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는 웃음과 비탄의 거래라는 마크 트웨인의 산문집을 읽었습니다. 제목부터 웃음과 비탄의 거래가 무엇일지 고민하게 했습니다. 비탄스러울때도 웃음이 나오고 웃으면서 비탄에 잠길때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언뜻 대비되는 두 단어에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중성 혹은 양면성이라 표현될 수 있는 것들을 들여다 보라는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언제 어떨때 웃는지 비탄에 잠기는지 부터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리고 비탄이라는 것을 내가 어찌 생각하는지도 점검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네요. 시작부터 참 난해합니다.
토론은 기질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고 상당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기질이 무엇일까요? 마크 트웨인은 기질이란 본인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타고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그에 대한 권한도 없고 그것이 하는 일에 대한 책임도 없고 본인이 바꿀 수도 없다고 합니다. 저는 기질이란 것을 떠올렸을때 성격 혹은,성향,습관에서 나오는 것일 수도 있을 것 같고, 때론 곤조라고 표현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곤조라는 말에는 저의 가치 판단이 들어있습니다. 곤조란 근성을 가리키는 일본어 인데 뭔가 내 눈에 거슬리거나 불편할때 상대를 규정하는 방식으로 저는 사용합니다. 곤조라고 표현하는 순간 상대의 기질은 몹쓸 것이 되어버리네요. 그 사람을 구성하는 하나의 특징일 뿐인데 말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쟤랑 안맞아 라고 단정짓기도 하고 그것이 반복되면 관계의 단절도 오게 되는 것 같습니다. 기질을 바꿀 수 있냐 없냐의 문제도 논의 되었는데 각자의 기질에 대한 정의가 달라서 일 수도 있지만 그것을 바꿀 수 있냐 없냐라는 식으로 질문을 던지기 보다 채운샘 말씀대로 어떤 기질을 가지고 있냐를 숙고해 봐야 하는게 나을 것 같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이 어떤 기질을 가지고 있는지 안다고 생각하는 것에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모릅니다. 그런데 자기를 제일 잘 안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기질은 이래 라면서 정당화하거나 합리화 할때가 많아 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 기질을 지키고 싶을때 기질은 바꿀 수 없다고 말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요? 핑계대기가 쉬워지니까요. 정당화 하지 않고 합리화 하지 않는 방식으로 기질을 인정할 수 있으려면 또 어찌해야 할까요? 정당화하는지 합리화하는지는 또 어찌 알 수 있을까요? 저는 늘 이지점에서 고민이 많아집니다.
기질을 바꿀 수 있든 없든 나의 기질을 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생각한 기질도 남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가? 의심도 해봐야 합니다.그것은 기질이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상황속에서만 알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질이 드러나는 방식도 다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자신도 매의 눈으로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기엔 너무 많은 기질을 갖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파고 들어가다보면 많은 기질들이 여러개로 수렴이 되기도 하지 않을까 라는 기대도 해봅니다.
미국 민중사는 6장 7장을 읽었습니다.
6장은 친밀하게 억압당한 사람들이라는 제목 아래 여성들의 지위에 관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성적인 학대에 대한 이야기,흑인 여성 노예에 대한 이야기, 1830년대 노동 현장에서 노동력 착취에 대한 이야기, 남성 전용의 직업에서 여성이 진입하는데 선구적 역할을 한 여성의 이야기가 서술됩니다. 6장을 읽으면서 성적인 학대는 우리 사회에서도 신문의 사회면을 간간히 장식하는 일들에서는 여전하고, 노동력 착취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우리나라의 70,80년대 산업화라는 미명 아래 전국 각지의 공단에서 일하며 착취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함께 떠올랐습니다. 그러면서 여전히 지금도 노동력을 착취하고 있는 보도들을 통해 구조적으로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건가? 어디까지가 착취인걸까? 착취당하는 사람들의 저항은 어떤식으로 일어날 수 있는가? 무수한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그러면서 밑도 끝도 없이 분노도 치밀었습니다.
7장은 그 분노가 더했습니다. 인디언들의 관한 이야기였는데 자신의 터전을 백인들이 와서 차지하고서는 원래 자기들 것이었던양 몰아내고 학살하고 핍박하고 말살까지 하려는 과정을 보며 인디언들의 마음이 어땠을까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요? 미국의 7대 대통령인 앤드루 잭슨은 토지 투기업자이자 상인,노예무역상이었습니다. 그의 재임기간은 1829년부터 1837년이었고 그 시기에 미시시피강을 중심으로 서쪽으로 많은 인디언 부족들이 쫒겨나게 됩니다. 마크 트웨인은 (1835) 이시기에 태어났습니다. 앤드루 잭슨의 재임시기 미시시피강 사이에 백인 거주지가 개척되었고 그 과정에서 희생된 것들은 대부분의 어린이용 역사책에서는 재빨리 건너 뛴다는 하워드 진의 글이 사뭇 진지하게 다가왔습니다. 백인들의 인디언 학살이라는 것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우리의 삶속에서도 각자의 어떤 명분아래 행하는 것들에서 배제되고 소외되고 억압받는 것들은 늘 존재하기 마련이지 않을까요? 갑자기 무거운 기분이 드네요. 이럴때 마크 트웨인의 가볍게 돌려까는 시선으로 환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ㅋㅋ
마크 트웨인의 글을 보면서 웃다가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하고 미국 민중사를 읽으며 비장해지기도 합니다. 글쓰기와 역사 시간이 저에게는 함께하는 샘들과 토론을 할 수록 서로를 조금씩 알아가고 각자의 문제의식속에서 미처 생각치 못한 부분에 대한 깨달음을 얻어 딱딱하고 경직된 생각의 길에 아주 미세하지만 균열을 낼 수 있는 시간이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매주 채운샘께서 던져주시는 질문에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이번주는 역사적 존재로 인식한다는 것은 뭘까? 그것이 인간이 우주적 존재임을 인식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말씀하신 부분에 대한 생각을 하게 만들었네요. 음...이 질문은 스케일이 엄청나서 가슴속에 내내 품고 가져가면서 공부하다 만난 지점들과 연결시키면서 수정해나가야 할 것 같네요.
미국을 이야기하며 인디언 절멸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인디언이란 말도 아메리카를 인도로 잘못 알고 붙인 이름이잖아요. 저도 이번 부분을 읽다 나도 모르게 몇번을 자리에서 일어났는지 몰라요 . 샘의 분노에 공감 ~
"정당화 하지 않고 합리화 하지 않는 방식으로 기질을 인정할 수 있으려면 또 어찌해야 할까요? 정당화하는지 합리화하는지는 또 어찌 알 수 있을까요? "
뭔가 빛이 나는 질문처럼 읽히네요!
호진샘 오랜만이에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