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 역사’ 시즌1-1 2주차(2/20) 공지
첫 시간 출발을 앞두고 두 분 선생님이 합류하시면서 팀 마력이 두 배는 상승한 채 시작을 했습니다. 글쓰기 프로그램의 매력을 제대로 알아보신 안목 덕분에 말이죠. 줌 화면이 꽉 차서 아주 뿌듯했답니다. 저희가 이번 주 읽은 책은 마크 트웨인(1835~1910)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 중 일부와 《미국 민중사1》 입니다. 다양한 주제로 글을 올려 주셔서 토론도 활발발하고 서로 다른 문제의식을 공유할 수 있었어요. 후기를 채운샘 강의 중심으로 써 주셔서 오전 토론에서 나눈 이야기를 좀 정리해볼까 합니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1885년 미국에서 발표된 미시시피 3부작(《톰소여의 모험》, 《미시시피강의 추억》, 《허클베리핀의 모험》)의 하나입니다. 마크 트웨인이 20대에 미시시피강 수로 안내인을 한 적도 있더라구요. 미시시피강은 미국 중앙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며 흐르는 미국의 대표적인 강인데, 마크 트웨인은 문명에 대항하는 반문명적 공간으로 미시시피강을 표상하며 각별한 애정을 갖는 것 같습니다. 이 소설은 1850년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1776년 링컨에 의해 노예 해방이 선언되었지만 소설이 쓰일 당시에도 미북부 몇몇 주만이 자유주였고, 1850년에는 “도망 노예법”이라는 게 만들어져 도망친 노예가 자유주에서 잡히더라도 주인에게 돌려보내야 하는 걸 법으로 제정할 정도로 노예제가 뿌리 깊은 때였죠. 이런 미국의 사회상이 헉과 짐을 중심으로 소설에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채운샘 말씀을 빌리면,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시대를 인식’하는 것이라면, 문학을 읽는 것은 시대의 ‘정서적 부침’을 함께 겪는 것이라 하셨는데, 문학은 시대를 신체화 하는 좋은 도구인 것 같습니다.
정서적 부침을 함께 겪기
이 소설은 소년 헉이 도망친 노예 짐과 미시시피강을 따라 뗏목을 타고 도망을 가며 겪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공교롭게도 세 분의 선생님이 뽑은 문장이 바로 도망 노예 짐을 고발하는 것에 대해 헉이 고민하다 생각이 바뀌는 지점이었어요. 문장을 같이 봐도 좋을 거 같네요.
하지만, 잠시 생각해 보니, 만약 내가 짐을 고발하고 바른 일을 했다고 해도 지금보다 기분이 나아질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 지금처럼 기분이 안 좋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올바른 일을 하는 게 힘이 들고 나쁜 일 하는 것이 쉽고, 그 대가는 똑같다면 대체 좋은 일 하려고 노력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고 생각해 보았다. 생각이 꼭 막히고 대답도 안 떠올랐다. 결국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하고 앞으로는 때에 따라 편하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142쪽, 허클베리 핀의 모험)
이에 대해 “일을 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성장과 관계맺기”에 대해, “뗏목이라는 특수한 공간”이 주는 변화 등에 주목해 글을 써 주셨죠. 같은 대목 다른 생각, 이런 게 문장을 뽑는 묘미 같아요. 토론은 어떤 상황이 짐의 생각을 바꾸게 했을까에 좀 더 맞춰졌던 것 같구요, 헉은 도망친 노예 짐을 고발해야 한다는 사회적 규범과, 짐과 맺은 인간적 관계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그러다 바른 일에 대해 신경 쓰지 않기로 하죠. 자기 스스로의 양심에 따라 당시의 사회가 표명하는 제 가치를 거부하고 짐을 인간으로 대우하기로 마음먹는 것이죠. 사회적 규범을 따라 일을 잘 처리할 때, 보통 일을 잘한다고 합니다. 그것이 마음에 무엇을 남기든 간에 말이죠. 하지만 헉은 짐이 가진 지혜, 인간미에 이미 매료되었고, 짐을 고발했을 때 짐이 당할 고통과 자신이 느낄 도덕적 갈등으로 ‘생각이 꼭 막히게’ 되었을 거예요. 이미 이 과정에 헉은 마음의 부침을 겪고 있었던 거죠. (이걸 읽는 우리도 함께) 헉의 이 갈등과 결정이 절대적 가치를 의심하고 넘어가겠다는 거창한 의지에서가 아니라, 현실을 함께 겪어내는 과정에 생겨난 것이고, 그렇기에 지금 관계 맺고 있는 행위가 중요하다는 얘기를 나눈 것 같네요. 책을 읽으며 정서적 부침을 겪는 것이야말로 텍스트와 다른 관계를 맺어가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미시시피강과 뗏목
