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스트와 기호들>에 대한 채운샘의 강의가 두 번에 걸쳐 진행되었습니다. 원래 한 번으로 계획되어 있던 강의였는데, 조금이라도 더 알려주시려는 채운샘의 열의와 조금이라도 더 들으려는 나들이팀의 극성 덕분에 연휴 마지막 날 다시 한 번 규문에 모여 강의를 들었습니다. <프루스트와 기호들>은 지금까지 읽어온 텍스트들과는 또 다른 즐거움을 주었는데요, 사유와 배움, 기호, 시간과 같이 우리 삶과 밀접하게 느껴지는 내용들이어서 더 그랬던 것 같습니다. 채운샘께서도 그 내용들을 중심으로 정리해주셨어요.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들뢰즈가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내용 중 하나가 ‘사유’에 관한 것입니다. 작년에 <차이와 반복>(1968)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 중 하나이기도 한데요, 그 책에서 들뢰즈는 우리가 사유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존의 이미지가 얼마나 오류인지 밝히면서 사유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시도는 사실 그의 두 번째 저작인 <니체와 철학>(1962)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칸트의 ‘숭고’를 거쳐서 프루스트에서 좀더 본격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사유’라고 하면, ‘진리를 향해가는 것’, 좀더 구체적으로는 ‘주체가 이성(로고스)를 통해서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때의 사유는 우리 경험의 테두리 안, 다시 말해 안온한 경계 안쪽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자의적인 방식으로 인과를 짝지우고, 그런 방식으로 돌아가는 것이 세계라고 동일시해버립니다. 하지만 들뢰즈에 따르면 그건 사유가 아니라 ‘재인(再認)’에 불과합니다. 그런 재인이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러야 비로소 사유가 시작됩니다. 그런 순간을 ‘마주침’이라고 부르는데요, 칸트의 ‘숭고’ 체험에서처럼 잘 작동되던 인식능력들이 오작동을 일으키는 순간을 말합니다. 채운샘께서 이번에 들어 주신 예가 확 와닿았어요. 봄이 왔는데 꽃이 안 핀다든가 아침에 동쪽에서 해가 안 뜬다든가 하면 우리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지요. 이처럼 우리 인과율, 코드, 인지 메커니즘, 일상의 리듬에 균열을 내는 ‘사건’을 만날 때 우리는 비로소 경계 바깥을 사유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바깥을 사유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라고 채운샘께서는 설명하셨어요. 예술은 로고스 중심적인 세계 안에서 작동하는 게 아니라 그 한계까지 밀고나가서 ‘사건적인 것’을 보여주려 한다고요.
그리고 이런 ‘마주침’은 ‘기호’이기도 합니다. 세미나 시간에도 기호가 무엇인지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요. 저희는 ‘기호’라는 말 때문에 자꾸 어떤 ‘대상’으로 생각하게 되었지요. 채운샘은 기호가 대상도 주체도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 번 짚어주시면서, 기호란 해석해야 될 것으로 나타나는 것, 한마디로 ‘기호는 마주침’이라고 정리해주셨어요. 그것을 해석한 결과로 생산되는 것이 ‘의미’입니다. 우리 자신도 그렇게 생산되는 의미라고 할 수 있고요. 이처럼 ‘기호와 그 기호들로 인해 펼쳐지는 의미들’이 바로 ‘세계’이므로, 어떤 기호를 만나 어떻게 해석해내느냐에 따라 우리는 다른 세계에서 다른 존재로 살아가게 됩니다.
<프루스트와 기호들> 2부에서 들뢰즈는 기호를 해석하는 문제보다 어떻게 작동하는지의 문제에 더 초점을 둡니다. 통과 관처럼 파편으로 존재하는 기호들을 어떤 방식으로 연결하여 작동하게 하느냐, 무엇을 어떻게 생산하느냐의 문제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문학을 ‘작품’이 아닌 ‘기계’로 보고, ‘문학은 무엇을 어떻게 생산하는가’를 묻습니다. 그러한 관점에 따르면 저자는 작품을 구상하고 실현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기계를 구성하는 하나의 부품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독자에게 무엇을 생산하느냐 입니다. 독자가 그 통과 관으로 이루어진 작품을 어떻게 새롭게 연결하여 작동하게 하느냐. 독자는 그렇게 작품 자체를 재생산하게 됩니다.
프루스트의 작품에서 파편들을 소통시키는 문제는 ‘시간’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프루스트는 작품 속에서 시간에 관한 일반적인 관념,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흐른다’ ‘시간은 연속되어 있다’는 관념을 흔들어놓습니다. 시간의 문제 역시 세미나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주제이기도 한데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모든 것은 파편으로 존재하고 그것을 소통시키는 것이 관건입니다. 저도 모르게 떠오르는 ‘비자발적인 기억’은 이처럼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는 차원이 없어진 게 아니라 지금의 순간과 공명하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하지만 곧 사라져버리지요. 이것들을 이어주고 공명하게 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채운샘께서 설명해주셨는데요, 그렇게 공명하는 시간이 프루스트가 말한 ‘되찾은 시간’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고 싶다면, 모든 시간을 그냥 흘러가게 두고 싶지 않다면, 우리는 ‘공명’에 준하는 걸 해야한다고 하셨어요. 내가 함축하고 있는 시간들을 어떤 식으로 펼쳐내고 공명하게 할 것인가... 우선은 자신에게 해석을 강요하는 기호들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한계까지 사유를 밀어붙여보는 연습을 하는 것이 시작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이렇게 <프루스트와 기호들>을 마무리하고 이제 베르그손을 만나게 되네요. 프루스트와 어떻게 크로스될지 기대도 되고요. 또 부지런히 읽어나가야겠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14장 ‘베르그손에게 있어서의 차이의 개념’을 읽고 내용을 정리해옵니다. 간식은 규창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그럼, 다음 시간에 뵈어요!
작년에 그리 아등바등 차이와 반복을 읽었던 것이 점점 더 위로받고 있는 요즘입니다. 내가 이런 것들을 맛보려고 그랬구나 싶어요. ㅋㅋ 작가든 독자든 모두 작품을 작동시키는 기계라는 것, 우리의 사유는 직선적 시간선이 아니라 끊임없이 갈마드는 여러 시간의 흐름 속에서 꽃피울 수 있다는 것, 그리하여 우리는 기계로서 어떤 세계에서도 살아갈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 말로 하니 참 납작해지는데, 뭉클함이 느껴졌습니다.
다만, 여전히 들뢰즈의 사유는 어렵기 때문에 무의식 어디 한 켠에 새겨져 있다가 언젠가 비자발적으로 툭 튀어나오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어요. 흠흠. 어쨌든 나들이팀이 점점 더 흥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