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저와 전혀 접점이 없을 것 같은 책이었지만, 들뢰즈와 나들이 세미나 덕분에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실 세미나를 하면서도 저 소설을 읽진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했는데요. 이번 주 강의에서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함께 읽고 보니 역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만 죽는 순간까지도 글을 고쳤고 마지막 권을 쓰면서 첫 부분을 다시 썼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알 수 없는 존경심이 들었습니다.
들뢰즈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작품이 일종의 파편들이자 기계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있는 <프루스트와 기호들>조차도 파편적인 텍스트였습니다. 1부는 63년에, 2부는 70년에 쓰여진 논문들에 기초하며, 나중에 장들이 나뉘고 수정되고 증보되면서 76년에 출판되었다고 합니다. 그 안에 가타리를 만나 <앙띠오이디푸스>와 <천개의 고원>이 출간되었고, 거기서의 문제의식이 녹아들었다고 하죠. 들뢰즈가 이토록 오래도록 붙들고 있던 기획은 없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프루스트라는 작가-수련가의 영향을 받았던 것일까요?
고진감래같은 채운샘의 두 번의 강의가 있었습니다. 들을 땐 무척 강렬했는데, 메모를 다시 보니 웬 상형문자들이 많네요... 그것들을 기호로 삼아 제게 남은 것들을 멋대로 정리해보겠습니다.
앙띠 로고스와 바깥의 사유
들뢰즈가 프루스트로부터 뽑아내는 키워드 하나는 ‘앙띠 로고스’입니다. 로고스 중심주의에 반해 어떻게 사유의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낼 것인가? 진리/진실(truth)가 저 너머에 있고, 그것을 찾아내고 거기에 도달하는 것이 철학하는 자의 임무라는 생각은 그리스 철학의 오랜 전통이었습니다. 그 여정에서 우리가 이용해야 할 능력이 바로 로고스(이성/지성)이라는 것이죠. 들뢰즈는 어떻게 이와는 다른 밑그림 속에서 사유를 전개할 수 있을지, 절실히 묻고 있는 것이죠. 그런 그에게 스승 혹은 선구자로 보였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정통 철학에서 바깥에 있는 자들, 한마디로 ‘사파’였습니다. 들뢰즈는 철학사 속에서 빗겨나 있는 일종의 이단들에 주목해왔습니다. 그 중 20세기의 인물들로서는 니체, 블랑쇼, 바따이유 등이 있지요. 그들은 이성, 주체, 진리, 의식이라는 구도의 외부를 사유했다고 합니다.
‘바깥의 사유’는 생각이라는 것이 어떻게 발생하는가를 묻습니다. 우리의 사유는 대부분 습관입니다. 경험들에서 관념을 형성하고 인과관계를 설정해 세상을 분절해서 바라보지요. 형성된 개념들과 대응되는 것을 연합하면서 결과로부터 원인을 추측합니다. 결국 인과론에 바탕해 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사실상 굉장히 자의적이죠. 그런 이상 생각은 많이 하더라도 생각이 발생하진 않습니다. 생각의 발생은 인과율의 균열과 함께합니다. 봄이 왔는데, 꽃이 안 핀다?! 평생 성인처럼 착하게만 산 사람이 계속 불운하고 결국 벼락 맞아 죽는다고?! 저런 짓을 하는 것도 인간일 수 있다고?! 우리가 이해할 수 있고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무언가를 강렬히 경험할 때 사유는 시작됩니다. 그렇기에 ‘바깥의 사유’는 인간이 가장 인간적이지 않게 되는 경험영역들, 이를테면 죽음, 성, 폭력, 타자 등의 금기에 주목하며 시작하기도 합니다. 인간의 코드 바깥, 일종의 괴물성, 사유하기가 어려운 것, 폭력적 경험에서 비로소 ‘발생’하는 사유에 주목하지요.
