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와 반복>을 시작으로 벌써 4년째 롱런 중인 들뢰즈 저작 읽기 세미나, aka ‘나들이’세미나 올해도 순항 중입니다. 그간 우리 나들이 멤버는 난해하기로 소문난 들뢰즈의 책들을 찬찬히 읽어가면서 이 모름의 와중에도 느껴지는 알 수 힘들에 이끌려 <차이와 반복>부터 들뢰즈의 초기저작들, 그리고 <안티오이디푸스>까지 중도 포기 없이 매주 만나 이 모름을 나누며 끈끈한 멤버십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게다가 올해 나들이에는 다양한 새로운 멤버분들이 많이 합류했습니다. 앞으로 새롭게 꾸려진 나들이 멤버들과 또 어떤 이야기들을 펼쳐갈지 무척 기대가 됩니다.
이번 나들이 세미나는 들뢰즈의 저작만 파는 방법을 살짝 틀어-들뢰즈님이 바란 대로-들뢰즈의 책에 등장하는 개념들이 실제로 우리에게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주는 책들을 읽어보려 합니다. 그 첫 스타트로 애나 칭의 <세계 속의 버섯>을 읽고 있는데요. 작년부터 규문에서 워낙에 유명한 책이었죠. 이번에 세미나 합류하신 분들 중에는 이 <버섯> 책을 다시 읽고 싶어서라고 하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이 책이 가진 힘이 있긴 한 것 같습니다. 저만해도 <버섯> 읽기는 들뢰즈의 책들처럼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닌데요, 오히려 반대로 나름 흥미진진하게 쑥쑥 읽힙니다. 그런데 이 비교적 이해하기 쉽게 쓰여진 글을 따라 읽어 가다 보면 이상하게 자꾸만 가슴이 덜컥거리고 뜨거워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 느낌은 뭘까요? 왠지 놓치고 싶지 않은 요 느낌을 주시하면서 계속 읽어가려고 합니다.
이번 주는 2부 ‘구제축적(salvage accumulation)’부분을 읽고 토론했습니다. 구제축적은 자본주의가 부를 축적하는 여러 방식 중 하나입니다. 자본주의는 부를 한곳으로 모아 이윤을 창출하여 다시 그 돈을 투자하여 부를 쌓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시스템입니다. 그래서 돈이 될 것 같다 싶으면 어디든 악착같이 들러붙어 계속 자신의 부로 취해서 몸집을 키워나갑니다. 그리고 이론상 자본주의는 자본가가 임금노동과 원료를 조절함으로써 이윤을 창출하고 부를 축적하는 것으로 봅니다. 하지만 실제로 자본가들은 이론처럼 노동이나 원료를 조절하지 않고도 훨씬 더 손쉬운 방식으로 이윤을 창출하는데 이것을 ‘구제축적(salvage accumulation)’이라고 합니다. ‘구제축적’은 기업이 상품 생산 조건을 통제하지 않고도 자연 자원이나 인적자원이 가진 전문적 능력들을 통해 이윤을 창출하는 방식입니다. 즉, 자본가들은 이런 이미 있던 자원이나 기술들을 별 노력 없이 가져와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으로 이들을 가져가 돈을 벌어들이고 있죠.
애나 칭은 이런 구제축적방식은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통상적 방식이며, 따라서 자본가들이 노동이나 원료라는 생산조건을 통제한다고 믿는 그 순간에도 일어난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자본가는 노동자인 인간의 생명을 생산할 수 없고, 석탄과 석유 같은 원료들, 식물을 자라게 하는 햇빛이나 물도 이들이 만든 것이 아님에도 그건 당연히 거저 가져다 쓸 수 있는 것으로 여기며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런 구제 축적은 전 지구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구제 축적이 잘 드러나는 곳이 글로벌 공급사슬입니다. 기업은 더 많은 상품을 더욱 싸게 후려쳐서 만들 수 있는 곳을 찾아 전 세계의 공급처들과 소비자를 연결하는데요. 이렇게 상품의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하는 상품 사슬이 글로벌 공급사슬입니다. 따라서 이 글로벌 공급사슬에는 다양한 장소에 있는 사람들의 다층적인 욕망과 삶들이 상품사슬의 명목으로 한데 모이고 얽히게 됩니다. 그리고 기업가는 공급사슬에 엮인 욕망들을 적절히 조율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들이 필요한 상품을 만들어 내고 이윤을 창출하는데 이를 애나칭은 ‘번역’ 작업이라고 합니다. 이때 번역이란 공급사슬에 엮인 다양한 차이가 존재하는 장소를 교차하면서 부분적인 조율을 통해 이윤을 창출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방식은 자본가들에게는 효율적인 방식인데요. 왜냐하면 자본가들은 골치 아프게 노동자들과 임금협상을 하거나 자원을 착취한다는 환경운동가들의 비판을 상대하는 대신,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공간을 가로지르면서 연결된 공급 사슬의 다양한 공간과 삶을 자신의 구미에 맞게 ‘번역’하는 작업을 통해 깔끔하고 손쉽게 부를 축적할 수 있기 때문이죠.
