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 역사 3-9주차(11/20) 공지
<분서> 권2를 읽고 원명중국사 3-4장을 읽었습니다. 요즘 에세이를 준비하는 때라 그런지, 같은 책을 읽고 함께 얘기 나눌 친구가 있다는 게 참 즐겁고 고맙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말 저말 귀에는 거슬리지만 정확하게 문제를 짚어주고 나는 너무나 습관적이라 간과하고 있는 디테일을 보게 해주어서 말이죠. 이탁오도 친구들이 참 많았던 거 같지요? 그 많은 편지들이 대부분 친구들을 향해 써진 것이니까요. 이번 과제에 유난히 친구를 주제로 써 온 글이 여러 편 있었는데, 이탁오의 독특한 사귐에 주목하셨던 것이겠죠.
이탁오는 스승이 아니라면 친구 삼을 수 없고, 친구라는 말 속엔 스승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사우(師友)하고 하지요. 이탁오에게 친구는 다양합니다. 13세나 어린 절친 초약후도 있고, 이탁오의 삶을 기록한 공약곡이란 친구도 있지요. 경정향은 독특한 포지션을 가지는데, 이탁오는 그에게 가르침을 받고 스스럼 없이 친구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사건건 부딪치면서 이탁오가 자신의 사유를 벼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북송 성리학의 전통적인 해석에 머물러 있는 경정향과 욕망을 중시하는 이탁오는 입장이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이탁오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눈길도 주지 않았다고 하는데, 끝없이 논쟁을 벌였다는 것은 이탁오와 공유하는 지평이 있었다는 말이죠. 이 둘의 관계는 적과 동지가 다르지 않다는 걸 잘 보여줍니다. 불화를 자처하더라도 자신의 생각과 질문을 던지고 자신이 깨달은 것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사이라고 이탁오에 대한 생각을 나누었는데요. 그러나 자신의 질문과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게 쉽지 않죠. 배움이 차이를 생성하는 것이라면, 경정향과 이탁오의 관계가 이걸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 같은데요. 동일한 질문을 해도 상이한 조건 때문에 차이가 만들어지기 때문이죠. 공유하는 게 없다면 다른 것이라 말할 것도 없기에 경정향에게 던지는 집요한 말들이 다시 읽힙니다. 경정향과의 논쟁을 하나 더 보겠습니다.
불용이 진기(不容已眞機) : 어찌할 수 없는 인연
불용이 진기는 어쩔 수 없음, 그만둘 수 없음을 말하는데요, 지난 주 이 부분을 읽으면서 묻어두었던 구절인데 이번 주 해석을 해 주셨어요. 이 말은 ‘경사구에게 답함’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사구’는 경정향의 벼슬을 말하는데, 내내 경공이라 쓰다가 사구라는 벼슬을 거론한 것이 서로의 차이를 말하고자 작심한 것 같네요. 그는 편지 첫머리에 자신이 경정향과 다른 줄 알면서도 계속 가르침을 청하게 된다고 하며 둘 사이에 ‘어쩔 수 없는 인연(不容已眞機)’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하죠. 경정향은 내내 이탁오의 이단성을 바로잡고자 합니다. 보통 군신 간에는 목숨을 걸고라도 간언하는 예를 역사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친구 사이엔 간언으로 얻는 이익이 없기 때문에 보통은 끝까지 간언하는 일이 없다고 이탁오는 말합니다, 그런데 경공이 그 일을 꿋꿋하게 하고 있으니 친구 삼을만하다고 하죠. 그러함에도 둘의 지향점이 다르다는 걸 분명히 말합니다. 경공이 벼슬하는 건 경공의 욕망에서 비롯된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마찬가지로 자신의 기행도 자신의 욕망에서 비롯된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자신의 기행을 바로잡고자 하는 일에 그만 신경쓰고 각자의 욕망대로 살아가자는 것이 이탁오의 지론입니다. 성인은 성인이 어떤 존재라고 표상을 세워놓지 않았으니 거기에 맞추지 말라는 말도 하죠.