인간은 아무 때나 사유하지 않습니다. 혁명의 시대, 소용돌이, 오작동 등 인간의 정신을 고장 내는 ‘사건’이라는 불연속점과 더불어서야만 ‘이대로 살아도 좋은가’하는 질문이 절실히 떠오르게 됩니다. 이 질문을 계속 극으로 몰고 가면 인간 안에서 인간이 아닌 비인간, 동물, 식물, 괴물의 형상이 발견됩니다. 이것은 ‘바깥’이지만 내재하는 바깥이고 찾아내어지는 본질이지요. 이 기이한 본질을 직면하는데서 사유가 시작됩니다.
예술이 중요한 이유는 이와 같은 사건적인 경험을 주목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익히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려고 예술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소비에 가깝겠죠. 예술은 재현이나 로고스와는 다른 지평에서 작동합니다. 세상의 어떤 부분을 지금까지처럼은 볼 수 없게 만들죠. 시선을 끊임없이 ‘바깥’으로 내모는 동시에 그것들을 혐오가 아닌 긍정할 만한 뭔가로 만드는 작업이 예술과 더불어 일어납니다.
통일성과 횡단성
<프루스트와 기호들>의 1부를 관통하는 질문은, 프루스트에게서 이끌어낼 수 있는 통일성은 무엇일까?라고 합니다. 부분들이 파편적이고 별로 소통되지 않기에 전체를 아우를 통일성 같은 건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를 두고 전혀 통일성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여전히 유기체적으로 혹은 로고스적으로 보는 태도인지도 모릅니다. 들뢰즈는 프루스트는 통일성이라는 문제를 하나로 요약되는 성격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에서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이는 곧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다시 보는 일이죠. 예를 니체의 1881년 유고(<칭찬이나 비난에서 자유로워지기>)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나는 잊어버리고 우산을 가져오지 않았다.”(12[62]) 앞뒤로 심오한 구절들이 있어서 더욱 뜬금이 없지만 스스로 자기 철학이라고 정리한 글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이 메모는 어떤 철학적 의미가 있는 걸까요? 우리는 이 엉뚱한 조각을 니체라는 사람의 사상에 걸맞게 해석해야 할까요? 아니면 완전히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해 배제해야 할까요? 작은 파편과 그 사람 전체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어쩌면 이질성을 배제하는 전체로서의 통일성이라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인지적 허구는 아닐까요?
들뢰즈는 전체나 ‘일자’를 연상시키는 통일성과는 전혀 다른 통일성 개념으로서 ‘횡단성’을 제시합니다. 횡단성은 위계나 통제를 내포하는 ‘수직적 구조’와 마구잡이와 무작위를 의미하는 ‘수평적 구조’ 모두를 가로지르는 개념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리좀이라고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수직과 수평을 관념적으로 생각해서 서로 위배되고 대립되는 것으로 여깁니다. 자유/통제, 개인/사회라는 식으로요. 하지만 둘은 대립되지 않으며 접속하고 함께 진동합니다. 개인에 대립되는 사회는 환상이고, 그 역도 마찬가지입니다. 니체의 표현대로 개체는 삶이 자신을 펼쳐내는 렌즈-관점입니다. 그것은 환원불가능한 운동과 정지의 비율을 갖지요. 삶은 그런 개체들의 만남-연결들로서만, 통합되지 않은 채 영위되어가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다양한 관점들의 소통과 접속이지요. 접속은 무턱대고 하는 게 아닙니다. 독과의 접속의 결과는 파괴이지요. 물론 파괴라는 결과와 더불어 그것이 독이 되는 것이지만요. 아주 신중하게, 접속하는 그것이 날 기쁘게 하고 강하게 할 수 있는가를 실험하는 것이 윤리가 됩니다. 그것이 배움의 과정이요, 기호해석의 과정이라고 합니다. 달리 말하면, 파편들을 현재의 생산 속에서 소통하게 하기. 프루스트는 이것을 시간의 ‘되찾음’의 여정으로 보여줍니다.
