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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minar Bo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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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부터 들뢰즈의 「베르그손주의」로 들어갔습니다. 제1장과 제2장은 저희가 계속 궁금했던 직관과 지속에 관한 내용입니다. 들뢰즈는 저번 주에 읽었던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의 제14장 <베르그손에게 있어서의 차이의 개념>에서 베르그손의 철학을 차이에 관한 철학이자 차이의 실현에 관한 철학으로 정의를 내렸는데요. 이와 함께 사물은 사물 자신의 원인들에 앞서서 오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는 사물 자체로부터 출발해야 하며, 왜 사물이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것인지를 이해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습니다. 여기에서 사물 자체란 이데아, 물자체 같은 것이 아니라 사물의 차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가장 먼저 직관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는데요. 직관은 우리가 생각하는 영감, 느낌, 촉 등과 같은 걸로 오인하기 쉽고, 우린 이런 방식으로 직관에 대해 접근하게 됩니다. 직관은 베르그손의 철학적 방법입니다. 베르그손은 직관이 자신의 철학을 규정하는 방법 중의 하나로 이를 너무 강조하지 않을 것을 요구했었다고 하네요. 직관은 그가 철학을 하는 중요한 방법이지만 이것이 본질적 요소인 것은 아닙니다. 베르그손은 자신의 철학은 지속의 철학이지 직관의 철학이 아니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어쨌거나 베르그손의 철학을 알기 위해서는 직관이라는 방법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것 같아요. 직관이라는 방법이 없었다면, ‘지속’, ‘기억’, ‘생의 약동’이라는 관계 자체도 인식의 관점에서 규정되지 않은 채 남아있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습니다.
“직관은 베르그손주의의 방법이다. 직관은 느낌도 영감도 아니고 막연한 공감도 아니다. 그것은 공들여 만든 방법이며, 철학에서 가장 공들여 만든 방법의 하나다. 직관에는 엄격한 규칙들이 있으며, 이 규칙들은 베르그손이 철학의 ‘정확함’이라 부른 것을 구성한다.”
(「베르그손주의」 제1장 11p)
베르그손이 공들여 만든 직관에는 규칙이 있습니다. 직접적 인식을 가리키는 직관이 어떻게 방법을 형성할 수 있었나라는 질문이 드는데요. 베르그손은 직관을 단순한 행위(?)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단순성은 질적·잠재적 다양체를 배제하지 않으며, 그것이 자신을 현행화하는 다양한 방향을 배제하지 않는 걸 내포합니다. 단순하다면 단순하고 복잡하기로 말할 것 같으면 엄청나게 복잡하고 다양한 직관의 단순성인데, 들뢰즈는 직관의 단순성이 살아 낸 행위라는 걸 알아야 한다고 말하네요. 직관은 우리의 삶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와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들죠. 방법으로서의 직관은 5가지 규칙이 있는데, 제1장에서는 3가지 규칙 위주로 얘기합니다. 첫째 규칙은 문제의 설정 및 창조와 관련되고, 둘째 규칙은 본성의 진정한 차이들의 발견과 관련되며, 셋째 규칙은 실재하는 시간(진짜 시간)의 파악과 연관됩니다.
“첫째 규칙 : 맞고 틀리고의 시험을 문제들 자체에 두고, 가짜 문제를 고발하고, 진실과 창조를 문제의 층위에서 화해시켜라.”
(「베르그손주의」 제1장 13p)
우리는 문제의 정답을 찾는 데에 익숙합니다. 지금도 이게 맞냐 틀리냐에 집중하고, 해석을 할 때에도 존재하지도 않는 정답을 쫓습니다. 이는 예속상태에 갇혀 있는 것으로 교육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린 선생님이 낸 질문에 답을 내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이죠. 학교뿐만 아니라 회사 등에서 일을 처리할 때도 일을 지시한 사람이 원하는 답에 맞추고자 합니다. 그런데 들뢰즈는 말합니다. 참된 자유는 문제 자체를 결정하고 구성하는 능력에 있다고. 철학을 포함하여 모든 것에서 문제를 푸는 것보다 문제를 발견하고 그 결과 문제를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사변적인 문제는 잘 설정되자마자 풀려버리기 때문이죠. 그 동안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맞고 틀리고의 시험에 대해 답을 내고 문제의 진위를 정의하는 데에 만족했을 뿐 문제 자체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가짜 문제’가 판을 치게 된 거죠. 가짜문제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①‘더’와 ‘덜’의 혼동을 내포한 ‘없는 문제’, ②잘못 정립된 문제로 구분됩니다. 첫 번째 유형으로는 비존재, 무질서, 가능에 관한 문제, 두 번째 유형으로는 자유의 문제, 강도의 문제를 들 수 있습니다. 전자에서는 존재, 질서, 실존물이 원초적이라고 상정된 비존재, 무질서, 가능성 속으로 자기 이미지를 역투사하면서 자신을 창조적 행위보다 더 먼저라고 여기도록 하는데요. 그는 여기에서 가짜 문제의 원천인 모든 부정의 형식에 대해 비판합니다.
