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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minar Bo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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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강의는 들뢰즈를 어떻게 공부해야 할 것인지 로부터 시작했습니다. 들뢰즈의 사유를 초월적 경험론이라는 관점에서 공부할 수 있습니다.
들뢰즈의 일원론
질 들뢰즈의 사유는 경험의 지평을 떠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경험론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몸으로부터 감각으로부터 사유를 출발합니다.
플라톤, 중세 시대, 근대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주류적 사유는 객관 세계의 실체를 인정함으로서 그 실체를 인식하는 주체와 객관적 실체를 이원론적으로 구분합니다. 그러나 들뢰즈는 신체와 정신을 일원론적으로 파악합니다.
감각은 과연 주관적인 것일까요? 먼저 질과 양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양은 객관적으로 질은 주관적이라고 생각해 버립니다. 가령 크기는 객관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맛은 주관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을 1년 24시간 1분과 같이 객관적 양의 개념으로 간주하지만 시간은 우리가 양화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청년기의 1년과 중년의 1년은 결코 같은 질의 시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 한 살들의 경험은 다른 것입니다. 질을 포함하지 않는 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들뢰즈는 질과 양, 주관적 세계와 객관적 세계를 넘어 일원적으로 사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월적 경험론
그렇다면 그 일원적 세계가 경험하는 세계만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경험주의와 들뢰즈의 경험론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경험주의는 경험으로부터 진리를 유추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경험이 곳 세계라는 것이죠. 그러나 내가 뜨겁다고 감각하면 세상은 정말 뜨거운 것일까요? 여기서 들뢰즈는 경험으로부터 관념을 구성할 수밖에는 없지만 그 경험 자체가 진리가 아니라고 사유했습니다. 경험으로부터 출발하여 그 경험은 어떤 조건에서 나오는가를 질문했던 거죠. 그런 의미에서 초월론적 경험론은 경험으로부터 출발해서 그 경험이 나오게 되는 메카니즘을 파악하는데 까지 나아갑니다.
어쩌면 동양철학은 초월론적 경험론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동양적 사유에서 몸을 벗어난 진리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몸이 바뀌어야 정신이 바뀐다고 생각합니다. 도라는 개념은 그 자체가 세상과 유리되어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과 함께 있지만 세상이 존재하게 되는 원리와 같은 것입니다.
현대 물리학에서 시간과 공간은 연속체입니다. 중력에 의하여 공간이 왜곡되고 그는 시간을 변화하게 합니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아버지와 딸이 다른 공간을 경험할 때 시간도 다르게 흘렀죠. 그런 의미에서 1초는 우주 전체의 1초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물리학을 윤리적 차원으로 전환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내가 맞이하는 순간들은 수많은 인연과 계열들이 교차하며 생성된 것입니다. 그 때 우주전체와 연결된 1초를 어떻게 살 것인지를 묻는 것이 윤리학일 것입니다.
들뢰즈가 사용하는 이념(ide)는 정신이 구축해놓은 그 무엇입니다. 이념을 차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차이를 감각적으로 경험하지만 차이 자체가 어디에 있다고 지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즉, 차이는 신체를 떠나지 않지만 그 차이는 관념적인 것입니다. 가령 책, 책상, 의자 등은 분할해서 파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시적인 방식으로 들어나는 것들인 거죠. 만일 플라톤이라면 책 1, 책 2, 책 3 등 등에 대해 책이라는 이데가 그림자로서 나타난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경험주의라면 책의 구체적인 경험만이 존재한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들뢰즈는 그 구체적인 경험으로부터 출발할 수밖에는 없지만 그렇게 드러날 수밖에 없는 세계의 메카니즘을 밝힐려고 할 겁니다. 그 책의 파동으로부터 나의 신체성이 포착하는 메커니즘을 설명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경험의 세계에서 출발하여 그 경험 세계에 매몰되지 않고 경험적인 세계가 어떻게 출현하는가를 묻고 원리적 차원을 꽤 뚫는 것이 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들뢰즈를 초월적 경험론으로 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소개하면서 앞으로 들뢰즈 공부를 계획해 보기를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구조주의’에 대한 강의를 이어갔습니다.
구조주의란 무엇인가?
구조주의는 세상이 경험하는 세계와 그를 마치 거울처럼 비추는 세계 외에 상징적인 세계가 있다고 합니다. 각 각을 실재적인 것, 상상적인 것, 상징적인으로 표현 합니다. 구조주의에서 상징적인 것이란 발생의 원리입니다.
