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계,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다
드디어 <안티 오이디푸스>의 부록 편까지 다 읽었습니다~! 마지막까지 들뢰즈 과타리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안티 오이디푸스>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고,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아리송하기만 합니다. 비록 올해 <안티 오이디푸스> 읽으면서 전, 후, 좌, 우의 문장들이 연결이 안 되는 고통과 괴로움이 있었지만, 다음에 다시 이 책을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조금 더 익숙하게, 그리고 편안하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작은 기대를 해봅니다.
부록의 첫 번째 장을 읽으면서, 제가 생각하기에 이 장의 핵심적인 부분은 ‘도구’와 ‘기계’에 대한 개념이었습니다. 들뢰즈 과타리가 도구와 기계를 어떻게 개념화하는지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이와 반대로 처음부터 도구와 기계 사이에 본성의 차이를 정립해야 한다고 믿는다. 도구는 접촉의 담당자이고, 기계는 소통의 요인이다. 도구는 투사적이고, 기계는 회귀적이다. 도구는 가능과 불가능에 관계하고, 기계는 덜 개연적인 것의 확률에 관계한다. 도구는 전체의 기능적 종합에 의해 작동하고, 기계는 하나의 집합체 속에서의 현실적 구별에 의해 작동한다.” (635쪽) 들뢰즈 과타리가 도구와 기계를 구분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솔직히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제가 이해한만큼 설명해보자면, 들뢰즈 과타리는 특히 ‘기계’라는 개념을 새롭게 정의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그 개념으로부터 인간중심적인 사고를 넘어가려고 합니다. 인간중심적인 사고 중 하나로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이라는 일반적인 정의가 있습니다. 저희는 도구가 이성을 가진 인간 주체에 의해 사용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들뢰즈 과타리는 인간과 도구의 관계를 그런 방식으로 정의하는 것을 비판합니다. 들뢰즈 과타리는 “생물의 확장 및 투사, 인간이 점진적으로 여유롭게 되는 조작, 도구에서 기계로의 진화, 기계가 점점 더 인간과 독립해서 만들어지는 역전 과정 등으로서의 도구라는 영감에 고취된 고전적 도식”(634쪽)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도구는 인간 능력의 확장이며, 인간이 자유자재로 조작할 수 있는 것, 그리하여 인간과 도구는 서로 구별되고, 그 관계에서 인간은 언제나 중심적인 것으로 자리를 잡는 것을 의미합니다. 도구를 이렇게 정의하면 기계는 도구에서 한 단계 진화한 것, 인간에 의해서 도구에서 기계로 진보가 된 것정도로 이해가 됩니다. 들뢰즈 과타리는 그렇게 인간과 도구, 기계의 관계가 인간중심적으로 사고되는 것을 넘어가려고 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인간 아닌 다른 것들은 모두 배경처럼 취급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들뢰즈 과타리는 기계를 다르게 정의합니다. “기계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은유가 아니다. 잘 규정된 조건들 아래서 인간이 한 부분을 이루는 집합체에 회귀함으로써 이 성격이 소통되자마자 인간은 기계를 이룬다(fait machine). 스텝이라는 조건에서 인간-말-활의 집합체가 유목민 전쟁기계를 형성한다. 대제국들의 관료제라는 조건에서 인간들은 노동 기계를 형성한다. 고대 희랍 보병 밀집 부대라는 조건에서 희랍 보병은 그의 무기와 더불어 기계를 이룬다. 사랑과 죽음이라는 위험한 조건에서 무용가는 발놀림과 더불어 기계를 이룬다.” (643쪽) 들뢰즈 과타리는 회귀와 소통으로 기계를 설명합니다. 예를 들면, 인간-말-활을 서로 회귀하고 소통합니다. 인간-흐름은 말-흐름의 속도를 채취-절단하고, 활-흐름은 인간-흐름의 눈과 손 부품에 의해 절단됩니다. 한편 말-흐름의 속도와 방향은 화살-흐름을 절단합니다. 들뢰즈 과타리는 이성을 가진 인간이 주체적으로 도구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 특정한 조건에서 인간이 하나의 부품을 이루고, 말과 활도 하나의 부품을 이루는 세계를 그려냅니다.
