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 역사 1-8주차(4/10) 공지
고작 한 주 방학이었는데, 오랜만에 보는 듯 줌 상에서 잔뜩 회포를 풀었네요. 즐거운 수다 덕분에 제 노트북의 말썽도 너그러이 넘어가 주셨어요. 한 주 쉬니 책이 술술 읽힌다는 샘부터 벌써부터 13주차 에세이 고민까지 잠깐 사이 많은 얘기가 오갔지요. 4월말에 있을 오프라인 만남이 더욱 기대가 되더라구요. 공부하는 거라면 고민하겠는데, 회식이라 비행기표 끊을 수 있다고 모 선생님께서 선언하기까지 했거든요. 암튼 저희는 마크 트웨인을 아쉽게 보내고, 이번엔 루쉰을 만났습니다. 루쉰의 <조화석습>과 그 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중국 현대사>를 함께 읽기 시작했지요. 저는 다시 읽는 루쉰이 어려웠어요. 글쓰기와 관련해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어스름히 아는 탓에 정리가 안 된 중국 근현대사도 그렇구요. 그래서 더욱 즐겁게 탐구하며 이번 시즌을 보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루쉰과 시대
루쉰(1881-1936)은 청 말기에 태어나 유년시절 고스란히 나라가 멸망해가는 것을 목도하며 자라게 됩니다, 청나라는 1616년에 건국되어 강희제-옹정제-건륭제로 이어지는 150여년의 전성기를 지나 아편전쟁, 서태후의 독재, 태평천국의 난 등을 거치며 점차 쇠퇴하여 1912년 멸망하면서 300여년 제국의 시대가 끝이 나죠. 이번에 저희가 읽은 중국사 부분이 루쉰의 글에 배경이 되는 시대는 아닙니다. 그러나 한 시대가 세워지고 망하는 것이 가위질하듯 하루아침에 달라지는 게 아님에야 모든 시대는 연관성 안에 있다고 보아야겠죠.
청나라는 야만인으로 불리는 이민족 여진이 세운 나라죠. 조선시대 뿌리 깊은 중화사상으로 우리도 한족이 중국문화의 중심이라는 생각이 자연스러운 것 같은데, 중국의 역사를 통틀어 한족이 지배하던 때는 1000년이 채 안됩니다. 한, 송, 명 정도가 한족이 세운 나라니까요. 그러다보니 한족중심의 사고를 하는 주류들은 오히려 이민족에 저항하는 것을 자신의 정체로 삼을 정도로 중심세력에서 벗어나 있지요. 반면 유목민은 중앙아시아를 넘나들며 이슬람교, 기독교, 티벳의 종교를 다 수용하며 외래문화를 유연하게 받아들임으로써 훨씬 풍부한 문화적 자산을 가지게 됩니다. 샘은 자기 것을 고집하고 지키는 한족의 모습은 오히려 약하다는 걸 보여준다고 하셨어요, 넘나들고 수용하는 태도가 훨씬 강한 자의 면모라고요. 이민족과 한족의 스케일 자체가 다르다는 생각이 드네요. 중화라고 할 만한 것이 실은 생각보다 일천한데, 동북공정에 애쓰는 것도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보면 약자의 몸집불리기로 보이기도 하구요.
청의 전성기를 열었던 황제, 강희제만 봐도 엄청난 공부와 수양을 통해 지식과 교양을 쌓았구요. 한편으로는 삼번의 난을 잠재우는 등 직접 전쟁을 지휘하고 원정을 강행하기도 했어요. 또 자신에게 들어오는 정보의 정확성을 위해 공적, 사적 문서들을 비밀리에 직접 받아보는 ‘주접제도’를 시행하기도 했죠. 그렇게 받은 문서에 빨간 펜으로 답을 달아 보냈다고 해서 주접이라고 하는데요, 덕분에 이 편지체의 글에서 따뜻한 강희제의 면모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강희제는 여성들의 전족을 폐지하고, 지식인을 넓게 등용하고 러시아 접경지대의 분쟁을 정리해 국경을 확정하는 등 국가 운영에 필요한 제도와 인프라를 구축합니다. 그 바탕 위에 옹정제 건륭제가 화려한 예술, 문화를 꽃피우면서 청나라의 전성기가 펼쳐지게 됩니다.
