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3학기는 <푸르스트와 기호들>과<베르그손주의>를 읽었다. 푸르스트는 멋진 문장들이 많아서 읽으면서 즐거웠고 감탄했다. <베르그손주의>는 책이 얇고 짧았지만 읽어내기는 더 어려웠다. 진화, 시간, 공간에 대한 다른 시각을 갖추지 못한 나로써는 넘사벽이었다. 같이 읽으면서 문장이 새롭게 보인 부분들을 가지고 시작합니다.
“사회의 압력과 지능의 저항” 사이의 작은 간격은 인간 사회들에 고유한 가변성을 정의하리라. 이제 이 간격의 도움을 받아 특별한 어떤 것, 즉 창조적 감정이 생산되거나 구현되기에 이른다. ~ 감정은 원을 깨트리기 위해 개인과 사회의 순환 놀이를 이용할 뿐이며, 모든 일은 마치 ‘기억’이 회상들을 이미지들로 구현하기 위해 흥분과 반작용의 순환 놀이를 이용하는 것과도 같다. 그리고 정확히 말해, 모든 층위를 동시에 현행화하고, 인간을 창조자로 만들기 위해 인간에게 고유하며 창조의 운동 전체에 적합한 평면 혹은 층위에서 인간을 해방하는 우주적 ‘기억’이 아니라면, 이 창조적 감정이란 무엇이겠는가?”(128~129, <베르그손주의>)
우리는 보통 이성에 기반을 둔 가치판단을 한다면 지성인이고 매우 올바른 판단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성은 감정보다 더 정확하고 객관적이라고 여긴다. 이런 우리의 상식을 깨고 들뢰즈는 감정은 창조적이고 이 창조적 감정은 인간을 해방하는 우주적 기억이라고 한다. 지능과 본능 사이의 간격에 삽입되게 되는 것이 감정이라고. 감정은 표상에 앞서고 새로운 관념들을 산출한다. 온 자연 안에 본질로만 있는 감정은 객체가 없다. 인간적이지만 개인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감정은 작품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자신이 표현되면서 작품을 창조하고, 감정은 창조 전체를 표현한다. 예술의 원천을 베르그손은 두 가지로 나눴다. 소설의 형식이 때로 집단적이고 때로 개인적인 이야기 꾸미기 예술과 음악으로 표현되는 감정적 혹은 창조적 예술이다. 예술은 다양한 비율의 차이로 나타난다. 창조적 감정이 예술로 승화, 감정의 고양, 이것이 일종의 감동은 아닐지?
“그래서 진화는 단선적이고 동종적인 계열 안에서 하나의 현행적 항에서 다른 현행적 항으로 가지 않고, 하나의 잠재적 항에서 여러 갈래로 뻗은 계열을 따라서 그것을 현행화하는 이종적 항들로 간다. ~ 우리는 잠재는 그 자체로 현실을 가진다는 것을 안다. 이 현실은 전 우주로 연장되어 있기에 이완과 응축의 모든 공존하는 정도들에 있다. 막대한 기억, 우주적 원뿔이다. 거기에서는 층위의 차이를 제외하고 모든 것이 자신과 공존한다. 이 층위들 각각에는 어떤 ‘탁월한 점들’이 있고, 이는 각 층위에 고유한 주목할 만한 점들과도 같다. 이 모든 층위들 혹은 정도들은, 그리고 이 점들은, 그 자체로 잠재적이다.”(115쪽, 같은책)
진화 역사는 생명 분화의 역사로 볼 수 있다. 식물에서 시작한 분화가 동물로 이어진다. 동물에게도 식물적인 것이 식물 안에도 동물적인 것이 있다. “진화는 잠재에서 현행들로 일어난다. 진화는 현행화고, 현행화는 창조다”(113~114) 분화도 자신을 현행화하면서 잠재성의 고유함을 분화의 선들을 창조하는 방식으로 실존한다. 진화는 그것을 현행화하는 이종적 항들로 간다.
