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 역사 1-7주차 (4/3) 공지
《최면술사》를 끝으로 마크 트웨인의 3편의 글을 읽었습니다. 삶의 체험들을 진솔하게 글에 담아내는 트웨인의 자세에 진정 존경의 마음이 우러납니다. 미사여구 없이, 명성 있는 누구의 말에 기대는 것 없이, 자신이 하고픈 말을 때로는 격정적으로, 때로는 비유적으로 정확하게 말하며 거기에 빠지지 않고 풍자와 유머까지 곁들여 전하고 있지요. 채운샘께서 그의 산문을 암송하고 베껴 쓰며 체화하라고 당부당부 하시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그의 문장에 서서히 스며들겠다는 원(願)을 하나 세웠어요. ㅎㅎ 같이 하셔도 후회하지 않으실 거 같습니다.
맥락을 꿰어나가는 훈련
마침 이번에 읽은 산문 중에 글쓰기와 관련된 부분이 있어요. <우울증 치료제>라는 산문인데, 당대 유명한 소설가였던 매틀린톡의 <정복된 적, 또는 사랑의 승리자>를 조목조목 인용하며 비판하는 글이었죠. 아무래도 글쓰기 수업이다 보니 많은 선생님들이 이 부분을 인용하셨는데요. 매클린톡에 대한 트웨인의 입장을 먼저 볼까요? “이 책에는 지혜나 재치, 풍부한 창의력, 기발한 구성, 뛰어난 형식, 순수한 문체, 완벽한 수사적 표현, 사실성, 명확한 서술, 인간적으로 있을 법한 상황이나 인물, 유려한 묘사, 사건들의 그럴듯한 연관성, 또는 철학이나 논리, 양식” 이런 “훌륭한 요소”들이 “없다”고 평합니다. 그리고 이 ‘없음’을 저자가 모르기 때문에 없음이 더 완벽하게 완성되며, 이런 상황들 때문에 엄청나게 재미있다고 부연합니다. 거기다 이것이 책인 이유는 “저자가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라고도 하지요. 지난 시간에도 말했지만 트웨인의 글은 한 가지 해석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러 층위의 해석이 가능해서 다양한 만큼 읽기가 쉽지 않죠. 이글도 사실 읽다보면, 비판인지 칭찬인지 아리송한 느낌이 들어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명확히 알기가 어려웠어요. “이 거장이 토해내는 문장은 가히 최고 단정하며 아름답기까지 한 완벽한 치열에 비할만하다. 하나라도 뺄 경우 매력은 사라진다.” 이런 식이죠. 정말 그런 건지 아닌지.
그럴 때 우리가 흔히 하는 방법이 내 생각과 딱 맞는 문장을 찾아 해석하는 것이죠. 저희는 각기 다른 주제를 가지고 왔지만 대체적으로 맥클린톡의 글을 저자가 혹독하게 비판하는 것으로 읽었어요. 채운샘은 강의에서 다른 해석을 해 주셨는데, 매클린톡의 글에 “훌륭한 요소”가 하나도 없다고 할 때, 이미 우리가 전제하는 ‘훌륭한 글’에 대한 상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라고요. 매클린톡이 책이라고 하는 것과, 내가 책이라 생각하는 상이 분명 다르겠죠. 샘은 훌륭한 글만이 글로써 인정되어야 한다면, 그건 파시즘에 다름 아니라고 하셨어요. 정말 자신의 전제를 의심하는 것이 너무나 어렵다는 것을 알았어요. 아무 말은 안 쓴 글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저에게도 당연히 있었으니까요. 이런 파시즘적 사유가 분서갱유를 부르고, 아메리카 땅에 도착한 백인들이 그들의 문명발전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원주민들을 그토록 학살하는 근거가 되었음을 상기하면 무서움을 금할 수 없네요. 단일한 욕망, 하나의 선(善)을 요구하는 순간 파시스트가 된다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산문 말미에 이르면 “호메로스도, 셰익스피어도, 맥클린톡도 오직 한 사람뿐이다” “이 책은 기념비적이며, 독보적이다”라고 합니다. “훌륭한”과는 무관하게 하나의 책인 것만으로 ‘독보적’일 수 있는 것이었네요. 마크트웨인이 헉의 야만성을 내내 강조한 것도 보편적 선에 길들여지지 않고 자신에게 필요한 길을 찾으라는 메세지였던 것이죠.