그래서 두 사람의 관계가 형성되는 공간 뗏목은 이 소설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많은 요소를 함축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뗏목은 두 사람의 일상이 이루어지고, 우정을 나누며 의지하는 곳이자 도망치고 떠다니고 유동하는 세계에서 정주와 안락을 선사하는 곳입니다. 한편 뗏목은 너무나 불안정한 공간입니다. 수시로 뒤집히고 부서지고, 그 와중에 두 사람도 헤어지고 다시 만나며 부침을 겪게 되는 곳이죠. 그러나 그런 불안정한 공간이 두 사람에게 자유를 주고 가장 안락을 느끼게 하는 곳이라는 사실입니다. 헉이 “정말 자유롭고 편하고 안락한 뗏목 생활”이라고 고백하듯 말입니다.
또 저자가 사랑해 마지않는 미시시피강은 인간 문명이 만든 욕심과 비자연적인 요소들을 그대로 거울에 비추듯 드러내는 은유적 공간으로 여겨집니다. 미시시피 강을 따라 흘러가며 그들은 다양한 군상을 만나게 되고 다시 강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하죠. 자신을 죽은 자로 위장한 소년과 도망친 노예라는 범법자로 이루어진 뗏목의 두 사람은, 노예와 주인으로 흑인과 백인으로, 사랑과 증오로, 규율과 자유로 위계를 세우고, 가장 높은 자리에서 가장 우아하지만 가장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귀족들의 모순적 태도와 대별됩니다. 도망자인 두 사람이 가장 솔직하고 담백합니다. 유유히 흐르는 미시시피강은 그저 그 모순들을 보여 줄 따름입니다. 불안정과 안락이 혼재하고 강을 따라 흘러가기에 정주된 사람들이 더 잘 보이는 이 이중성이 너무나 잘 드러나고 있죠. 삶이 그렇다는 듯 말이죠.
질문은 이렇게
헉과 짐의 티키타카는 꽤 재미있는 지점이 있어요. 재순샘이 뽑아주신 부분 중, 램프의 요정 지니에 의문을 가지는 것 같은 대화 한 대목.
“주인님이 램프를 비비면 좋든 싫든 넌 무조건 달려가야 하는 건데.”
“아니, 키가 나무만 하고 덩치가 교회 건물만 한데도 그래야 한단 말이야?”
우리는 램프의 요정이 나에게도 있었으면 하지, 램프 속 도깨비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죠. 당위에 따라 사는 것에 익숙하거나, 처음에 얘기했듯 사회적 통념을 진리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의심하거나 질문하지 않습니다. 백인 중심의 서사, 지배자 중심의 논리를 그 자체 당연한 진리로 여기는 것이죠. 그러면 전도가 일어납니다.
우유를 훔치고(영화 <퍼스트카우>), 수돗물을 훔치면(영화 <미나리>) 바로 범법자가 되요. 그러나 금광을 훔치고, 엄연히 사람이 사는 땅에 “발견자 우선주의” 라는 자신의 논리를 들이밀어 대륙을 통째로 훔친 자들, 그들에게는 소유의 근거를 묻지 않는 그런 전도가 일어나죠. 또 채운샘이 예로 드신, 나치의 유대인 학살.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의 행위는 당연히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악’이죠. 그러나 여기서 유대인은 자신들의 민족학살을 성서와 연관시켜 특권화하며 ‘제노사이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나치의 민족말살과 이에 대항하는 자신들은 성서를 완성하는 자들로 특권화 하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가 근래에 겪은 것만도 많은 수의 학살이 있습니다.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공격, 보스니아와 코소보, 아르메니아, 르완다, 동티모르 등지에서 벌어졌던 인종청소. 무엇보다 유럽인의 인디언 학살. 여기엔 나치에게 책임을 묻듯 묻지 않고 있죠. 오히려 ‘발견’과 ‘이주’를 논하고 있죠. 왜 어떤 민족의 죽음은 말해지지 않아도 될까요? 이런 전도(顚倒)에는 왜 질문하지 않을까요?