우주적 원뿔을 잘 이해하기 위해 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공부했다. 지금 기억에 남는 것은 아이스크림이 맛있었고 같이 먹어서 행복했다는 느낌만 있다. 우주적 원뿔은 인간의 기억이 하나의 전체 기억을 같이 공유하고 있다고. 즉 집단적 무의식, 그렇다면 왜 사람이 다 다를까? 이런 의문이 든다. 이렇게 쓰고 보니 허술하다. 여기에 대한 들뢰즈의 답은 이렇다. “생은 자신을 현행화하면서, 자신을 분화하면서, ‘자신 외 나머지와의 접촉’을 상실한다. 따라서 모든 종은 운동의 정지다. 생물은 맴돌고, 그리고 자신을 닫는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전체는 잠재적일 뿐이며, 현실태로 이행하면서 자신을 나누기 때문에 생물은 다른 식일 수 없다.”(119~120) 자신 외 나머지와의 접촉을 상실하고, 자신을 닫는 폐쇄성으로 우리는 다른 식일 수 없고, 자신을 고집한다. 정지를 통해 인간이기를, 이것은 닫힘이고 폐쇄이면서 인간 안에 머무를 수 있다. 사람마다 기억이 다른 것은 자신의 이완과 응축의 정도의 차이로 보인다.
잠재적, 잠재는 가능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베르그손은 가능을 가짜 관념이며 가짜 문제의 원천이라며 이 관념을 거부했다. 가능은 현행성을 가질 수도 있으며 현실에 대립하고 반대이며 현실을 갖고 있지 않다. 즉 가능은 실재가 아니고 실재와 유사한 것이다. 잠재는 그 자체로 현실을 가진다. 푸르스트는 잠재성의 상태를 “현행적이지 않으면서 실재적인, 추상적이지 않으면서 관념적인”것이라 정의한다. 잠재는 자신을 실현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현행화해야 한다. 현행화의 규칙은 더는 유사성과 제한이 아니라 차이 혹은 발산, 그리고 창조다. 현실을 갖고 있지 않은 것과 현실을 가지며 실재적인 것, 가능에서는 결코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
“뇌 내의 작은 간격이 지능을 가능케 했고, 기억의 현행화를 유익하게 했다. 게다가 그 간격 덕분에 몸은 정신의 생 전부를 모방했고, 우리는 우리를 순수 과거에 자리하게 하는 도약을 할 수 있었다. 이제 우리는 [여러 인간의] 뇌 사이의, 지능 자체와 사회 사이의 또 다른 간격 앞에 있게 되었다. 그건 지속 안에 있는 사물들의 우월한 “망설임”을 모방할 수 있게 될, 그리고 도약을 통해 인간에게 닫힌 사회들의 원을 부술 수 있게 허용해 줄, 지능의 저 “망설임”이 아닐까? 얼핏 보기엔 아니다. 왜냐하면 지능이 망설이고 때로 반항한다면, 무엇보다 사회적 요구사항에 맞서 지능이 보존하려는 이기주의의 이름으로 그러는 것이기 때문이다.(126)
“사회의 압력과 지능의 저항” 사이의 작은 간격, 뇌 내의 작은 간격, 망설임, 이런 단어들은 읽는 우리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재미를 더해준다. 누군가의 감탄사가, 읽어도 좀처럼 붙잡을 수 없는 들뢰즈 언어들, 그 간격들에서 조금씩 이해하고 같이 간다. 들뢰즈 때문에 우리와 비슷한 어려움을 일찍이 겪었던 분의 이야기를 주역시간에 들었다. 마음에 확 와닿아서 적어본다.
“우리는 하나의 말을 이해하고 거기에서 진부함, 어리석음 혹은 지성의 실패를 폭로해버리는 들뢰즈의 이해력에 곧바로 놀라곤 했습니다. 그는 번역과 재구성에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었어요. 지루한 철학 교육 과정들이 그를 거치고 나면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신선하고, 아직 소화되지 않고 통렬한 맛을 내는 새로운 것이 되어 버렸죠. 취약하고 게으른 마음이 당황과 반감을 느끼게 되기도 했지요.”(미셀 투르니에)“
같이 공부하는 도반들 덕분에 이해가 깊어지기도 하고, 다른 사유에 다다르기도 하지요. 같이 공부핤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며칠 낑낑댔지만 여전히 한 발자국도 더 나가지는 못했네요. 베르그손에 대한 이해는 채운샘의 도움을 받기로 하고요~
정말 미셸 투르니에의 마음이 저희 마음이네요.ㅎㅎㅎ 즐겁게 공부하고 계신 동글샘의 마음도 느껴지고요~ 애쓰셨어요 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