2. 욕망은 오이디푸스에 갇히지 않는다
부록의 두 번째 장은 ‘욕망 기계와 오이디푸스 장치-퇴행 탄압에 맞선 회귀’입니다. 욕망 기계와 오이디푸스에 관한 이야기는 <안티 오이디푸스> 책에서 끊임없이 이야기하지만, 전혀 익숙해지지 않네요…ㅎㅎ. 제가 아는만큼 또 정리해보겠습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욕망 기계 개념을 주장하면서, 오이디푸스 삼각형 안에 욕망을 가두는 것을 비판합니다. “욕망 기계들은 무의식의 비-오이디푸스적 삶을 구성”하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오이디푸스는 기발한 물품 내지 환상”일 따름입니다. 그런데 정신분석은 욕망을 엄마-아빠로 끊임없이 복귀시키고, “쳇바퀴 속 다람쥐”처럼 가족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만듭니다. 심지어 이렇게 바꿔 말하기도 합니다. “오이디푸스는 아빠-엄마와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것은 기표예요, 그것은 이름이에요, 그것은 문화예요, 그것은 유한성이에요, 삶이라는 존재-의-결핍이에요, 그것은 거세예요, 그것은 인물의 모습을 한 폭력이에요…….”(638쪽) 이에 들뢰즈 과타리는 “웃기고 있네”라며 한방 먹이며 말합니다…. “상상적, 상징적, 언어학적, 존재론적, 인식론적인 숭고한 아빠-엄마들로 욕망을 더 잘 복귀시키기 위해 욕망의 모든 연결을 절단함으로써 저 낡은 일을 계속하고 있을 따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들뢰즈 과타리에게 욕망은 어떻게 작동하는 것일까요?
들뢰즈 과타리는 욕망 기계가 “모든 방향에서 또 모든 방면에서 무한히 연결할 수 있는 그것들의 능력(pouvoir)”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욕망 기계들은 “여러 구조를 동시에 가로지르고 지배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엄마-아빠라는 오이디푸스 속에 좁은 영토에 갇혀 있는 게 아니라 비-인간적 요소를 구성하는 연결들과 전단들, 흐름들까지 가로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각각의 것이 <욕망 모터>와 더불어, <음란한 톱니바퀴>와 더불어 부품을 이루어, 광물적, 식물적, 동물적, 아이적, 사회적 구조들과 질서들을 가로지르고 뒤섞고 뒤집으며, 매번 오이디푸스의 가소로운 형상들을 해체하며, 언제나 탈영토화 과정을 더 멀리 밀고 간다.” (642쪽) 우리가 무언가를 욕망하게 되는 것은 어린 시절의 경험에 갇혀있는 게 아닙니다. 광물적 흐름, 식물적 흐름, 동물적 흐름… 전 우주적 흐름의 절단-채취 속에서 욕망이 흘러다니는 것입니다. 들뢰즈와 과타리가 욕망 기계들을 오이디푸스와 대립시킬 때, 말하고 싶은 것은 특히 “오이디푸스가 없으면 무엇보다도 나르시시즘이 없으리라”는 점입니다. 욕망 기계로 세계를 상상해보면, 온갖 흐름들이 절단-채취하면서 생성-해체되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 속에서는 나라고 하는 자아가 더이상 비대해지지 않겠지요.
"전,후,좌,우의 문장들이 연결이 안 되는 고통과 괴로움"에도 굴하지 않고 1년간 읽기를 이어온 우리 모두에게 박수를!ㅎㅎ
그래도 부록에서는 조금 친절하게 욕망 기계의 핵심적인 점들을 정리해주어서 도움이 되었어요. 여전히 물음표가 붙긴 했지만, '모든 방향에서 무한히 연결할 수 있고, 여러 구조를 동시에 가로지르는 욕망'은 오이디푸스라는 좁은 영토에 갇히지 않는다는 점만큼은 분명히 알 것 같습니다. 이제 강의만 남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