1912년 신해혁명으로 임시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렇듯 화려하고 강인한 청나라는 망국으로 치달았죠. 헌데 실상 사람들의 삶에서는 1930년대까지도 청 문화는 지속되고 있었어요. 시대는 혼란하여 청나라의 문화를 지키려는 자, 한족의 부흥을 노리는 자. 군벌세력 등이 혼종되어 있었구요. 루쉰은 이들 모두를 향해 펜을 무기처럼 휘둘렀던 사람입니다. 모든 진영으로 부터 욕을 먹으면서도 중재하거나 불화가 두려워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었죠. 샘께선 ‘펜이 어떻게 무기’가 되는지를 너무나 잘 보여준다고 표현하셨는데요. 신문이나 잡지 등에 실린 글을 그대로 가져와 즉각적으로 비판하며 상대에게 고대로 돌려주고 있습니다. 루쉰의 글이 읽기 어려운 것은 중국현대사를 알고 있어야 그가 하는 말과 비판이 어디를 향하는지 알게 되기 때문이죠. 루쉰의 글은 그 자체로 비판하는 대상이 현실의 누구인지를 알 수 있었고, 심지어 <아큐 정전>을 읽고는 모두가 자신을 아큐라고 생각했다고 하니 견뎌야 하는 미움의 강도가 어마어마 했을 거 같아요. 루쉰의 글을 읽어보셔서 알겠지만 참 독하게 비판하지요. 때문에 탄압을 피해 본명 주수인보다는 루쉰을 비롯한 다양한 필명으로 글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구요. 그러다 절묘하게도 중국이 공산화되기 한 해 전 1936년에 루쉰은 짧은 생을 마감합니다.
그때도 이상하고 지금도 이상하다
<조화석습>은 1926년에 쓴 것을 27년에 모아 발표한 책입니다. 제목은 과거를 회상하며 옛일을 다시 들추는 것처럼 보입니다. 26년 무렵 여사대 사건으로 제자들이 죽어가고, 3,18 투쟁으로 민중이 대거 학살되는 시기로 루쉰은 지명 수배자가 되어 쫒기는 신세가 됩니다. 또한 지식인들이랍시고 지식인의 탈을 쓰고 쓰는 글들이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 같고, 자신은 평화롭게 한시도 어디에 머무를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이 뭘 써야 할지도 모르고, 글을 쓸 수도 없는 상황에서 이 글, 즉 과거의 이야기를 쓰고 있는 것이었죠. 과거의 이야기이지만 자신의 현재가 그대로 투영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과거에 대한 기록은 현재적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를 토론에서 하긴 했지만, 저희는 어멈의 관계, 효, 전통 등 루쉰이 하는 말에 더 천착한 거 같아요. 과거의 글 속에서 자신의 어떤 현재를 쓰고 있는지 계속해서 보아야 한다고 강조 하셨죠. 강의 들으면서 뭔가 답답하고 막히면 아무 것도 쓰지 못하고, 글이 막히면 다른 모든 것이 스톱해 버리는 저를 계속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루쉰의 글쓰기법이 잘 드러난 것이 잡문 <개, 고양이, 쥐>라고 합니다. 전 세미나전까지도 이 잡문이 잘 정리되지 않아 애를 먹었는데요. 이중삼중의 징검다리를 지나야하는데, 후루룩 건너뛰어 버려서인 것 같죠! 이 글에서 루쉰은 자신이 왜 고양이를 싫어하는지 옛일을 되짚어가며 솔직하게 회고합니다. 루쉰은 고양이를 싫어합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결정적인 건 그가 키우던 쥐를 잡아먹었기 때문이죠. 고양이가 쥐를 죽여서 싫어하게 되었는데, 나중에 자꾸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됩니다. 쥐가 사실은 고양이를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쥐구멍에도 언제든 들어올 수 있는 몸을 가진 뱀을 무서워 한다는 것, 쥐를 죽인 건 고양이가 아니라 자신의 하인인 키다리 어멈이었다는 사실 등. 맞는 게 하나도 없네요.