칭은 몇 가지 구체적 예를 드는데요. 19세기 유럽인 무역업자가 중앙아프리카로부터 상아를 공급받기 위해 그 지역에 행해진 폭력적 행위들은 모두 ‘진보와 문명’이라는 말로 번역되어 그들의 야만적 행태들을 덮어버렸죠. 이런 예들은 월마트가 재고품 식별을 쉽게 하기 위해 만든 상품 바코드는 따라서 이 제품이 만들어지는 노동 및 환경 조건들을 무시하고 덮어버리는 번역기제로 작동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런 식으로 재고품을 통제할수록 노동과 원료를 통제할 필요는 줄어듭니다. 기업가들은 바코드로 인식되는 재고품들을 확장하는 데만 신경을 쓰기만 하면 되고, 그러면 이 재고품이 만들어지는 실제 생산지에서의 노동환경이나 환경문제들은 그곳에 있는 관계들이 알아서 하도록 떠넘겨집니다. 싸게만 제품을 만들 수 있다면 기업가들은 생산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듯 상관없이 그들의 바코드에 찍히는 ‘재고품’이라는 자신들의 이야기에만 관심이 있으니까요.
실제로 기업들은 지금껏 그래왔듯 자신들의 부의 축적에만 관심이 있을 뿐 그 외의 삶은 별로 관심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우리의 삶은 언제나 어디에나 마수를 뻗치고 있는 이 자본주의의 코드에 엮여서 이들에게 마냥 이용당하면서 살 수밖에 없다는 절망감이 듭니다. 부를 축적하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불도저처럼 밀고 들어오는 거대 자본주의의 시스템 앞에 당하는 수밖에 없다는 분노와 절망감이 먼저 올라오니까요.
그러는 한편 1부에서 보았듯 ‘진보’나 ‘근대화’, ‘자본주의’, ‘민주화’, ‘성장’, ‘과학’, ‘발달’, ‘희망’이라는 말들로 만들어진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인간만이 주도적으로 미래를 기획할 수 있고, 또한 지구도 인간이 중심이 되어 인간의 안락한 삶이 보장되는 방식으로 조율하고 재배치된 자본주의적 삶의 공간인데요. 그런데 그렇게 만들어진 공간이 최근의 환경오염이나 기후위기에 직면해서 당장 생존에 대한 위협을 받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당연하게 주어진다고 믿었던 자연 자원도 오염되거나 고갈 일로에 있고, 자본주의의 선진에 있는 나라들조차 고용의 불안정성이 일상이 되고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가 믿었던 진보나 성장에 대한 기대와 전망은 우리가 예측하지 못한 상황들이 이곳 저곳에서 터지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마냥 불안해하거나 혹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또 무기력에 빠집니다.
이런 더블 절망의 상황에서 칭은 뜬금없이 우리 앞에 송이버섯을 들이대면서 이 냄새 좀 맡아보라고 합니다. 그러고는 우리에게 “니가 알고 있는 이야기가 과연 세계 이야기의 전부일까?”라고 되묻습니다. 그러면서 칭은 이런 이야기들은 실은 자본주의나 진보라는 가치로 조율된 세상에 대한 부분적인 이해일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자본주의의 가치에 의해 스토리텔링 되어 만들어진 공간들이 결국은 소외와 피폐함만 남아 폐허가 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곳에도 다양한 삶들이 얽혀서 다종의 이야기와 시공간을 여전히 펼쳐내고 있으니 그렇게 쉽게 포기란 말을 쓰지 말라고 합니다. 대신 어서 나가서 산책이든 뭐든 해보면서 대신 지치지 않는 호기심을 가지고, 송이버섯 냄새를 따라가면서 그런 다종의 시공간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들에 귀 기울이며 ‘이런 폐허에서 생명을 찾는 일’을 계속해가라고 촉구합니다. 칭은 이를 ‘진보나 서사의 단순화에서 해방되어 패치성의 매듭과 맥박을 탐험하는 것’(p.30)이라고 하는데요.
