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역 8주차 후기
이지 분서는 유독 읽기가 어려운 책인 것 같다. 한자에 대한 지식도 부족한데다가 공자의 유교 사상에도 눈이 어두운 탓에 이지가 보여주는 공자와, 그의 추종자들 비판하는 지점을 잘 눈치채지 못하기 때문도 큰 것 같다. 책을 깊게 읽기도 어려워 이야기 나누는 시간에 입을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 내가 잘 모르는, 확신이 없는 것에 침묵하는 버릇이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이지에게 벗이란
이번 주 샘들이 가장 많이 뽑아오신 부분은 증계천에게 쓰는 편지였다. 이지가 도를 공부하기 위해 머리 깎고 출가하겠다는 증계천에게 꼭 출가해야만 도를 닦을 수 있는 게 아니라며 다른 길이 있음을 충고한다.
한 번 물어보건대 공은 직접 바리때를 들고 가가호호 돌아다니며 동냥할 수가 있겠는지요?(…)제가 머리를 깎은 이유는 집안의 한가한 자들이 불쑥불쑥 들이닥쳐 나의 귀향을 보채는데다 또 수시로 불원천리하고 찾아와 속세의 일로 나를 압박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왜 꼭 머리를 깎고 출가해야만 도를 공부하게 되는 것이겠습니까? 저는 머리 깎고 출가한 다음부터 도를 공부하기 시작한 사람이 아님을 제발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지<분서1>,한길사, 김혜경, 225~226)
이지의 방식은 가끔 비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비평을 즐기고, 자기 자신마저도 비판하는 이지는, 남을 비판하는 것에도 거침이 없다. 샘들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이탁오가 과연 누군가를 가르치고 교정하기 위해서 쓴소리를 내뱉었을까? 하는 얘기를 나눴다. 누군가를 바꾸고 가르치기 위한 설교는 한계가 있다. 듣는 사람도 기분이 나쁘고, 말하는 사람도 입이 아프다.
이지가 이렇게 말하고,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이때 샘들은 이지가 상대를 바로잡고 변화시키려는 마음보다는, 상대에게 있는 어떤 면들이 또한 자신에게도 존재함을 인지하고 서로 얘기를 나누고 편지를 주고받음으로써 함께 그 점을 고민할 수 있었던 것이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즉, 자타를 구분하지 않는 마음. 너와 내가 다르지 않고 네 문제가 내 문제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경계를 허물고, 사유의 장을 열었다.
이지에게 친우란 무엇이었을까? 샘들과 얘기를 나누며 이지에게 벗은 스승과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내가 깨달은 것을, 나를 이루는 타자들과 함께 나누고, 깨달아 함께 기뻐했으면 좋겠다는 마음. 이는 부처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부처 또한 깨달음을 얻은 뒤 거기서 끝나지 않고 사람들에게 저가 깨달은 바를 전하고 다닌다. 스승이란 거창한 게 아니다. 먼저 깨달은 것을 다른 이들에게 나눔으로써 기쁨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스승이 될 수 있다.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배움과 자기에게 소중한 가치를 나누는 관계는 이상적이다. 오늘날 우리는 스승과 친우를 분리된 개념으로 생각한다. 둘의 차이는 물론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두드러지게는 권위의 차이가 크다. 오늘날 보편적으로 인식하는 스승은 권위의 상징이다. 교탁 위, 칠판 앞에서 학생들을 내려다보고 지시한다. 중학교 때까지 그런 교육을 받고 자랐더니 스승의 상이 굳어졌다.
벗이란 개념도 마찬가지인데 이 개념은 상당히 포괄적이다. 이지의 경우도 10살이 넘는 나이 차이를 넘나들면서 친구를 사귄다. 그러나 오늘날에 벗, 친우라는 개념은 많이 협소해졌다. 글역에서 다룬 책들에서 친구의 개념을 보면 연암도, 돈키호테도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친구의 개념을 뛰어넘는다. 때로는 10살은 거뜬히 넘어갈 정도로 나이를 초월하기도, 고작 몇 달의 시간 동안 영혼까지 나눌 정도로 시간을 초월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게 벗은 한정적이었다. 위의 스승과 마찬가지로, 12년 동안 학교라는 공간에서 동년배와만 교류하며 관계를 쌓기에, 나이 차이가 조금만 생겨도 벗이란 개념과 멀어진다.
어떤 개념을 형상, 구체화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스승이란 개념이 특정한 상으로 굳어지면, 변형의 여지와 자유가 사라진다. 또한 이런 형상화에선 필수적으로 분리가 일어나는데, 여기서 너와 나의 구분이 생기는 것 같다. 이탁오에게 스승은 유동적이며, 오늘날 스승의 개념보다 자유롭고 포괄적이다. 그래서 그는 스승과 벗의 경계를 허물었고, 끊임없이 앎을 찾아 헤매었다. 여기서 앎을 찾아 헤매었다는 말은 이지가 공자 맹신론자들을 비판했던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 시대의 대표 이념인 유교와, 유교를 공부하는 학자들을 자신의 생각은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비판하는 것)
욕망에 대한 견해
이야기 나누는 과정에서, 이지는 글에서 욕망을 알아차리고, 중시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배움을 놓치지 않았다는 말이 흥미로웠다. 욕망과 배움은 일치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라 의문스러웠기 때문이다. 정옥샘이 스피노자 표현을 예시로 들며 설명해 주셨는데 이 말은 정서의 이성화, 이성의 정서화. 즉 내가 느끼는 걸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지점까지 가야 진정한, 나를 떠나지 않는 배움이 된다는 뜻이다. 그 맥락에 따라 보면, 이지는 관념적인 글과 생각을 비판했다. 우리가 언제 관념적이게 되는지를 생각해 보면 비판의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사유, 공부의 과정에서 관념으로 흐른다는 건 내 생각엔 도피나 미끄러짐인 것 같다. 무엇보다 관념에 길들여지는 게 무서운 이유는, 그 편안함과 안락함에 속아서 사고하는 걸 망각하기 때문이다. 보통 욕망은 감추고,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한 게 일반적이라 살아가면서 자기의 욕망이 뭔지 인지하는 게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지는 글역에서 여태 배웠던 자들이 그랬듯이 보편성과 절대성에 돌을 던진다.
확실히 후기를 정리하며 샘들과 나눴던 얘기를 다시 복기하니, 당일에 나누는 것 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떠오른다. <분서>는 읽을 땐 너무 어려워서 대체 내가 뭘 읽는 걸까, 싶은 책이긴 하지만 샘들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그 난해함을 풀어가는 매력이 있는 것 같다. 이게 바로 내가 깨달은 바를 함께 나누며 즐거움을 얻는 과정인 것 같은데 그런 의미에서 누구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말이 다시 한 번 정리된다.
즐겁게 책을 읽고, 그걸 자신에게 비추어보고, 그럼으로써 계속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우리 현주샘이야말로 사우입니다. 매 세미나마다 자신에게 남길 것을 딱 챙기는 모습을 저도 배우고 있거든요. 논술 시험보느라 바쁜 와중에 깔끔한 후기 잘 읽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