자기 자신을 읽기 / 시간을 되찾기
“나의 책은, 콩브레의 안경점 주인이 손님 앞에 내놓는 확대 유리알과도 같이 일종의 확대경에 지나지 않아, 나의 책은 그 덕분에 그들 자신을 읽는 방편을 내가 제공해주는 구실을 한다.”(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2권 148쪽)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읽는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입니다. 프루스트의 책도, 들뢰즈의 책도, 우리가 마딱드리는 어떤 경험도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서 어떤 해석이 일어나고 어떤 화학작용이 일어나는가 하는 ‘작동’만이 중요합니다. <프루스트와 기호들> 2부를 관통하는 질문은, 기호는 어떻게 작동하는가/문학은 무엇을 어떻게 생산하는가?라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작품이라기보다는 기계입니다. 완결된 짜임이라기보다는 움직이고 재해석되는 작동인 것이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기억이나 회상이 아닌, 시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책은 시간이 연속되어 있다는 전제에 반합니다. 시간에 대한 전혀 다른 이미지화가 이뤄집니다. 빗장이 풀린 시간은 파편적이고, 튀어오르듯 발생하고 종합될 뿐입니다.
감각적 기호들은 파편 같은 과거가 사라져버리는 게 아니라 지금 순간과 공존(coexist)하고 공명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비자발적인 기억을 일으키지요. 여기서는 잃어버린 시간들이 재료가 됩니다. 그로부터 주목하게 되는 것은 지금의 현존이지요. 그것을 다른 각도에서 보게 됩니다. 그런 기호들은 기차에 차창에 비친 원경처럼 얼핏얼핏 파편적으로 찾아옵니다. 비자발적인 기억은 공명을 일깨워주긴 하지만 의존적이고 또 금방 사라집니다.
그것들을 이어주고, 계속해서 생산하게 해주는 것은 바로 예술입니다. 시간을 되찾는 문제는 흩어지고 소모된 것 같은 시간들을 허무로 잠기게 하지 않고, 끌어내어 공명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어떤 끈으로 그것들을 이을 것인가? 화가는 색으로, 음악가는 엑센트로, 작가는 문체로서 그것을 꿰어냅니다. 찾기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채운샘께서는, 우리가 멍하니 있다가 ‘으악’하고 죽지 않으려면, 예술에 준하는, 죽음이 함축하는 삶을 공명시키는 일을 해가야 하나고 하셨습니다. 이어 붙이려는 수련만이 죽음 앞에 설지라도 시간을 되찾게 한다고 말하셨습니다.
주절주절 후기를 마칩니다. 멋대로 이해한 부분, 재미난 부분, 여전히 막힌 부분들이 많지만 아쉬운 대로 잃어버린 채로 두고 나중에 또 되찾아보기로 하겠습니다ㅋㅋ. 들뢰즈와 나들이팀의 좌충우돌 세미나 아주 좋네요! 이제는 베르그송 형님이 기다리고 계시니 새로운 설렘이 차오릅니다. 시간에 대한 아리송함을 좀 더 강화해볼 수 있기를!
다들 프루스트-들뢰즈는 수월했다고 하셨는데 저는 내내 텍스트가 붙지 않아 힘들었거든요. 강의에 보충강의까지 들으면서 뒤늦게 삘 받아서 <잃어버린 시간>책까지 사버렸는데 언제 읽을지...ㅋㅋ
생각해보면 살아간다는 것이 수많은 시간의 파편들을 잃고 잃는 과정인가 봅니다. 허나 이들을 조각들로 파편들로 쓸모 없이 허망하게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결심을 해버리는 것, 그래서 어떻게든 잘 꿰어서 누더기가 되든 완성하다 말든 옷 한벌로 만들어보려고 이리저리 애를 쓰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고 전부가 아닐까란 말이 깊은 여운이 남네요. 후기 잘 읽었습니다!
고진감래 같은 강의ㅎㅎ 잘 정리해주셔서 감사요 샘!
프루스트는 텍스트도 강의도 정말 흥미롭고도 어려우면서 생각할 거리를 넘나 많이 남겨주네요.. 넘 좋았어요!!!
이제 만나게 될 베르그손 형님과의 만남도 기대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