살 수가 없으며 사형에 처해져 늑대의 밥이 될 뿐이다. 백인은 사악한 선생으로서 그릇된 책을 갖고 다니면서 잘못된 행동을 하고, 불쌍한 인디언을 속이려고 면전에서 웃음을 흘리고, 믿음을 사려고 악수를 하고, 속이기 위해 술을 먹이고, 우리 부녀자들을 타락시킨다. (<미국 민중사>, 236p)
채운샘은 강의에서 “우리가 역사적 존재로써 자신을 인식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자고 하셨죠. 마크트웨인이 말하듯 우리의 삶이 아담으로부터, 본 적도 없는 카이사르와도 연결되어 있다면, 우리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결 속에 있는 것이라면, 우리 주변을 인식하고 산다는 게 뭔지를 질문하는 것이었죠. 샘은 인디언 학살이 현재는 ‘동물학살’로 일어나는 게 아니냐는 말씀하셨어요. 육식의 문제도 있지만 전염병을 빌미로 살처분한 수많은 동물들의 생명에 대해 생각해 볼 일입니다. 인디언 원주민들이 떠난 자리 많은 백인들이 들어와 현재 미국의 ‘주’를 형성합니다. 인디언 절멸사는 미국의 건국사와 동의어이죠. 불필요한 전쟁과 지배를 하지 않음으로써 중심화되지 않은 인디언들의 삶이 무너진 자리 하나의 중심을 향해 합체하는 거대국가가 들어서 버렸네요. 비탄과 거래하지 않고 웃을 수는 없는 건가요?
*** 4주차(3/6) 공지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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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책 : <웃음과 비탄의 거래> (164p ~ 끝)
<미국 민중사> 8~9장 (265p ~ 36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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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 : 나누고 싶은 문장을 뽑고, 문장을 뽑은 이유를 간단히 적어 일요일 10시까지 숙제방에 올려주세요. 수업 시작 전 다른 선생님들이 올린 글을 읽고 참여하면 토론이 더욱 활발해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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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쪽지 시험을 위한 정리도 해 두면 좋겠지요. 이번 장이 남북전쟁 나오는 중요한 부분이라 잘 읽어두면 좋을 거 같습니다.
* 3주차 후기 : 호진샘
*4주차 후기 : 만화샘
그 사이 다른 계획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중국에 가 있는 미국인 선교사들을 불러다가 린치 현장에 보내는 것이다. 지금 중국에 나가 있는 선교사가 1,500명인데, 하루에 이교도가 3만 3천명씩 태어나는 가파른 오르막에서 각자 일 년에 두 명씩 개종을 시킨다고 치자. 그러면 균형을 이룰 만큼 많은 중국인을 개종시켜 맨눈으로 보더라도 그 나라가 기독교화된 것으로 보일 때까지는 백 만년도 더 걸릴 것이다. 그러니 비용도 적게 들고 위험요소라는 측면에서도 상당히 만족스러운 국내의 풍요로운 현장을 선교사들에게 제공하면, 고국으로 돌아와 우리들을 대상으로 한번 해보는 것이 올바르고 공정한 일로 여겨지지 않겠는가? 중국인들이 정직하고 고결하며 부지런하고 믿을만하고 상냥하고 등등 온갖 자질을 갖춘 뛰어난 민족이라는 것은 대체로 인정하는 바이니 그 사람들은 그냥 뇌 둬도 된다. 지금 그대로도 충분히 좋은 사람들이니까. 게다가 다른 민족을 개종시키면 그들 모두가 우리를 따라잡을 위험도 있지 않나. 아주 조심해야 한다. 그런 위험을 조장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 봐야한다. 왜냐하면 중국이 일단 문명화가 되면 그걸 다시 물릴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그런 점을 고려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그런 생각을 해야 한다. (<웃음과 비탄의 거래>, 144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