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간에는 <프루스트와 기호들> 2부의 3장과 4장을 읽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제 2부도 마지막 부분만을 남겨두고 있는데요, 매 시간 들뢰즈가 풍성하게 풀어놓는 이야기를 때로는 즐겁게, 때로는 혼미하게 따라가면서 계속 생각해보게 됩니다. 기호를 포착하고 해석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사물(사건)을 ‘본질을 감싸고 있는 기호’로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매주 모여서 하고 있는 것도 그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이번 토론에서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은 재겸샘께서 후기에 써주신 ‘법’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들뢰즈는 그리스 세계의 법(‘선의 모조품’)과 현대의 법(‘법이 말하는 것이 선’)을 대립시킵니다. 후자의 법은 칸트가 말하는 도덕 법칙, 카프카가 작품에서 보여주는 법과 비슷합니다. 텅 비어 있으며 오로지 형식일 뿐이고, 인식이 불가능하며, 오직 판결과 법칙의 실행을 통해서만 작용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저희는 현대의 법률도 그러하다는 이야기를 나눴는데요, 그러다가 칸트의 도덕 법칙과 현대의 법률은 성격이 다른 것 같은데 여기서 들뢰즈가 말하고 있는 법이 무엇인지 조금 혼란스러워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역자의 설명을 보니 정리가 되네요.
역자에 따르면 여기서 ‘법’이라고 번역한 ‘loi’는 여러 가지를 의미합니다. 형이상학적 의미의 원인과 결과로서의 법칙, 도덕 법칙, 카프카 소설에 빈번히 출현하는 사법적인 의미의 법률 등... 들뢰즈는 ‘선’과 ‘법(혹은 법칙)’의 관계에 대한 논의를 여러 저작, 여러 맥락에서 반복하고 있는데, 이때 이런 다양한 종류의 법을 ‘동류’로 취급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관심은 그런 법들의 구체적인 의미가 아니라 법 일반의 성격과 그것이 행사되는 원리를 규명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들뢰즈는 이 책에서도 그런 법들의 공통적인 면, 다시 말해 내용은 없고 형식만 있는 법, 그로써 무시무시한 통일성을 얻게 된 법, 그리고 무엇보다 ‘작동’하는 법에 관해 말하고자 한 것 같습니다. 저희가 마지막에 다다랐던 결론처럼요.
그런 면에서 법은 ‘기계’와도 같습니다. ‘기계’는 들뢰즈의 중요한 철학적 개념 중 하나인데요, 뭔가를 ‘기계’로 규정한다는 것은 그것의 의미가 아니라 사용의 문제를 다루겠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작동하는 것’으로 보는 거죠. 프루스트는 자신의 책을 ‘일종의 확대경’으로 보았고, 독자들이 자신의 책을 이용해서 각자의 내면을 읽어내길 바랐습니다. 들뢰즈는 그의 작품이 확대경과 같은 기구일 뿐 아니라 ‘기계’이기도 하다고 말합니다.
“어째서 [<찾기>가] 기계인가? 그것은 기계로서 이해된 예술 작품은 본질적으로 생산자, 어떤 진리들의 생산자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생산되는데, 우리 안에서 작동하는 기계들의 영역을 통해 생산되고, 우리의 인상으로부터 추출되어 우리 삶 속에 새겨지며 또 작품 속으로 흘러들어 간다. 이 점을 프루스트보다 더 강조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런 이유로 프루스트는, [새롭게] 생산되지 않고 그저 발견된 상태 그대로 있거나 혹은 [로고스가] 창조해 준 상태 그대로 있는 진리에 대해서는 기를 쓰고 거부한다. 또한 지성을 앞에 내세우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미리 전제한 사유 형태도 거부한다.” (230쪽)
재겸샘이 써주신 것처럼 들뢰즈는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새로운 사유의 이미지를 탐구합니다. 1부에서는 기호를 통해 강요되는 사유, 기호를 설명하고 전개하고 해독하고 번역하는 순수한 창조로서의 사유에 관해 이야기했지요. 2부에서는 예술 작품과 기계를 통해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사유의 이미지를 보여줍니다. 이제 마지막 부분이 남았는데요, 마지막까지 읽고, 지난 시간에 못다 나눈 이야기도 함께 나누고 나면, 머릿속에 마구 엉켜 있는 내용들이 좀 정리가 될까요?
다음 시간에는 <프루스트와 기호들> 5장과 결론을 읽고 내용을 정리해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영임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수요일에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