한편 잘못 정립된 문제는 다른 매커니즘을 개입시키는 것과 같은데요. 잘못 분석된 복합물에 관한 것입니다. 예컨대 행복이 쾌로 환원되는지와 같은 걸 들 수 있는데, 행복이나 쾌는 환원 불가능한 매우 잡다한 상태들을 아우르고 있기에 이는 잘못 정립된 문제죠. 이와 같은 가짜 문제라는 개념 자체는, 우리가 단순한 오류들(틀린 답)과 싸워야 하는 게 아니라 더 심오한 어떤 것들과 싸워야 한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들뢰즈는 우리에게 익숙하고 우리의 조건과 분리 불가능한 가상과 싸워야 한다고 말하면서 더와 덜의 견지에서 생각하는 경향성에 대한 비판을 하기 위해서는 직관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둘째 규칙 : 가상과 싸우고, 진짜 본성의 차이들 또는 실재의 마디들을 재발견하라.”
(「베르그손주의」 제1장 21p)방법으로서의 직관은 나눔의 방법이라고 합니다. 이건 또 뭔소리일까요?^^ 베르그손에 따르면, 복합물을 자연적 마디들에 따라 나누는 것, 다시 말해 본성에 있어 차이가 나는 요소들로 나누는 것이 언제나 관건이라고 합니다. 앞에서 우리는 복합물을 잘못 분석한다고 얘기했었는데,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지며 우리가 살아내는 복합물들 속에서 본성에 있어 차이 나는 것을 발견하는 법을 모릅니다. 질적이며 질이 있는 경향성들에 따라, 지속과 연장된 것을 조합하는 방식에 따라, 복합물을 나누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에서는 양적으로 나눴던 방식들, 예를 들어 공간화된 시간에서 정도의 차이(ex: 1시간을 60분, 3,600초로 나누는 것)로 보는 것은 잘못 나눈 것입니다. 베르그손은 본성의 차이가 있는 곳에서 정도의 차이만을 보아왔다고 말합니다.
“셋째 규칙 : 공간보다는 시간과 관련하여서 문제를 정립하고 또 해결하라.”
(「베르그손주의」 제1장 34p)이 규칙이 직관의 근본적인 의미를 제공한다고 하는데요. 직관은 지속을 상정하며, 지속의 견지에서 생각하는 데서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성의 차이들을 규정하는 나눔의 운동으로 돌아감으로써만 직관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운동이 구체적으로 뭔지 와닿지 않아서 그런지 여전히 직관은 어렵네요. 지속과 관련되어 흔하게 예로 드는 것이 설탕물인데요. 설탕이 처음에는 고체였지만 물과 만난 후 시간이 걸려서 설탕물이 됩니다. 용해과정에서 설탕의 다른 사물들과 차이뿐만 아니라 설탕 자신과 차이가 나는 걸 보여주는데요. 지속은 본성의 차이들의 장소, 환경이며, 본성의 차이들의 집합이자 다양체입니다. 즉 본성의 차이들은 지속 안에서만 존재합니다.
앞에서 하나의 복합물을 두 개의 절반으로, 혹은 몇 개의 선들에 따라 나누는 내용을 다뤘는데, 정작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좋은 것을 선택할지 아는 일입니다. 왜 이쪽이 아니라 저쪽에 있을까? 나눔의 방법으로만 끝났다면 매개념을 결여하고 있고 여전히 영감에 의존하고 있다는 이유 등으로 비난을 받을 수 있었으나, 베르그손은 시간 속에서의 운동을 통해 난점을 해결합니다. 하나의 복합물을 두 개의 경향성에 나누었을 때 그중 한 경향성만이 한 사물이 시간 속에서 질적으로 변하는 방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지성과 본능 두 개의 경향성으로 나누고 지성이 시간 속에서 계속 변한 것을 예로 들 수 있겠죠. 들뢰즈는 직관이 지속 자체는 아니지만, 우리가 고유의 지속에서 빠져나오게 해주고, 우리의 위나 아래에 있는 다른 지속들의 실존을 긍정하고 인정하기 위해 우리의 지속을 이용하도록 해주는 운동이라고 말합니다. 직관을 통해 실재론, 관념론도 넘어갈 수 있고, 모든 열등하고 우월한 객체들의 실존을 긍정할 수 있습니다. 베르그손은 질적 차이들을 녹여버리는 일반관념, 본성의 차이들을 파악할 수 없게 된 조건들 속에서 직관을 통해 새롭게 문제를 정립했던 것 같습니다.
