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이제야 처음 읽고 있다. 기차 안에서 이 책의 14장 ‘후궁’을 읽으면서 까무러치는 줄 알았다. 너무 웃겨서 떼굴떼굴 구르며 큰 소리로 웃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서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그리고 너무 웃겨서...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진정시키느라 가슴을 주먹으로 쳐보기도 하고 쓰다듬기도 하다가 결국 눈물까지 흘렸다. 어리숙한 듯 하지만 사람 귀한 줄 아는 검둥이 노예 ‘짐’의 솔로몬 왕에 대한 일침에 말문이 막히는 헉. 웃느라 짐의 논리에 말려든 건가 싶어서 그 장면을 다시 되돌려 읽었지만 짐의 말에 말문이 막히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웃음은 진정되지 않았지만 짐의 말을 곱씹어야 하는 상황. 웃음기 어린 맘이 갑자기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했다.
사회 규범과 인간 본성, 선악을 넘어선 분별, 당위와 자유, 최선의 개념, 실체가 아닌 만들어지는 우정, 뗏목이라는 특수성과 그 조건 속에서 형성되는 관계, 각자가 전제로 삼는 합리성, 맞닥뜨린 인간의 진심이 가져오는 삶의 전환 등. 반절을 읽었을 뿐인데도 우리들이 고른 문단과 끄집어낸 이야기는 다양했다.
각자가 고른 문단을 함께 소리 내어 읽기도 했고, 미국 역사와 관련한 쪽지 시험도 봤다. 유난히 많은 말들이 오갔던 시험 시간. 이렇게 서로 시끄럽게 떠들며 볼 수 있는 시험이라면 시험은 즐겁고 유쾌한 경험이 될 것 같다.
글쓰기와 역사 수업을 시작하며
역사와 문학에 여러 역할이 있겠지만 ‘글쓰기와 역사’ 수업에서는 ‘기성세대가 주입한 정서를 해체’하는 것이다. 역사와 관련해 나에게 해체란 내가 아는 역사적 사실을 늘 객관 위에 놓는 버릇을 깨고, 역사적 진실이란 ‘누구의’ 관점일 수 있음을 체득하는 것이다. 역사적 진실에 대한 믿음을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전환하는 것. 역사가 ‘사실’과 관련하여 우리의 관점을 해체하는 것이라면 문학작품은 감정과 정서의 부침을 겪게 한다. 감정과 정서의 부침을 통해 자신에게 전해지는 파동을 감각하고, 타자를 경험하며, 신체성을 획득할 수 있다. 내가 썼지만 어려운 말들이다. 역사와 문학을 통한 시선의 변화를 채운샘은 당부하셨는데 아직 나는 문학작품을 읽으며 재미를 느끼고 역사적 지식을 쌓아가는 즐거움에 급급하다.
처음으로 ‘이주민, 이민자들의 나라’라는 미국의 정체성을 생각했다!
이번 시즌에는 앞서 말한 마크 트웨인(1835~1910)의 소설 『허클베리 핀의 모험』과 하워드 진(1922~2010)의 『미국 민중사』를 읽고 있다. 저자나 책의 명성에만 익숙했을 뿐 그들의 책은 처음 읽는다. 오래 전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라는 책을 읽다가 도중에 포기했던 기억이 나는데 여태 나는 그 책이 노암 촘스키의 책인줄로만 알고 있었다. 사회운동(베트남전, 흑인운동)의 자전적인 경험을 담은 하워드 진의 책이란 것을 이번에 알았다. 잘못 알고 있단 사실을 이제라도 알게 돼서 다행이다. ㅎ
하워드 진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에서 이주한 유대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집에 읽을거리가 전혀 없는 환경이었지만 ‘찰스 디킨즈’의 소설은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마크 트웨인은 미주리 주 플로리다에서 태어나 4살부터 미시시피 주변의 소도시에서 생활한다. 11살에 아버지를 잃고 인쇄소에서 수습공, 증기선의 키잡이 역할을 하기도 했다. 콜럼버스 이후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한 백인 중심의 일관된 미국 역사를 ‘피지배, 노예, 원주민’과 같은 반대급부에서 서술했다고 평가받는 『미국민중사』나 미시시피강을 따라 펼쳐지는 열너댓살 백인소년과 아내와 딸을 둔 ‘검둥이’ 노예의 우정어린 여정을 담은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 담긴 삶에 대한 태도는 저자들의 삶을 관련지으면 좀더 잘 보이는 것 같다.