라캉은 이제 이런 아버지들 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제3의 아버지, 즉 상징적인 아버지 또는 아버지- 의 – 이름을 발견한다. (367)
모든 것을 관계하게 만드는 제3의 원리 같은 것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태어나면서 자동적으로 기입하게 되어 어떤 사회적 원리 같은 것이 있습니다. 법이나 사회적 규범 같은 것입니다. 구조주의에서 (법처럼) 상징적인 것은 발생의 원리에 해당합니다. 구조는 결정 가능한 계열들을 따라서 실재와 이미지 속에서 구조 그 자신이 육화되기 때문입니다. (367) 가령 집에는 부모 – 자식 계열이 학교에는 선생 – 학생 계열이 있고 그 계열들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 구조라 할 수 있습니다. 그 구조에 의해 사회가 형성되게 됩니다.
구조는 실재나 이미지 보다 훨씬 깊은 것, 말하자면 상상의 모든 하늘과 실재의 모든 땅을 위한 기층 이루는 것입니다.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시대마다 진리를 판단하게 되는 선험적 조건이 있다고 하고 그를 ‘에피스테메’라고 명명했습니다. 그 시대마다 어떤 전제 위에서 사유를 하게 되는데 각 시대가 놓여있는 가능성의 조건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에피스테메는 금붕어에게 주어진 어항과도 같이 어항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지만 금붕어에게 한계와 조건을 주게 됩니다. 그렇듯 구조는 인식이 발생하는 투명한 토대이며 원리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구조는 주어진 토대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를 지시할 수는 없습니다. 마치 퍼즐의 빈칸처럼 실체적으로 경험할 수는 없지만 퍼즐의 규범을 발생시키는 원리와 같은 것입니다. 퍼즐에 빈칸이 있어 역동적으로 퍼즐 게임을 즐길 수 있데 되는 것이죠. 우리는 그 구조에 의하여 금기시 하거나 사회적 역할을 맡게 되는 것입니다. 구조주의는 인간이 결코 주체적으로 삶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체는 그가 놓인 계열의 위치 값에 의하여 자동 발생하는 그 무엇입니다. 예를 들어 모성은 절대적으로 주어진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근대라는 계열, 성이라는 계열, 가족이라는 계열들이 상호적 관계 속에 발생하는 그 무엇이라는 것입니다. 그 구조는 누구의 명령이나 신이 부여한 것도 아닌 사회에 내재해 있는 차원입니다.
구조는 장소 또는 위치
기호는 다른 기호들과 위치하고 있는 관계에 의하여 그 의미를 매번 다르게 발생시킵니다. 가령 엄마라는 기호가 어떤 위치값을 갖는가, 어떤 계열을 이루느냐에 따라 다르게 됩니다. 주체의 값이 정해져서 사회와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구조 속에서 위치에 따라 발생하는 값이 매번 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령 조선시대의 맥락에서 엄마와 현대 한국사회의 맥락에서 엄마는 역할도 그 의미도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미는 자리에 의하여 달라지고 주변에 어떤 것이 놓이는 가, 어떤 계열을 이루는 가에 따라 달라지게 됩니다.
의미는 하나의 결과이며 효과(effect)입니다. 그 의미의 깊은 곳에는 무의미가 있으며, 의미는 무의미로부터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375) 사건의 현장을 떠올려 보면 얼마든지 다르게 사건화 될 수 있습니다. 가령 칼 – 타인의 발자국 – 칼의 계열이 타살을 의미할 수도 있고 칼 – 유서 – 사체가 자살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잠재적 차원에서 계열화에 따라서 의미가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주사위 놀이에서 우연한 요소들의 조합에 따라 그 게임의 전개가 달라지는 것처럼 의도치 않은 이웃 관계의 변수에 의하여 게임은 결정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조주의는 새로운 유물론, 새로운 무신론, 새로운 반인간주의입니다. (376) 구조주의는 어떤 초월항으로 세상을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재적 관계의 위치에 의하여 세상은 결정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차등적인 것과 특이한 것
관계를 세가지 차원에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① 자율성을 지닌 요소들의 관계. 각 각의 값이 정해져 있는 항들과의 관계.
② 각 각은 고정되어 있지 않지만 하나가 결정되면 나머지 하나가 자동적으로 결정 되는 관계.
③ 결정된 값이 없고 오직 관계 속에서 서로를 상호적으로 결정하는 요소적인 관 계.
