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이 세미나 두 번째 시간. 첫주에 개인 사정으로 불참하셨던 두 분이 합류하시면서 나들이 세미나가 완전체가 되었습니다. 그런 만큼 토론도 더 활발하게 진행되었는데요, 이번 주에는 <세계 끝의 버섯> 2부 ‘진보 이후에: 구제 축적’을 읽고 만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리저리 뻗어나가는 이야기들의 갈피를 잡는 일이 혼자 읽으면서는 쉽지 않았는데,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엉켜있던 내용들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새로운 생각거리들도 얻었습니다.
저희는 우선 애나 칭의 서술 방식이 흥미로웠습니다. 2부에서 애나 칭은 송이버섯을 따라가며, 자본주의가 의존하고 있는 비자본주의적 요소들을 추적합니다. 자본주의 체제는 모든 걸 자본주의적인 것으로 확확 ‘번역’해냅니다. 작년에 <안티 오이디푸스>에서도 보았지만, 자본주의 체제는 너무나 재빠르고 유연하게 경계를 확장해서, 마치 모든 걸 자기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기에 “자본주의 제국 바깥에는 어떤 공간도 없다”(<버섯> 126쪽)는 학자들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지요. 그러나 그런 학자들조차도 자본주의 세계 중심에서 발견되는 ‘비자본주의적 형식’에 주목합니다. 그들은 그것을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삼고자 합니다. 하지만 애나 칭은 자본주의를 ‘극복의 대상’으로 보는 관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경제적 다양성’을 인정하자고 제안하며, 그것을 알아보는 ‘민족지적 눈’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자본주의는 거대하고 단일한 체제로 굴러가는 것처럼 보여도 곳곳에서 비자본주의적인 요소들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굴러갈 수 없습니다. 송이버섯이 채집되고 거래되고 유통되는 방식, 그 과정에 관여하는 많은 사람들, 그들의 사연들과 그것을 둘러싼 역사들에 관한 이야기는 그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애나 칭의 이야기 속에는 다양한 삶의 유형들, ‘자유’에 대한 다양한 규정들, 자본주의적인 것에서 비자본주의적인 것으로, 혹은 그 반대로 전환되는 산물들에 관한 이야기들이 리좀적으로(^^) 펼쳐집니다. 그래서 어렵지 않은 문장들로 쓰였음에도 따라가는 일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애나 칭은 어떤 이야기도 전적으로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이라고 결론내리고 있지 않지만, 습관적으로 그 둘을 가르고 시작하는 독자는 자꾸만 애나 칭이 긍적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으려고 하다가 길을 잃게 됩니다. 그러고는 묻지요.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대안은 무엇인가. 대안을 알려달라!
하지만 모두를 위한 보편적인 대안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존재하는 방식은 “마주침에서 창발하는 결과”(57쪽)이기 때문입니다. 그 방식들이 개방적으로 얽혀 있다는 의미에서 애나 칭은 배치 개념을 가져옵니다. “하나의 배치에는 다양한 궤적이 서로를 점령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불확정성이다.”(158쪽) 2부에서 펼쳐지는 이야기가 보여주고 있듯이, 우리는 어떤 사건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애나 칭은 대안을 말하는 대신, ‘공동 발달’과 ‘공생’을 이야기합니다. ‘마주침이 먼저’라는 사실을 보여주며, 자신처럼 먼저 산책에 나서기를 권합니다. 그것이 이 책에서 권하고 있는 대안이라면 대안일 수 있겠다고 저희는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또한 ‘각자의 지도를 제작하는 일’과도 연결시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았고요.
이번 시간에 낭송한 <천 개의 고원> 서론에서 들뢰즈는 리좀을 ‘지도’에 비유합니다. “지도는 그 자체로 리좀에 속한다. 지도는 열려 있다. 지도는 모든 차원들 안에서 연결접속될 수 있다.”(<고원> 30쪽) 그러면서 ‘사본’을 만들지 말고 ‘지도’를 만들 것을 주문합니다. 하지만 많은 입구를 가지고 있는 지도는 언제든 ‘동일한 것’으로 회귀하는 사본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방법’이라고 못박습니다. 어떻게 접속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거죠. 들뢰즈는 ‘책’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보고 있는 듯합니다. 어떻게 접속할 것인가. 3부를 읽으면서는 각자 어떻게 접속하고 어떤 지도를 그리게 될지 궁금해집니다.
- 다음 시간에는 <세계 끝의 버섯> 3부를 읽어옵니다. 여섯 분은 메모를 적어오시고요.
- 간식은 민호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수요일 저녁에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