글쓰기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 같아요. 글을 읽고 쓴다는 것은 하나하나 맥락을 꿰어나가는 것이라고 여러 번, 여러 방식으로 설명하셨지만 읽다보면 놓치기 일쑤라서 말이죠. 트웨인처럼 단선적이지 않은 모호한 글쓰기에서는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읽어가는 것을 한 번씩 의심해 봐야한다는 걸 다시 깨닫게 되었어요.
거짓과 진실
마크트웨인의 글은 여러 키워드로 읽을 수 있습니다. 흑인에 대한 문제의식, 남북전쟁, 식민지 상황, 자본주의... 등등 시대의 문제들이 다 들어있습니다. 이 중에서도 그의 글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은 “허구”가 아닐까라고 샘은 짚어주셨는데요, 공감하는 바입니다. 허구성은 열거한 저 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관통하고 있죠. 근데 샘은 여기서 거짓과 진실에 대해 질문하셨어요. 사실 소설도 허구(fiction)죠. 그럼 진실은 뭘까요? 사실대로 말하는 것?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 지난 번 <최면술사>에서도 트웨인이 거짓 최면에 대해 사실대로 고백했을 때 부모님도 믿지 않았는데, 그럼 부모님은 거짓을 말하고 있는 걸까요? 거짓이었다고 말하는 트웨인은 정직한 건가요? 거짓말은 다 같은 층위의 거짓말인가요? 많은 질문이 쏟아졌죠. 도망노예 짐을 숨겨주던 헉은 거짓이고, 다친 톰을 위해 자신이 고발당하는 것도 불사하고 의사를 불렀는데, 짐이 도망 갈까봐 곁을 떠나지 못하는 의사는 정직한가요? 그 정직과 그 거짓의 결과를 고려한다면, 흑인을 노예로 부리는 게 당연한 사회를 지탱하는 정직은 진정 정직한 걸까요? 하나의 거짓, 하나의 진실이 그 자체로 존재하지 없음은 우선 명백하네요. 진실과 거짓은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할 수밖에 없는 것이란 말인데, 더욱 모호해져버렸네요.
이번에 읽은 산문 중 <뜀뛰는 개구리>라는 재밌는 글이 있습니다. 친구의 부탁을 받고 트웨인이 다른 친구의 안부를 물으러 사이먼 휠러라는 사람을 찾아갑니다. 트웨인이 알고 싶은 건 친구의 안부였죠, 휠러씨는 그 친구가 내기를 좋아했다고 하면서, 트웨인을 붙잡아 앉혀놓고 그가 벌인 내기들을 얘기해줍니다. 진지하게! “쥐를 잡는 테리어 종의 개, 수탉, 숫고양이”로 내기를 해 돈을 벌고 잃었던 이야기, 이후 개구리를 훈련시켜 내기한 이야기, 누런 암소 이야기.....를 “열의와 진정성”을 가지고 늘어놓았죠. 트웨인에게는 아무 소용도 없는 이야기지만 진정이 가득 담긴 ‘진실한’ 이야기였죠. 누군가에게 얘기하고 있지만 “독백”인 이야기를요. 우리의 글쓰기 같지 않냐고 얘기가 흘렀지만, 나만 아는 진~실한 이야기를 우리도 심심찮게 하잖아요. 진실을 말하고 있지만 진실로 소통되지는 않는 그런 말요. 샘께선 트웨인이 자신의 글을 스스로 비판하는 산문이라는 해석도 덧붙여주셨는데요, 관계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감각과 욕망의 통치, 신식민지
<미국 민중사>에서는 미국이 중남미 점령해가는 과정을 살펴보았는데요. 미국은 독립이후 중남미를 차지하고 있던 스페인 세력과 전투를 벌입니다. 이 과정에 스페인령의 많은 나라들이 미국 소유로 넘어가죠. 미국은 전함 메인호 침몰을 빌미로 시작된 스페인과의 전투를 통해 먼저 쿠바를 넘겨받게 됩니다. 미국 자본이 주요 산업을 장악하면서 쿠바는 사실상 미국의 식민지가 되지요. 이후 푸에르토리코, 하와이, 괌, 필리핀을 병합합니다. 이 나라들은 따라가 보면 태평양을 가로지르며 일직선을 긋게 됩니다. 후대의 일이긴 하지만 알래스카까지 차지한 걸 생각하면, 미국이 사실상 세계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죠.
