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 역사 6주차 후기 _ 신현주
이번 주를 끝으로 글역 수업에선 마크 트웨인, 미국 민중사와는 작별이다. 6주라는 시간 동안 마크 트웨인을 깊이 알아가는 것에는 역시 한계는 있는 것 같다. 다른 샘들과의 토론 시간마저 없었다면 아마 평생에 걸쳐 이 사람을 알아가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테니 일단은 현실에 순응하며 다음 시즌 준비를 시작하려 한다.
<최면술사>
지난 시간에 이어 이번 시간에도 <최면술사>를 101p~끝까지 읽었다. 기억에 남는 것은 <우울증 치료제>라는 단편을 다루며 나온 ‘저자와 독자의 역할’에 대해서 이야기 나눈 것이다. 이 단편은 나를 포함해 네 명이나 다뤘으니 읽고 쓴다는 것의 함께 하는 샘들도 글쓰기의 고충을 여실히 느끼고 계신듯하다.
독자의 역할이란 무엇이며, 글을 쓴다는 건 무엇일까. 이야기를 나누면서 독자와 저자는 경계 없이 동일한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읽는다는 것’. 그것은 단순히 눈앞에 보이는 텍스트를 의미 없이 눈으로 훑어내려가는 행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 거다. 마크 트웨인이 비판한 ‘없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글을 피하기 위해선 우선 제대로 읽는 방법부터 연마해야 한다는 뜻일까? 다른 샘들과 이야기 나누는 과정에서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독자로서의 자세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글쓰기는 하고 싶은 말 (주제)에서 비롯된다. 주제의식이 생기려면 읽기, 사유, 관찰 등이 충분한 기반이 되어야 한다. 결국 타인이 쓴 글에 제대로 접속하고 읽는다는 건 내 글을 쓸 단단한 기반을 마련한다는 것과 같은 것 아닐까?
<채운샘 이야기 시간>
들어가기 앞서 채운샘은 마크 트웨인 산문의 맥락을 더 잘 알 수 있으니 마크 트웨인의 단편, 미국 민중사를 함께 읽으라고 하셨다.(<도금 시대>, <왕자와 거지> 등.) 그것들을 같이 읽으면서 텍스트를 읽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어떤 걸 연결시킬 땐 A의 맥락과 나의 맥락이 있으니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서로 조응하고 차이를 보이는지 입체적인 관계 속에서 텍스트를 읽으라고 하셨다. 그렇지 않으면 그 단편을 연결시키는 건 본인의 상상일 뿐이라고. 더 확장해서 읽기 위해선 역사적 맥락, 텍스트적 맥락 등을 살피면서 읽는 게 중요하다고 하셨다. 이 또한 앞서 말했던 독자로서 책을 제대로 읽는 방법 중 하나일 것이다.
<최면술사>에서 마크 트웨인이 자신이 거짓말한 것을 고백하는 게 진실한 것일까, 아니면 사실 자신이 거짓말을 했었다고 말하는 걸 거짓이라고 믿는 엄마에게 진실이 있을까. 하나의 거짓, 하나의 진실이 존재할 수 있는 걸까?(100%의 진실, 100% 거짓.) 진실의 값이라는 것은 결국 어떤 사람과의 관계에서 어떤 상황에서 드러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결국 마크 트웨인이 비판하는 것은 정직함이나 거짓 자체가 아니다. 어떤 것도 정직하기만 한, 거짓이기만 한 것은 없으니까. 마크 트웨인은 이분법적인 분류 기준 속에서 선악을 구분 짓는 (거짓은 악, 정직은 선이라고 믿는) 그 믿음이 무엇인지 질문하고 있다. 이는 <허클베리핀의 모험>에서 노망친 노예 짐을 고발하는 것이 사회적 정직함이었지만(그 시대 기준) 그것이 과연 삶의, 인간적인 정직함인 것인지를 질문하는 맥락에서도 살펴볼 수 있었다. 이 얘기를 들으면서 뜨끔했다. 내게는 집단 내의 어떤 기준에 반하는 행동을 저지른 사람을 잘못됐다고 단정 짓는 습관이 있다. 뭔가에 홀린 것처럼 깊이 생각하기도 전에 그렇게 프레임이 씌워져버린다. 그러나 마크 트웨인은 그런 내게, 헉을 통해서 또 산문집 속 여러 이야기들을 통해서 너는 지금 어떤 최면에 걸려있는 건 아닐까? 하고 질문하는 것 같았다.
확실히 내가 이분법적인 사고와 어떤 체제에 길들여졌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었다. 예를 들어 ‘아침에 일찍 일어나라’라는 격언은 딱 잘라 좋거나 나쁜 것으로 나눌 수 없다. 이 말은 누가 언제 하느냐에 따라 저항적인 말이 될 수도, 체제 옹호적인 말이 될 수도 있으니까. 지금 우리 사회의 자본가가 이 얘기를 하면 그건 대단히 폭력적인 말이다. 그러나 그 말이 농사꾼의 (농사를 지으려면 아침에 해 뜨기 전에 일어나는 게 편하니까) 입에서 나오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일 뿐이다. 같은 말이더라도 농사꾼에게서 나오느냐 거대 지주나 자본가에게서 나오느냐에 따라 그 안에 함축되어 있는, 전달되는 의미가 달라진다. 하여 어떤 말의 가치는 그 자체로 있는 게 아니다.
채운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니체처럼, 그것이 ‘누구의’ 진실이고, ‘누구의’ 거짓인지, ‘누구의’ 말인지. 십계명 속 도둑질을 하지 말라는 말이, 한 쪽에서는 온 가족이 배를 곪고 누군가 죽어나가는 상황인 반면 한 쪽은 너무도 풍족하여 낭비하는 상황 속에서도 해당되는 말인지. 아메리카 땅에 온 영국인과 미국인들이 원주민들은 이 땅에 전혀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학살할 때, 아프리카 흑인을 노예로 쓰며 강제 노동을 시키는 것이, 과연 어떤 생각에서 비롯됐는지. 하나의 절대적 진실을, 행복과 선을 생각하는 것이 어떤 결과들을 낳았는지. 보편적인 진실과 도덕이 과연 어떤 이들을 대변하고 있는지를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말이다.
책을 읽건 글을 쓰건 자신의 선입견이 한 번 작동하면 그 길로 냅다 달리기가 쉽지 멈춰서 다른 생각을 하고 질문하기가 참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무리 좋은 진리도 모든 경우에 합당한 것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하워드 진과 마크트웨인을 통해 배운 것 같습니다. 후기에서 짚어주니 다시 긴장을 가지게 되네요. 늘 신선한 질문으로 월요일 아침을 상큼하게 만들어주시는 현주샘~~차분하고 꼼꼼한 후기 잘 읽었어요.
현주샘의 후기를 읽고 '독자되기'에 대한 생각을 해보았는데요. 일리치의 '깨달음의 혁명'을 읽다가 ... "사람들은 배움의 과정에서 자기 마음에 있던 흐릿한 느낌들을 선명하게 그리는 경험을 할 때 복잡한 기술을 가장 잘 배웁니다. 자신의 두려움을 직시하고 그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글에서 도움을 구하고, 자신의 감정을 포착하고 그것을 구현하는 글의 힘을 아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이 쓴 글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법입니다. '(223쪽) 읽는다는 것과 글을 쓰는 행위는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었어요. 현주샘의 독자의 역할에 대한 물음이 생각났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