짐과 헉의 가벼운 대화에서 우리는 어떻게 질문해야 하는지를 배우는 것 같네요. 근본을 의심하는, 전제를 바꿔보는 유쾌함이 있습니다. 얘기가 길어졌는데, 그만큼 생각할 거리도 나눈 이야기도 많아서죠. 시간이 부족해 못 나눈 이야기는 2주차에 같이 붙여서 해보려고 합니다. 그냥 넘기기에 아까운 질문들이 있어서요. 그만 끝맺으려다, 채운샘이 골라주신 문장 중 일부를 공유해볼까 합니다. 저도 새벽 감성으로 읽다 그만 울컥했던 대목이예요. 인간에 대한 예의, 친구란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곱씹어보면 좋을 거 같네요. 공지 먼저 하구요.
*** 2주차(2/20) 공지입니다 ***
* 읽을 책 : <허클베리 핀의 모험> (194p ~ 끝)
<미국 민중사> 3~5장 (83p ~ 186p)
* 과제 : 공유하고 싶은 좋은 문장 뽑고, 문장을 뽑은 이유를 간단히 적어 일요일 오후 6시까 지 숙제방에 올려주세요.
수업 시작 전 다른 선생님들이 올린 글을 읽고 수업에 참여하면 토론이 더욱 원활할 거 같습니다.
* 역사 쪽지 시험 준비도 잊지 마세요.
* 2주차 후기 : 은옥샘
「이것들이 무슨 뜻이냐고? 내가 다 말해 줄겨. 내가 목이 터져라 널 부르고, 뗏목을 지키느라 힘이 다 빠져 갖고 결국 잠이 들었는디, 난 니가 없어졌다는 것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어. 그리고 앞으로 나와 뗏목이 어떻게 될 건지도 전혀 알 수 없었어. 깨어 보니 니가 옆에 무사히 있는 걸 보고 눈물이 막 쏟아졌어. 너무도 고마워서 무릎을 꿇고 니 발에 입맞춤꺼정 할 수 있을 정도였어. 헌디 내가 생각한 것은 거짓말로 어떻게 이 늙은 짐을 골탕 먹이나 하는 거였어. 저기 쌓인 건 분명 쓰레기여. 쓰레기란 친구의 머리에다가 먼지를 덮어씌워 그 사람을 창피스럽게 만든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거여.」
그러고는 천천히 일어나 아무런 말도 없이 움막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나는 나의 비열한 짓거리가 너무 창피했고, 짐이 방금 재게 한 말을 접게 만들 수만 있다면 이번엔 내가 기꺼이 짐의 발에 입을 맞추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내가 다가가 사과하기까지는 십오 분이 걸렸다. 그에게 진심으로 사과했고 그 후에도 사과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그에게 비열한 장난을 치지 않았다. 이런 장난질이 이 정도로 짐을 비참하게 만들 줄 알았더라면, 나는 결코 이런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 열린책들, 119~120p)
스스로 자신의 경험을 차별화하고 특권을 부여함. 홀로코스트를 겪은 유대인들이 어떻게 가자지구의 분리장벽을 세울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폭력을 자신들이 경험한 폭력적 사건과 별개로 생각하는 이스라엘의 선택에는 성서적 사건의 완성이라고 의미를 부여하는 시선이 있음을 채운샘이 말해주셨지요. '자기피해를 특권화함으로써 자기경험의 보편화를 막는' 행위를 가능케 하는 것이죠. 폭력을 당한 경험이 성찰로 이어지지 않고 왜 재생산되는지... 유난히 자신의 경험에 의미부여를 해대는데 그것과도 관련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