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 역사 3-10주차(11/27) 공지
이번엔 <분서> 세 번째 시간으로 권3 잡술편을 읽었습니다. 앞의 두 권의 서간문과 달리 잡술편에서는 이탁오가 자신의 사유를 짧은 글 속에 담아 정리하고 있습니다. 짧은 에세이를 읽는 느낌입니다. 유명한 동심설부터 귀신론 부부론, 고결설, 글쓰기의 모범인 잡설, 허실설, 인물론, 서평 등 마음껏, 명료하게 할 말 다하고 있지요. 이탁오의 글쓰기가 허균에서부터 연암일파에 이르기까지 조선 선비들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했었죠. 그의 글발과 사유를 따라가는 내내 가슴이 뛰었습니다. 너무 많은 이야기가 있어 어떤 것을 잡아도 무궁하게 할 말이 터질 것 같았는데요. 근데 이상하게도 이번 과제는 겹치는 글이 많아 신기했습니다. 다음 권4도 잡술인데 어떤 이야기를 할지 기대가 됩니다.
동심(童心), 선(善)을 가장하지 않는 태도
오늘 토론의 중심은 뭐니뭐니해도 동심설이었죠. 동심이라고 하니까 마치 동심이 어디 있는 것처럼 여겨져, 최소한 동심을 뭐라고 정의하기보다, 어떤 태도인가에 맞추어 토론하고자 했는데요. 진솔함을 잃지 않는 태도, 질문을 통해 계속 낯설게 하기, 동심은 구성되는 것이라는 얘기들이 오고 간 것 같네요. 이탁오가 동심설을 제기하는 배경에는 기존 유학자들의 경직된 해석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습니다. 공맹의 사상을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아 성리학적 해석들에 의존하고 집착하는 유학자들에 대한 비판이죠. 그는 ‘생사’라는 절실한 질문을 들고 치열하게 공부했던 사람이고 15세 때 500편의 과거시험 우수 답안지를 다 외웠다고 하는 수재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가 ‘견문과 도리’가 동심을 가린다고 할 정도니까요. 편지글의 많은 부분이 당대 유명한 유학자 경정향과의 다툼이었던 걸 생각하면, 공자의 사상이 절대화되어 사회적 잣대로 작동하는 것에 극렬한 거부였다고 할 수 있겠네요.
샘은 강의에서 동(童)자를 ‘제멋대로하는 것’이라고 풀이하시면서 동(童)은 아이들의 낭만적 순수성이 아니라 ‘악동’의 이미지라고 하셨는데요. 훨씬 규율을 흩트리는 느낌이 듭니다. 주역에도 동몽, 동관, 동우지곡, 동복 등 이 童자가 많이 나오는데 이런 해석을 해도 재밌겠다 싶었어요. 동심은 道나, 양지(良知), 맹자의 적자지심(赤子之心) 등 뭐라해도 통하는데, ‘동심설’은 바로 연결된 편인 “잡설”의 글쓰기와 연동되어 있는 개념이라고 합니다. 말과 글을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윤색하거나 계산하지 않는, ‘진솔한 마음’(眞), ‘자기 삶을 대면하게 하는 거짓없는 마음’이라고 하셨죠. 이탁오도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성격은 편협하고 자존심은 세고, 언사는 비속하며 마음 씀은 난폭하다, 거기다 행동은 매사 어긋나고 말은 마음과 반대로 나온다”고 말입니다. 이 동심이 글쓰기와는 어떻게 연결될까요?
솔직함이 무기
이탁오의 “잡설”은 글쓰기론이라고 했지요, 성리학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담백한 글을 좋은 문장이라고 본다고 해요. 기질을 다스려 편안하게 만드는 것이 수신의 중요한 부분이니까요. 그래서 자연에 빗대어 마음을 표현하고 말죠. 그런데 이탁오는 지극하게 감정을 표현하고 나서야 그 감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고 봅니다. 좋은 글도 마찬가지로, 일어나는 사건들에 마음이 동하는가 아닌가가 아주 중요하다는 거예요. 이탁오의 유명한 문장 “가슴속에 차마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괴이한 말들이 무수히 있고, 목구멍에는 감히 토해낼 수 없는 말들이 걸려”있다가 글이 되어 토해져 나온다고 하지요. 샘께선 이 부분이 억눌린 정서같은 것이 아니라, 자기를 대면한 만큼, 삶에 진솔해지는 만큼 글이 되어 나오는것이라고 하셨죠. 우리는 왜 자기를 대면하기 어려울까요? 에세이 쓸 때마다 이게 늘 걸리는 부분이죠. 툭 인정하고 가면 될 것을 그게 어렵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은 자기를 알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것을 참기 힘들어서 그런거죠. 올해 만난 작가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이 ‘솔직함’입니다. 마크트웨인의 성급한 자기 기질의 고백, 괴테의 예민한 자기를 고쳐나가겠다는 고백, 연암이 솔직히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 등, 글을 쓴다는 것의 기본은 솔직함이라고 이탁오는 전합니다.
인간의 시작은 부부
주역을 공부하고 있어서인지 이탁오의 ‘부부론’도 무척 재미있었는데요, 이탁오는 부부가 만물의 시초라고 합니다. 주렴계의 태극도설에서는 무극과 태극을 상정하고 하나로 있던 기운이 음양으로 분화되는 것이라 봅니다. 어찌되었든 태극이라고 하는 하나(一)를 상정하죠. 그러나 이탁오는 인간이 생긴 이래로 음양의 두 기운과 부부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하나에서 둘이 나왔다고 하면 그 하나는 어디왔냐고 질문하죠. 애초에 둘이 있었다고 단언합니다. 하나가 아닌 음양은 이질성에 대한 사유이며, 모든 관계는 서로 다른 이질적인 것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샘은 이탁오의 사유를 해석해 주셨어요. 또 이것이 파격적인 것은 성리학에서는 부부가 근본이 아니라 부자, 군신의 위계적 관계를 더 근본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탁오는 당당히 “부부가 있은 다음이라야 부자가 있고, 부자가 있은 다음이라야 형제가 있으며, 형제가 있은 다음이라야 위아래가 있다”고 위계를 재설정합니다. 이런 호전적 사유를 비판하는 유학자들에 대해, 공자님도 당시에는 이단의 사유를 하는 자였다고 당당히 말하고 있습니다. 거침이 없지요. 이탁오의 정기를 받아 우리도 남은 기간, 에세이까지 거침 없는 행보를 해보도록 하죠. 벌써 절기로는 소설입니다. 날이 급격히 추워지고, 일교차는 놀라울 정도인데요. 재순샘 회복되고 있길 바랍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담주에 건강하게 뵈어요.
*** 10주차 (11/27) 공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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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책
《분서2》 : 권4 잡술(雜述)
《하버드 중국사 원,명》 : 7~8장
* 과제
- 문학 : 나누고 싶은 문장을 뽑고 자신의 생각을 담아 숙제방에 올립니다.
- 역사 : 연표 정리하여 숙제방에 올립니다.
* 9주차 후기 : 경희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