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프루스트와 기호들>을 다 읽었습니다! 앞의 세부적인 내용들은 이미 가물가물해졌지만, 들뢰즈가 보여주려고 했던 사유의 새로운 이미지, 특히 기호와의 마주침으로 강제되는 사유의 이미지, 운동하고 생산하는 사유의 이미지만은 분명하게 남는 것 같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2부의 마지막인 5장과 결론을 읽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지난 시간에 나누지 못한 4장의 ‘기계’ 이야기를 먼저 조금 나눴는데요, 들뢰즈는 프루스트의 작품에서 세 가지 기계가 작동하고 있음을 보았지요. 세 가지 영역에서 세 가지 기계가 작동하며 부분적 대상들, 공명의 효과들, 강요된 운동들을 생산하고 이것이 책이 됩니다. 5장에서 들뢰즈는 이러한 생산을 ‘문체’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문체’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문체, 즉 그 작가의 글임을 단박에 알아볼 수 있게 하는 독특한 표징으로서의 문체와는 조금 다릅니다. 프루스트 역시 누구 못지 않게 독특한 구문과 어휘를 구사하는 작가였다고 하는데요. 들뢰즈가 여기서 말하는 문체는 오히려 ‘비문체(non-style)’에 가깝습니다. 작품에 논리적 통일성이나 유기적 전체성을 부여하는 것으로서의 문체가 아니라, 오히려 그런 것들을 파괴하는 것으로서의 문체, 문장 내부에서 문장에 대한 관점을 무수히 증식시키는 것으로서의 문체를 뜻합니다.
들뢰즈는 이런 문체를 ‘기호들의 펼침’으로 설명합니다. 기호들은 자신의 고유한 연상의 사슬들을 펼치면서 서로 다른 속도로 전개됩니다. 그 과정에서 관점들은 해체되고 증식되며 무한한 계열을 이루면서 공존하고, 그 관점들을 따라 대상은 해체되거나 서로 공명하고 확장됩니다. 그러므로 작품에 통일성을 보장해 줄 수 없습니다. 통일성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술 작품의 형식적 구조’뿐입니다. 들뢰즈는 프루스트 작품에서 보여지는 ‘횡단적 차원’을 그 예로 들지요.
앞 장에서 보여주었던 기차 여행 장면처럼 횡단성은 각각 고유한 차원을 따르는 관점들을 서로 소통하게 해주지만 이 관점들을 단일화하지 않습니다. 이런 횡단성의 통일화는 프루스트의 작품 내부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들뢰즈는 설명하는데요, 한 예술 작품이 독자와 소통하고 독자에게 무언가를 연상시키는 것도, 한 작품이 동일한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 소통하고 그 작품들을 연상시키는 것도 횡단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요즘 영화를 보면서 기호를 떠올리고, 사방에서 기호를 찾게 되는 것도 횡단성의 한 예라는 얘기죠.ㅎㅎ
결론에서 들뢰즈는 프루스트의 작품에는 ‘화자가 있다기보다 기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주인공이 있다기보다는, 어떤 사용 혹은 어떤 생산을 위해서 어떤 구성 혹은 어떤 분절의 방식을 따라 기계가 작동하게끔 해주는 기계의 배치가 있다”(276쪽)고 합니다. 그러면서 화자를 ‘기관들 없는 신체’ ‘거미’에 비유합니다. 소설은 지금 짜여지고 있는 거미줄 자체이고, 각각의 거미줄들은 이런저런 기호들이 건들여 줄 때 진동합니다. 거미줄과 거미, 거미줄과 신체는 하나의 동일한 기계입니다. 화자는 뛰어난 능력들을 가졌지만 그것들을 자발적이고 조직적으로 사용할 수 없으므로 화자에게는 기관이 없는 것과도 같습니다. 하나의 능력은 강요될 때에야 비로소 화자 안에서 실행되며 ‘강도 높은 미약한 싹’으로서의 기관이 됩니다. 이 싹은 거미줄에 와서 부딪히며 파동을 일으키는 기호들로 인해 깨어납니다. 그렇게 감수성, 기억력, 사유를 작동시키고, 화자라는 ‘신체-거미’는 강도 높은 힘으로 변형을 이루어나갑니다.
들뢰즈가 맨 마지막에 보여주는 이 이미지는 이후 작품과도 연결되는 듯한데요, 세미나에서는 시간이 없어서 얘기를 나누지 못했지만, 강요에 의해 사유가 시작되고 그것으로 변형을 이루어나가는 배움의 과정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이렇게 또 한 권을 마무리하게 되었네요. 비교적 수월하게 읽혔지만 결코 만만하지 않았던 만큼 강의가 매우 기대됩니다.^^
다음 주 세미나는 화요일(9.6) 7시에 진행됩니다. 채운샘의 강의가 있습니다. 간식은 영임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다음 시간에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