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일까.
이탁오가 동심설(童心說)이라고 제목을 붙여 쓴 글이 있다. 그는 이 글에서 뜻밖에도 공부하는 자들이 많은 책을 읽고 의리를 깨우치는 것을 경계하는 듯한 말을 한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도리와 견문이 나날이 쌓이고 아는 바와 느끼는 바가 나날이 넓어지게 되면 또 미명(美名)이 좋은 줄 알고 이름을 드날리려고 애쓰다가 동심을 잃어버리게 되고, 좋지 못한 평판이 추한 줄을 알게 되면 그것을 가리려다 애쓰다 동심을 잃게 된다. 무릇 도리와 견문은 모두가 많은 책을 읽어 의리가 무엇인지 아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옛날의 성인이야 어찌 글을 읽지 않은 적이 있으셨을까! 하지만 공부하지 않아도 동심은 여전히 그대로였고, 설사 많은 책을 읽고 난 다음이라 해도 이 동심을 보호하여 그것이 없어지지 않도록 하셨으니, 보통 공부하는 자들이 많은 책을 읽고 의리를 깨우침으로써 도리어 동심을 가리는 경우와는 매우 다르셨던 것이다. (이지 『분서 Ⅰ』, 한길사, 349쪽)
배움에 한 치의 게으름도 없이 매진하라는 말을 해도 모자랄 판에 도리와 견문을 익히는 것에 제동을 거는 이지의 말 앞에서 우리는 한참을 서성거렸다. 게다가 책을 읽는 것으로 스스로 만족스러워하고 배우고 있다는 것만으로 위안을 얻었던 자족적인 마음이 안일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설마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이 동심을 잃게 하는 것이니 그것을 하지 말라거나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 외에 진실한 인간성이라는 동심에 가 닿을 방법도 알지 못하겠는데 어쩌란 말이지. 책을 통해 익히고 쌓아가는 일이 자못 만족스러웠던 터라 견문과 도리가 동심과 같은 진실한 상태의 마음을 잃게 한다는 말은 스스로의 배움을 점검하게 하는 순간이었다. 이 글을 쓰고 있자니 위의 이탁오의 말이 책읽기에 의존해 자신을 정당화하고 태도에 대한 질책처럼 들리기도 한다.
지난 주에 이 부분을 두고 도그마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라는 말로 이해하기도 했다. 동심을 양지로 본 학인도 있었다. 이때 양지를 열린 자세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역량으로서 추앙하거나 이상화 혹은 절대화하는 것과 대비되는 삶의 태도로 설명했다. 여기서 이탁오가 경계하는 견문과 도리란 규정이나 당위로 작동하는 것들이다. 이 당연하단 전제를 벗어나는 공부란 자기 질문이 수반될 때 가능한 일이 아닐까, 동심을 잃지 않는 차원의 배움은 발심의 차원에서 시작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견도 있었다. 이탁오의 이 말은 공부가 그 자체로 선한 것은 아니며 우리의 공부하는 태도, 공부를 둘러싼 우리 자신의 전제를 묻게 만드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또 하나, 어떤 공부는 오히려 진실한 마음을 잃게 한다면 공부를 끊임없이 많이 한다는 것이 질적 변화를 가능케 하는 충분 조건이 아니란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하지만 이탁오는 동심설에 앞서 잡설(雜說)에서 글을 쓸 때 가슴속에 차마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괴이한 일들이 고여 있어(...) 그런 말들이 오랜 세월 축적되면 더 이상 막을 수 없는 형세가 된다는 말도 했는데... 하지만 역시 어떤 행위의 반복이 저절로 우리가 원하는 것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를 바라는 것은 요행을 바라는 맘이다. 그렇다면 결국 공부를 하면서 저절로 무엇인가 이뤄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공부를 하지 않으면서 성취를 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공부를 하는 것은 공부를 하지 않는 것과는 분명 다르다. 그런가?(갑자기 자신이 없다!) 그것은 경험을 통해 감각적으로 느끼고 있는 바이기도 하고 공부를 하는 것 외에 달리 다른 방도를 알지도 못하겠는 어리석은 자의 간절함이다. 역시 공부에 대한 믿음을 절대시하는 이의 어리석음일까. 공부를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일 때 반복이나 습관의 강화가 아닌 자신의 변화를 수반하는 일이 될 수 있을까.
이 외에도 이탁오가 말하는 글쓰기, 후손없는 이에게 드리는 제사와 귀신, 자신과 친구를 벌레에 빗댄 허물없는 이지의 모습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중 동심설을 두고 나눈 이야기들을 후기로 적어보았다. 어느 때는 이탁오로 어느 때는 이지라 달리 부르게 된다. 이탁오는 공식적으로, 이지라는 호칭은 친밀하게 느껴져 두 개의 호칭이 사용되었다.
난 경희샘 해바라~. 샘의 공부가 어디로 향하는지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쫑끗 세워 노트북에서 볼꺼에요.
해바리아니고 해바라기
자기 변화를 매번 느끼며 공부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공부를 하는 와중에 어떤 순간 달라진 자신을 보게 되는 것 아닐까요? 엄살이 심하신 경희샘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