이 식민지에서 한 일이 담배, 차, 향신료, 아편 등을 대규모로 농사짓는 것이었어요. 보다시피 식량이 아니예요. 필수품이 아닌 기호식품을 재배하여 수출함으로써 쾌락을 뗄 수 없도록 만든 것이죠. 사람들의 감각이 바뀌게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감각과 욕망을 지배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이게 식민지입니다. 미시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식민지이죠. 우리는 식민지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대규모 농업으로 토착 농업은 망하고, 로컬리티는 제거되어 전 세계가 하나의 단일한 체계 안에 놓이게 되는 것이죠.
이게 미국식 세계화입니다. 미국의 세계화 시도는 무엇이 다를까요? 역사적으로 페르시아를 위시해 로마, 스키타이족, 중국의 실크로드 등 세계화를 위한 시도들은 꾸준히 있어왔어요. 미국이 다르다면 그건 보다시피 “모든 것을 시장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점이지요. 현대국가는 자본과 결탁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국가는 자본이 잘 회전될 수 있도록 장애물을 제거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죠. 자본의 청부업자이자 자본의 하수인으로 국가가 존재합니다. 미국을 보면 이 과정이 고스란히 보입니다. 전 세계를 단일화 하려는 시장의 욕망 앞에 야만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의 호오(好惡)를 계속 물어야할 거 같습니다.
이렇게 시즌1-1을 마쳤어요. 마크트웨인의 진면목으로 만나고, 하워드 진의 뜨거움에 압도당하면서요. 두 작가가 앞으로 공부의 길동부가 되어 주리라 생각합니다. 마지막 시간 시험 준비도 즐거웠지요?ㅎㅎ 대중지성을 통해 민중사 종합시험 대비반을 가동했거든요. 덕분에 정리도 하고 암기도 했구요. 한 주 쉬었다 만날 루쉰도 어떻게 다르게 읽힐지 기대가 됩니다. 공지와 다르게 조금 변경 사항이 있다면.... 13주차 오프라인에서 암송 페스티벌과 동시에 3쪽 분량의 에세이 발표가 있다는 정도, 뭐 그 정도?! 글쓰기 없는 글쓰기 수업.....?! 네, 모든 것은 변화 안에 있다는 걸 잊지 마시고... 하하하. 참, 쉬면서 <도금시대>도 좀 읽어 보시구요. 저 이제 시작했어요. 6장 읽고 있지요.
잘 쉬시고 다다음주에 건강하게 뵈어요~~!!
*** 7주차 (4/3) 공지 합니다 ***
* 읽을 책 : 《조화석습》 : 처음 ~ <24효도>
《현대중국울 찾아서1》 : 1~3장 (처음 ~ 106p)
* 과제 : 나누고 싶은 문장을 뽑고 생각을 담아 숙제방에 올립니다.
일요일 10시까지 올려주시고, 다른 샘들의 글도 읽고 참여해 주세요.
* 역사 : 중국역사는 내용도 많고 외울 것도 엄청 많네요.
역사적 맥락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할 거 같습니다.
* 6주차 후기 : 현주샘
7주차 후기 : 영민샘
마크 트웨인이 "훌륭한" 점은 하나도 없다고 말할 때, 저야말로 그 훌륭하다는 말에 걸려 넘어져서 마크 트웨인이 그 저자를 비판 혹은 비난하고 있다는 시선 외에 다른 방식으로는 읽을 수 없었어요. 훌륭함이란 말은 여전히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로써 저에게 작동하고 있었죠. 하지만 그 훌륭함이란 보편성은 사회적 통념 속에서 만들어진 권위이거나 내가 가치있다고 믿고 있는 신념일텐데요. 마크트웨인이 말하는 '맥클린톡류의 독보성'을 그의 글에 대한 비하나 폄하로 보지 않는 해석, 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는 것에서 왠지 완패한 느낌도 들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