직관과 함께 2장의 주제인 다양체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눴는데요. 「천개의 고원」에서도 다양체가 나왔었고, 다양체라고 하면 뭔가 복잡하게 구성된 기하학적인 공간이나 산해경에 나오는 괴물같은 형체를 상상하게 되는데요. 아마도 각자 표상되는 다양체가 있을 듯합니다.^^ 들뢰즈에 따르면 두 유형의 ‘다양체’가 있는데, 첫 번째 유형은 공간으로 표상된 수적 다양체, 이산적 다양체이며, 두 번째 유형은 순수 지속에서 제시되며 수로 환원될 수 없는 잠재적이고 연속적인 다양체입니다. 주의해야 할 점은 이 다양체가 ‘여럿’이나 일반이라는 철학적 관념에 대응하는 모호한 실사가 아니며, ‘여럿’을 ‘하나’에 대립시키지 않고 두 유형의 다양체를 구별한다는 것인데요. 두 유형의 다양체가 대립하는 관계를 형성하는 게 아니라 서로 차이가 있는 거죠. 수적 다양체는 정도의 차이들에 의해 나뉘는 것을 말합니다. 수는 본성이 바뀌지 않고도 나뉘는 것의 모델이기 때문에 수적 다양체에서 모든 것은 나뉘더라도 본성을 유지할 수 있고 현행적입니다. 사과를 8조각으로 나눠도 그 조각이 사과라는 본성이 유지된다면 이것은 수적 다양체입니다. 질적 다양체는 나뉘면서 본성이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지속은 질적 다양체인데 이 다양체는 순수하게 시간적이며 공간적이지 않은 차원에 있습니다. 질적 다양체는 잠재에서 현행화로 가며, 본성의 차이들에 대응하는 분화의 선들을 창조하면서 자신을 현행화하는데요.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다양체라는 관념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일’과 ‘다’의 이론과 구별되는 방식이라는 점인데, ‘일’과 ‘다’의 대립으로 보는 변증법과 같은 방법은 가짜운동이라고 들뢰즈는 말합니다. 한 개념의 불충분함과 반대 개념의 불충분함을 조합해서는 결코 구체에 이르지 못합니다. 결국 추상적인 일과 다보다 우월한 어떤 단일체, 어떤 다양체, 어떤 현실인지가 철학에서 진정으로 중요하네요. 선과 악은 불충분함으로 구성된 추상적인 구도일 뿐, 어떤 선이냐, 어떤 악이냐가 문제입니다. 들뢰즈와 베르그손을 공부하면서 우린 공간적인 방식으로 사유를 해왔다고, 우리가 만든 추상적인 틀, 그것도 불충분함으로 구성된 구도 속에서 문제와 답을 찾아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렇게도 직관, 지속, 시간과 관련된 사유가 어려운 것 같네요. 다음 주엔 기억과 관련된 장인데, 들뢰즈가 어렵게 전개할 것으로 예상되나 흥미진진합니다.^^
여전히 잘 들어오지는 않지만, 샘의 명쾌한 정리 글을 보니 개념들에 대한 지도가 어렴풋이 그려지는 듯도 하네요. 시간에 대한 통념에서 벗어나는 게, 베르그송 철학에 가닿을 수 있는 방법인 거 같긴한데, 시간이란 게 대상화 될 수 있는 게 아니라 함께 하는 것이든 벗어나는 것이든 어느 쪽으로도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거 같아요. 그래도 함께 하는 동학들이 있으니, 가다보면 길이 또 보이지 않을까~ 뭐 안 보이면 또 ~~~??? ^^
맞습니다. 어렵지만 흥미진진해요!ㅋㅋ 이번 주도 만만치 않을 듯하지만... "그래도 함께 하는 동학들이 있으니, 가다보면 길이 또 보이지 않을까~ 뭐 안 보이면 또 ~~~??? ^^" 222
후기 적으려고 주영샘의 후기를 이렇게 읽었는데 베르그송 책 읽은 것 보다 더 뭔가 해소되는 부분들이 있었어요! ㅠㅠ 엉엉 후기 읽을 수 있게 적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의 후기는... 날림으로... 무엇을 적을 수 있을지 ㅠㅠ 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