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 역사 1-4 주차 후기
이번 주는 마크트웨인이 쓴 ‘웃음과 비탄의 거래’ 뒷부분에 관한 글을 토론하였다. 글의 주제는 격언, 관계, 거짓말 등으로 모두 달랐다. 같은 책을 읽어도 서로가 끌리는 문장이 다르고 생각하는 지점이 달라서 새로운 시각을 확장하는 시간이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한다든지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와 같은 격언에 관하여 다양한 의견이 오고 갔다. 그동안 격언들을 대할 때 꼭 지켜야 할 금과옥조라고 여기며 지키지 못할 때는, 나를 자책하곤 했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기질과 환경이 모두 다른데 똑같이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으며, 그런 격언을 강요하는 것은 사람들을 모두 동일화시키는 것이다. 라는 의견이 있었다. 그리고 그 격언이 어느 시대에 누가 누구에게 말한 것인지를 따져봐야 한다. 는 의견도 있었다. 모두 내가 보지 못한 부분들을 보게 하는 소중한 의견들이다.
글을 쓰는 자세
유머 넘치는 마크 트웨인의 글을 읽을 때는 유쾌한데, 막상 문장을 고르고 글을 쓰려면 난감하기만 하다. 이런 고충을 아시는 듯 채운 샘은 글을 쓰는 자세에 대해 알려 주셨다. “문장을 선택했으면 왜 이 문장이 마음에 끌렸는지 그것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글을 전개해나가는 방식에서 내가 뭘 보고 있고, 보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봐야 한다. 만약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과 가져온 문장이 어긋난다면 왜 자꾸 어긋나는 일이 벌어지는지 독서의 시선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 말씀이 가슴에 콕 박힌다. 선택한 문장과 글 내용이 동떨어지는 경우가 생겨도 지면을 채웠다는 안도감에 이렇게 찬찬히 따져볼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글을 미리 쓰지 않고 미루는 습성 때문이다. 정해진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을 때 쓰다 보니 점검할 시간도 없다. 토론 시간에 나온 것처럼 난 글을 쓰려는 내적 동기가 부족한가 보다. 외적 동기인 세미나에 의지해 겨우겨우 정해진 양을 채우고 있다.
이런 내게 힘이 되는 또 한 가지를 알려 주셨다. “글쓰기에는 왕도가 없다. 좋은 글을 많이 낭송하고 필사해서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소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렇게 훈련하면 자신의 글쓰기가 변하고 글을 보는 능력도 생기므로 믿고 시도해 보라!” 낭송과 필사가 이런 효과가 있다니 그동안 귀찮아하고 할 수만 있다면 피하려 했는데 생각을 바꿔야 할 듯하다.
누가 누구를 해방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미국 민중사 8장은 멕시코와의 전쟁에 관한 내용이다. 역사는 편향된 시각만을 보여줄 뿐이지 객관적 시선은 없다고 한다. 세상은 이해관계에 따라서 복잡하게 얽혀있다. 따라서 단선적으로 보는 시선에서 벗어나 다양한 시점을 배워서 복합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키워야 한다.
9장은 남북전쟁에 관한 이야기이다. 남북전쟁은 백인이 흑인 노예를 해방한 전쟁이며, 링컨은 노예해방의 아버지로 알고 있던 내 시각은 대단히 편협한 시각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명분은 노예해방이었지만 그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북부와 남부 지주들 사이의 이권 싸움이었다. 전쟁 끝난 후 남부 백인들의 이익을 조절하는 과정에서 전쟁에 참여한 흑인은 안중에도 없었다. 흑인은 법적으로만 자유인일 뿐 현실은 노예와 다름없이 착취당하는 계급으로 남았다. 역사를 지배계급의 시각이 아닌 착취당하는 계급의 시선으로 기록된 9장은 읽는 내내 답답함과 함께 분노가 일어났다.
원래 자유인이었던 흑인을 노예로 만든 백인들이 해방시켜 준다고 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이것을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통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 톰은 “우리가 짐을 해방시켜 주자.”라면서 짐을 괴롭힌다. 톰은 이미 자유인인 짐을 해방시켜 준다는 명분을 내세워 명예를 추구하는수단으로 짐을 이용하였다. 그러나 헉은 짐과의 관계를 통해 사회가 요구하는 도덕률을 버리고 짐이 자유인이 되도록 도와주었다. 과연 톰과 헉 중 누가 도덕적인 행위를 한 것인가? 링컨은 남북전쟁을 통해 톰이 추구하는 명예를 얻었지만, 전쟁 후에도 흑인들은 여전히 착취당하는 계급으로 남았다. 민중사를 읽고 작품의 배경이 되는 역사에 관해 알게 되면서 작품에서 작가가 무얼 말하려는지 좀 더 생동감 있게 다가온다. 남북전쟁은 노예해방이 목적이 아니었다. 결국, 흑인의 해방은 누가 시켜주는 게 아니라 흑인 스스로가 해야 한다. 이 흑인이라는 단어를 나로 바꾸어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과연 자유인인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과 인용한 문장이 어긋나는 일, 저의 고질병^^이네요. 글쓰기를 위해 무엇을 보고 있는지와 더불어 무엇을 보지 못하는지를 본다는 것, 보고 있는 것을 본다는 것도 어렵지만 보지 못하는 것을 알아챈다는 것은 정말이지... 어떤 일일까 싶습니다.
미국의 남북전쟁 후 노예 신분을 벗어난 흑인들에게 땅이 필요했는데, 몰수한 땅을 대규모로만 판매해서 결국 투기업자들이 그 땅을 헐값에 사들이게 했다는 '미국민중사'의 내용이 떠오르네요. 10에이커나 20에이커씩 땅을 가질 수 있고 그 소유권을 보장하겠단는 링컨의 약속이 있었나 보죠. '링컴(링컨)에게 우리가 땅을 원한다고(...)그넘들이 땅뎅이를 너무 크게 만들어서 우리를 잘라내고 있다'고 쓴 한 흑인의 편지가 있었지요. 편지 말미에 '링컨은 도대체 어디에 이씀니까'라고 반문하는 그의 처지가 지금과 별반 달라보이지 않았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