그 중에서 상호 규정적 관계인 ③이 상징적 관계일 것입니다. 가령 음양이 각 각으로는 어떤 의미도 갖기 어렵지만 음양이 서로를 규정하고 있는 것처럼. 그 것을 미분적 관계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미분은 무엇인가 발생하기 직전의 차이소를 가르킨다는 의미에서 잠재적 성격을 갖습니다. 상식을 잘게 쪼개서 그 상식이 어떤 요소들에 의하여 구성되어 있는지를 보는 것이 미분일 것입니다. 반면, 적분은 그 상황을 재구성하는 것에 해당합니다. 우리가 상식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면 우선 ‘왜 이런 방식으로 인식이 되었는가?’를 잘게 쪼개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경험적인 앎이란 무엇이고 주어진 정보는 무엇인가 등 등. 그 인식의 조건들을 검토하고 그가 어떤 메카니즘에 의하여 구성되고 있는가를 분석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한 검토과정을 통하여 새롭게 재구성하는 것이 적분의 차원일 것입니다. 그를 통하여 거칠게 받아들이고 있던 관념을 해체하고 새롭게 종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조는 잠재적 공존으로 이루어진 다양체이다.
구조는 잠재적인 것의 공존으로 이루어진 다양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구조에는 미분적인 것과 특이점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미분적 관계들이 특이점들을 분배하고 그에 따라 관계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잠재적인 것은 관계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현실화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조는 누군가가 부여한 것이 아니라 그 구조 안에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구조 속에서 사회적 관계가 현실화되기 때문에 구조를 ‘사회적 무의식’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알튀세르는 ‘모든 구조는 무의식적 하부 구조다.’라고 단언 했습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앙띠 오이디푸스에서 사회체는 무의식적 차원의 욕망의 흐름이 현실화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의미에서 자본주의는 사람들의 미시적 차원의 욕망이 현실화 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들뢰즈는 ‘모든 구조는 잠재적 공존으로 이루어진 다양체’라고 정의 합니다. 우주는 분할 할 수 없습니다. 어떤 공간이나 시간을 분할하여 본다는 것은 지성이 해내는 임의적 조작에 의해서 가능해지는 사태인 것입니다. 개체의 순간은 동시에 공존하는 모든 것들의 순간과 함께 합니다. 나의 기다림의 순간은 공존하는 모든 것들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나의 1초는 분리할 수 없는 것이며 나의 1초의 우주 전체의 1초입니다. 시간은 현실화의 시간이며 바로 이 현실화의 시간을 따라서 잠재적인 것으로부터 현실화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잠재적인 차원과 현실적인 차원은 항상 함께 갑니다. 의식은 무의식으로부터 현실화되는 것입니다. 변화란 잠재적 차원이 현실적 차원과 역동적으로 관계하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무의식은 문제화하는 장입니다. 잠재적 차원에서 문제화를 통하여 특이점을 발생시키고 그 생명체는 차이를 현실화 시키게 됩니다.
어떻게 상식을 해체하고 재구성할 수 있을까?
차이와 반복을 읽기 시작한지도 1년이 되어갑니다. 우리는 들뢰즈를 읽으며 무엇을 배우고 있었던가요? 사유에서 차이를 발생시키지 못한다면 상식의 세계에서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차이가 발생하고 있는 삶에서 그 차이를 문제화해서 상식의 회로부터 다른 것을 사유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만나고 있는 세상이 상식으로 회수되는 이유는 그 세상을 거칠게 보기 때문입니다. 벙벙하게 보는 것을 해체에서 어떤 관계들이 상식을 구성하는 것인가를 섬세하게 파악해야 다르게 사유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입니다. 그 미분적 사유로 상식을 해체해 버리는 것입니다. 해체가 있어야 사건을 다른 차원에서 재구성 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입니다.
그렇게 해체하고 그 사건을 재구성할 수 있는 역량이야 말로 자유로운 삶이고 창조적 삶일 것입니다. 상식의 세계는 이미 주어져 있는 사유를 재현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들뢰즈를 읽는 이유도 세상의 차이를 포착하고 문제화하여 재구성할 수 있는 사유를 배우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저 비판을 위한 비판은 어떤 다른 것을 발생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비판 대상에 대한 반동일 뿐입니다. 오로지 새로운 어떤 것을 “위한” 사유. 새로운 어떤 것을 생산할 줄 아는 사유만이 다른 삶을 살 게 합니다.
늦은 후기 올렸습니다. 이번 강의는 들뢰즈 읽기로 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사유할 수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오..! 강의 내용이 꼼꼼하게 정리된 후기네요! 들뢰즈의 사유가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다시 점검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채운쌤은 구조주의에 대한 들뢰즈의 해석이 오히려 구조주의를 앞지른 감이 없지 않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다른 건 몰라도 어떤 사유를 비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으로부터 배운 자만이 가능한 특권인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들뢰즈에게 '배운다'는 행위도 창조적 의미를 가지죠. 차이화와 n승의 역량을 같이 생각하게 된단 말이죠.
인식의 전환-배움이 우리를 어디까지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지 한 번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