그런데 이런 탐험은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거듭 강조합니다. 오히려 자본주의가 인간 및 다른 존재들을 모두 자원으로 만들어 안정적인 공급사슬로 엮어내는 바로 그 장소의 가장자리가 탐험할 장소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가장자리에서 자본주의의 공급사슬에 엮여있는 불안정적인 삶들의 모임들이 만들어내는 예측 불가능한 마주침들을 ‘알아차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이 탐험의 방법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 알아차림은 하나의 매끈한 이야기로 깔끔하게 요약된 것으로 모든 것을 번역하고 덮어버리는 자본주의의 이야기와는 다른 방식입니다. 오히려 이것은 시간도 오래 걸리고 깔끔하게 정리되지도 않을 ‘골치 아픈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그런 불협화음에 귀 기울’여야 하는 지난하고 끝나지 않는 작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애나칭은 적어도 우리가 이렇게 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불안정안 생존을 향한 최선의 희망과 마주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그리고 칭은 진보가 서로 다른 종류의 시간을 하나의 리듬에 맞추어 전진해나가는 행진이라면, 이런 알아차림의 방식은 단일한 진보의 리듬에 감추어져 있는 다종의 삶의 리듬을 드러내는 ‘복수의 시간-만들기’ 서술방식이라고 하면서 이것이 진보나 자본주의라는 서사를 다르게 사유할 수 있는 대안적인 방식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칭의 이야기들이 엄청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는데요. 작년 <차이와 반복>을 읽을 때도 자본주가 자본주의의 바깥까지도 확장해서 모든 것을 자신의 나와바리로 만드는 ‘불도저식’의 압도적 괴력 앞에서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는건가?에 대해 토론을 한 적이 있는데요. 그때도 그래도 방법이 있을거야 했지만 또 방법이 없지 않나 하고 속으로 몰래 좌절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의 상상력과 호기심은 거기 뿐이었다고 할 수 있죠.
그런데 이것은 자본주의를 잘 모르는 저만이 아니라 저명한 자본주의 비평가들조차도 ‘괴물’ 같은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방식으로 단일한 연대로 대립하는 방식으로 대안을 찾으려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칭은 이것 또한 ‘확장성’에 근거를 두는 진보에 근거를 둔 발상일 뿐이라고 합니다. 이번 나들이 세미나에서도 실컷 송이버섯 냄새를 킁킁 맡으면서 미엔인 몽인 버섯 채집인들의 자유의 이야기들에 얘기하다가도 ‘그래서 칭이 말하는 대안은 뭐지?’ ‘그래서 우리보고 뭐 하라는 것인가?’로 자꾸만 매끈한 결론과 정리, 하나의 대안을 찾으려는 우리의 못된 습성을 마주했으니까요.
칭의 이런 시도들을 보면서 그동안 우리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방식이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가 만든 대본의 사본을 받아 그것을 앵무새처럼 톤만 조금 바꿔 그대로 따라 읽기만 했던 것은 아닌가란 생각이 듭니다. 자본주의를 대적할 대항마는 자본주의 괴물에 맞먹는 또다른 거대하고 단일한 담론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들을 소박하게 그렇지만 끊임없이 지치지 않고 펼쳐내는 지구력과 이런 사방에서 펼쳐내는 이야기들을 호기심을 가지고 지치지 않고 주의깊게 듣는 것은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흥미진진하네요! 못다 한 이야기는 세미나 시간에 또 해요!
다섯 줄만 쓰신다더니...^^b 애나 칭의 송이버섯 이야기는 여러 면에서 신선하고 놀랍습니다. 남은 부분에서는 또 어떤 줄기들이 뻗어나갈지 기대되네요.
가장자리를 탐험하고 마주침의 역사를 되짚어보는 일은, 말씀하신 것처럼, 시간도 오래 걸리고 골치 아프고 마음도 불편한 지난한 작업이라는 점, 잊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 시작은 늘 '산책'이라는 점도 기억하고 싶고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