우리가 뭔가를 새롭게 알게 될 때마다 과거에 자신이 알고 있던 건 틀린 것이 되죠. 문제는 그걸 인정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거의 뭉게거나 인정하지 않는 길을 택하죠. 샘께선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과거의 자기가 틀렸음을 아는 것이라고 하셨어요. 이 글은 우리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얼마나 편파적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쥐를 좋아했기 때문에 쥐를 죽인 고양이가 싫은 것인데, 알고 보니 이유와 스토리가 다 왜곡되어 있더라는 겁니다. 이걸 정치적으로 확장해도 동일하게 적용이 됩니다. 당파성의 문제만 봐도 나의 당 나의 이념 등 나의 선호가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고 왜곡의 근원이 될 수 있으니까요.
문제는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알아도 싫어하는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한 번 싫은 건 상황과 조건이 바뀌어도 그냥 싫은 것으로 남는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자신은 선한 인간으로 위장하는데요. 예를 들어 함께 고양이를 싫어했던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싫은 고양이를 자신이 없애버리면 곧장 고양이를 죽인 자로 비난의 대상이 되고 고양이는 오히려 가련하게 죽은 것이 되버리는 식이죠. 계속 자신은 옳은 인간이라는 상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거죠. 그러지 말고 그냥 자신이 과거에 틀렸음을 인정하라는 거죠. 이 말은 현재도 금방 과거가 된다는 걸 생각하면, 지금 역시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할 수 있게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오류와 함께일 수밖에 없지요. 루쉰은 타인을 비판하는 만큼, 아니 그에 앞서 자신을 먼저 해부하고 오류를 드러냅니다.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얼마나 편협한지를, 아울러 지금도 여전히 편협함을 그대로 밝히고 있습니다. 자기에게 예외 없다는 면에서 마크트웨인과 매우 닮아 있죠.
우리가 글을 쓰지 못하는 이유 중 아주 큰 부분이 틀린 나를 인정하는 것이 어려워서죠, 비판을 두려워 하니까 글을 쓰지 못하는 것이죠. 요 대목에서 잠시 줌 정적, 다 자기 얘기라서 말입니다. 비판은 비판하는 사람의 몫이니 나는 그냥 내 글을 쓰면 된다는 지당한 당부도 있었구요. 루쉰을 읽으면서 루쉰이 뭘 말하려는가를 보지 말고, 글을 읽고 나니 자신의 어떤 본성, 어떤 욕망이 또는 인간의 어떤 면모가 보이게 되었는지에 주목해야 한다고요. 그래서 글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루쉰을 읽어야 한다는 첨언도 하셨습니다. 할 얘기들이 남아 있지만 기회는 더 있으니까요, 오늘은 여기서 마무리하렵니다.
*** 8주차 (4/10) 공지 합니다 ***
* 읽을 책 : 《조화석습》 : <오창묘제놀이> ~ <아버지의 병환>
《현대중국울 찾아서1》 : 4~6장 (107p ~ 174p)
* 과제 : 나누고 싶은 문장을 뽑고 생각을 담아 숙제방에 올립니다.
일요일 10시까지 올려주시고, 다른 샘들의 글도 읽고 참여해 주세요.
* 역사 : 노트에 꼼꼼히 정리하며 읽어봅시다.
* 7주차 후기 : 만화샘
토론 시작시 반장님의 버벅임에 잠시 맘 상했다가 역사 수업 시간에 노고를 드러내시는 모습에 미안하다가... 공지 글에 힘을 주고 꼼꼼한 정리를 해주셔서 감동을 받습니다. 반장님께서도 공지대로 일요일 10시까지 과제를 올려주시면 더할 나위가 없겠네요~^^
그렇네요. 글을 쓸 수 없는 이유 중에 많은 부분이 틀린 나, 부족한 나를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것을 감추고 그럴듯 하게 보이고 싶어서 당위나 도덕에 의지해 방향을 선회하고 결말을 내지요. 그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이 글쓰기의 시작이자 글쓰기라고 하셨는데... 아~. 루쉰의 글에서 강렬한 힘과 함께 아이가 지닌 솔직함과 담백함이 느껴지는 이유는 그 부족함에서 시작하기 때문이겠죠. 결국 타인을 향한 손가락질이 되어버리는 저의 마음을 어찌해야 할까요?
일요일 10시... 에구 저도 찔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