마크 트웨인이 살던 시대는 골드 러시의 시대였다. 1850년대는 서부에서 발견된 금을 쫓아 유럽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비단 유럽에서 뿐만이 아니라 비유럽에서도 미국으로 건너 온 사람들이 많았다. 철도 건설과 광업에 필요한 노동력은 중국과 인도와 같은 나라에서도 많이 충당되었다고 한다. 특히 중국에서 팔려오다시피 이주해 온 사람을 쿨리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한자로 苦力. 쓰다 또는 괴롭다는 뜻을 지닌 苦와 힘을 쓴다는 의미의 力을 합해 만들어진 낱말이다. 채운샘은 소위 말하는 미국의 서부‘개척’시대를 배경으로 한 ‘퍼스트 카우’(캘리 라이카트, 2019년)라는 영화의 등장인물인 루(쿨리, 도망자)와 쿠키(유랑하는 가난한 유대인)를 통해 미국역사를 일군 또다른 이주민의 삶을 들려주었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등장인물인 짐은 노동력이 필요했던 미국에 팔려온 노예거나 그들의 후손 중 하나이다. 헉도 부랑아의 삶을 사는 아버지를 둔 미국 하층민의 백인 가정의 아이다.책에는 없지만 따져보면 이민자의 후손일 것이다. 루도 쿠키도 이주자들이다. 미국은 세계 각국에서 이주해 온 이민자들로 만들어진 나라다. 유럽백인들이 세운 나라가 원래 있고 이민자들이 건너온 것이 아니다. 이민자의 삶이 곧 미국의 역사이자 지금도 미국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건설이 이주해 온 이들의 노동력을 제외하고 가능한 일이었는가. 그리고 신대륙이라고 일컬어지는 곳에 콜럼버스의 항해 이전에는 애초 삶이나 문명이 부재했던 것인가. 유럽인들이야말로 그곳에 있던 삶을 약탈하고 훔쳤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먼저 발견한 자에게 소유권을 인정하는 그들의 법률을 소유라는 개념조차 없이 살아가고 있는 원주민들에게 들이대면서 빼앗은 역사를 그들은 발견이나 개척이라고 하고 있지 않은가.
채운샘의 강의를 들으며 콜럼버스의 항해를 미국대륙에 새로운 문명을 이룩한 시발점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사람은 무엇을 바라는가, 누군가는 왜 미국의 역사를 ‘발견과 개척’으로 기억하기를 바라는가, 이런 관점은 누구에게 필요하고 유용한 것인가 궁금해졌다. 유럽 위주의 시각에 길들여지면 콜럼버스 항해 이전에 그곳에 이미 영위되고 있던 삶들이 있었음을 자꾸 망각하게 된다. 유럽인들을 마치 황무지에 새로운 문명을 건설한 영웅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신대륙은 아무것도 없던 곳이 되어버린다. 면면히 이어지던 누군가가 혹은 삶의 방식이 이미 있었음에도 그것은 자꾸 잊혀진다. 더불어 몰살된 생명과 배제되고 있는 이들도 망각한다. 발견과 개척의 역사로 미국을 보면 누군가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일에 동조하고 힘을 보태게 된다.
타자와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질문하기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진 이들이나 전제가 다른 이들을 마주쳤을 때 우리는 막막하다. 대화나 타협의 여지가 없다는 두려움과 답답함을 느끼곤 한다. 미국의 역사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전제가 다른 타자와의 만남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소유 개념이 없는 원주민과 소유의 욕망으로 가득했던 유럽인. 타자와의 관계에서 유럽인들이 원주민들에게 했듯 동질화하고 제거하는 방식이 있다. 하지만 『허클베린 핀의 모험』 속 짐과 헉의 만남도 있다. 그들은 유동하는 미시시피 강에 떠있는 불안정한 뗏목에 하루하루 속에서 난입하는 이질성과 부침을 겪어낼 뿐이다. 그 과정에서 서로 변해간다. 그리고 서로를 통해 변모한다. 사회적 규범이나 필요, 유용함 등을 뛰어넘는 관계와 정서를 서로를 통해 경험한다.
짐과 헉의 관계는 비단 소설 속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하워드 진은 17세기 미국의 모습을 ‘흑인과 백인은 함께 일하고 서로 형제처럼 지냈다.’(미국민중사, 71쪽)고 기술하고 있다. 그들의 친밀한 관계를 금지하는 법령의 제정이야말로 그들의 친밀함을 보여준다는 하워드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다수의 흑인 도망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도망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을 도왔던 백인 하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백인 ‘하인’도 존재했다. 이후에 이들의 결속을 두려워했던 이들이 백인과 흑인들, 백인 남자와 백인 여성에 대한 대우를 차별적으로 집행하는 법률을 제정한다. 인종차별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으로 만든 제도의 산물이었다! 인종이란 개념에 사로잡혀 벗어나지 못하는 나에게 제도적 산물이란 말은 이질적인 감수성을 불러일으킨다.
〈참고하면 좋은 영화와 책〉
영화 - 퍼스트 카우(캘리 라이카드 감독, 2019), 미나리(정이삭 감독, 2020),
아마겟돈 타임(제임스 그레이 감독, 2022)
책 - 『그들이 온 이후』, 워드 처칠.
공지를 쓰던 와중에 후기가 먼저 올라온 걸 보았네요.ㅎ 왁자한 토론과 강의와 역사서를 통해 소설이 더 풍부하게 읽히고 있죠?!
영화 <퍼스트 카우>를 통해 나온 질문, '소유란 무엇인가' 는 곧바로 '타자를 어떻게 마주할까', 라는 질문과 맞닿는 것 같아요.
소유는 바로 배타성으로 드러날 테니까요. 타자를 어떻게 마주할까? 나는 어떠한지? 질문하면서 남은 부분도 마저 읽어보죠.
이렇게 빠르고 세밀한 후기 감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