그러면서 이탁오는 성인의 말을 말한 그대로 이해하라고 합니다. 공자는 언행일치를 중요시하기에 공자께서 ‘자신은 무엇을 잘 못한다’ 라고 말한 건 정말이라는 겁니다. 그건 겸사가 아니라 정말 어리석고 미숙하다는 의미로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해서 말합니다. 그것이 성인을 성인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성인은 어떤 일에 능숙해져야 한다고 사람을 다그치지 않으셨는데, 능숙하다고 느끼는 순간 멈춰서 버리게 되어서죠. 그래서 그걸 알고 노력하는 한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성인은 끊임없이 애쓰고 노력하는 자입니다.
여기서 샘은 질문을 던지셨죠. 누군가를 나아가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를 나아가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라구요. 이탁오에 비추어본다면 자신의 절실한 질문을 명확히 알고 싶어서이죠. 이탁오가 생사의 질문을 쥐고 공부로 나아갔던 것처럼 말이죠. 성인을 나아가게 했던 힘은 부족한 자신을 채근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었구요.
욕망을 기준으로 재해석한 순임금과 상
순임금과 상에 대한 이탁오의 해석은 너무나 놀라운데요. 순임금을 이복동생과 계모가 죽이려 했다는 이야기는 알려진 대로입니다. 이에 대해 맹자를 비롯해 기존의 해석은 순이 죽이려는 의도를 모르고 있었다는 것인데요, 그러면 아주 선한 의도로 오점 없이 마무리가 됩니다. 그런데 이탁오는 이 해석을 따르지 않고 살해의도를 ‘알았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당해준 것은 누군가를 죽이려는 마음조차 그들의 욕망이라는 것이죠. 과제를 하면서 전 이 욕망 부분이 해결이 안되어서 주물거렸는데, 샘께선 우리의 육식 채식이 모두 죽임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고 동물들의 세계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라고 하셨어요. 자신이 살기 위해, 살려고 하는 일에 딱 선악의 잣대로 나누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임금은 상과 아버지 고수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을 읽었고, 그렇기에 알면서 당해주었다는 것입니다. 살고자 하는 욕망을 짓밟지 않고 살게 하였던 거고, 그래서 임금이 된 후 고수와 상에게 땅을 나눠주며 살게 한 것이죠.
이탁오는 인간의 욕망이야말로 생의 본질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죽이려는 마음조차 저들의 욕망이라고 인정하는 것이죠. 샘께선 달라이라마의 망명도 이와 같은 마음의 발로가 아니겠냐고 하셨죠. 중국 정부가 자신을 죽이려 한 것을 알았지만, 싸우지 않고 망명을 떠남으로써 그들의 욕망을 멈추게 만들었는데, 싸우기 시작하면 죽고 죽이는 욕망이 계속해서 일어날 것이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욕망을 이해하는 이탁오의 경지가 너무나 놀라웠는데, 이탁오가 강조하는 도의 차원에서 인간의 욕망도 이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손톱만큼도 억울한 일이 있으면 정의의 이름으로 명명백백하게 밝히고 싶은 것이 본질적 욕망으로 생각되고 그러면서도 오히려 도덕적 당위는 또 당위로 가져오는 모순 속에 제가 있는데요, 토론에서도 말했지만 <분서>를 읽으면서 참 부끄러워지는 순간이 많았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 늘 힘들고 부끄러운데 그것이 당당한 삶을 가리고 있는 것 같은데요. 잉여 없는 삶, 다시 남겨 봅니다. 다음 주에도 많은 고민을 가지고 만나보아요
*** 9주차 (11/20) 공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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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책
《분서1》 : 권3 잡술(雜述)
《하버드 중국사 원,명》 : 5~6장
* 과제
- 문학 : 나누고 싶은 문장을 뽑고 자신의 생각을 담아 숙제방에 올립니다.
- 역사 : 연표 정리하여 숙제방에 올립니다.
* 8주차 후기 : 현주샘
순임금이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상과 아버지의 욕망을 그들 자신이 살고자 하는 욕망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너무 손쉽게 깨달을 수 있는 것인 반면 저에겐 다다르기힘든 역지사지의 태도였습니다. 정말 욕망의 경계가 없는 범인으로선 상상하기 어려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