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후기
Seminar Bo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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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학기 1주차에는 “대중은 어째서 그게 자신을 위한 것이라도 되는 양 자신에 대한 억압을 욕망하는가?”라고 질문했던 빌헬름 라이히의 제목마저도 너무나 발칙한 <오르가즘의 기능> 제4장 심리학과 성이론의 차이를 읽고 얘기는 나눴습니다. 프로이트의 저서를 읽을 때도 기승전性, 성과 관련된 내용이 많이 나왔지요.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는 무미건조하고 분석적인 내용으로 읽으면 얼마 되지도 않은 성욕이 바닥을 보이게 되는 효과(?)가 있었는데요.^^ 정신분석학에서는 왜 이렇게 성과 관련된 분석을 집중적으로 하고 논의를 펼쳤을까요? 책 제목인 <오르가즘의 기능>, 글에서 등장하는 성과 관련된 용어들을 그냥 받아들이지 못하고, 민망하다고 여기는 제 모습에서 라이히가 비판한 성에 대한 위선적이고 억압적 태도를 확인합니다. 이런 성에 관한 의식과 접근 방식은 근대의 독특한 지점이기도 하고요. 프로이트는 혁명적으로 무의식을 발견했지만, 결과적으로 이드를 억압하고 욕망을 유기적으로 잘 조직화하여 사회에 잘 적응하는 걸 바람직하게 봤습니다. 리비도는 대상이나 목표를 다양하게 변화시킬 수 있기에 지적인 활동, 종교 생활 등으로 승화시킬 수 있지요. 만족을 얻지 못하고 출구를 상실한 리비도가 쌓이면 정신병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리비도가 막히지 않고 잘 흘러가는 게 중요한데, 사회는 다양한 규정과 윤리, 억압이 작동하며 개인의 욕망은 이를 초과하기에 리비도가 억제되고 막히기 쉽네요. 프로이트와 라이히같은 정신분석학자들도 리비도를 어떻게 잘 흘러가게 하여 개인도 건강한 삶을 살고 좋은 사회를 형성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고, 그들의 개념과 이론은 끊임없는 임상과 통찰의 결과물입니다. 프로이트를 읽을 때도 그의 신중한 태도, 의문이 생기면 끝까지 탐구하는 연구 열정, 임상과 연구를 통한 자기 이론의 수정 등이 인상적이었는데요. 라이히의 도전적인 태도, 적극적인 임상을 통한 연구와 통찰이 제게 감동적으로 다가왔습니다.
# 리비도의 양 vs 정신적 질
“프로이트에 따르면 충동은 흥분의 양, 즉 리비도의 양에 의해 결정되었다. 하지만 나는 막 쾌락이 충동의 본질임을 발견하고 있었다. 쾌락은 정신적 질이었다. 그러나 당시 내가 알고 있던 사고방식에 따르면, 양적인 것과 질적인 것은 양립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분리된 영역이었다. 나는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이것은 이후 흥분의 양과 쾌락의 질 사이의 기능적 통일로 나아가는 첫발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내딛은 것이었다.” (「오르가즘의 기능」 77p)
라이히는 성긴장이 다른 긴장들의 불쾌한 본성과 달리 쾌락적 성격을 갖는 것에 주목했습니다. 통상적인 이론에서는 이완만이 쾌락을 매개한다고 봤거든요. 그런데 성의 경우는 긴장을 통해 쾌락에 도달합니다. 성뿐만 아니라 쾌락에 도달하는 메커니즘을 생각해보면 긴장이 클수록 쾌락이 강한 것 같습니다. 라이히는 충동 속에서 쾌락의 운동적인 측면을 보게 되었는데요. 이와 함께 모든 지각은 자극에 대한 능동적인 태도에 의해 결정된다고 합니다. 쾌락을 발생시키는 자극이 내적 태도에 따라 지각되거나 지각되지 않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지요. 예컨대 성감대 애무가 어떤 이에게는 쾌락을 주지만, 다른 이에게는 접촉 혹은 마찰만으로 지각될 뿐입니다. 성뿐만 아니라 우리가 느끼는 감각적 쾌락도 이와 같은 방식이 아닐까요? 피카소의 그림이 누군가에게는 시각적 쾌락을 주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눈에 보이는 대상으로서만 지각됩니다. 모차르트의 소나타가 누군가에게는 청각적인 만족을 느끼도록 작동하는 반면, 다른 이에게는 소음으로 들리네요. 이런 측면에서 쾌락은 라이히가 말한 바와 같이 정신적 질로 볼 수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충동을 리비도의 양으로 분석했는데, 라이히의 글을 읽으니 이걸 양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볼 수 있느냐라는 질문이 들었습니다. 리비도의 양도 물론 작용하겠지만, 정신적인 질이 없는 충동이 가능할지 의문이고, 결국 흥분의 양과 쾌락의 질은 분리할 수 없다고 라이히는 말합니다. 프로이트 등 정신분석학자들은 리비도가 어느 대상에 얼마나 투자되느냐의 방식으로 접근했는데, 이것은 자본주의 메커니즘과 굉장히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았네요.
# 성 에너지의 울혈 vs 오르가즘
“비사회적 행위들의 강렬도가 성기 기능의 장애에 달려 있다는 사실은 제대로 받아들여졌다. 그것은 ‘부분 충동’이라는 당시 정신분석학의 관념과 모순되었다.” (「오르가즘의 기능」 77p)
라이히는 임상에서 환자들의 어려움들이 성긴장의 정도 혹은 성만족을 경험하는 정도에 직접적으로 달려있음을 발견합니다. 성기적 만족을 통해 성긴장을 방출하는 것은 모두 병리적 충동들의 돌출을 직접적으로 완화시켰는데요. 그에 따르면 도착적이고 비사회적인 충동들이 정상적인 성기능의 손상 때문에 증가한다는 생각은 새로운 것이었지요. 지금도 여전히 성과 관련되어 위선적이고 금욕적인 태도가 지배적이고 성은 여전히 음지에서 강하게 작동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사회적 문제들은 성 에너지 울혈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라고 말하면 퇴폐적이고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분류될 것 같네요. 그런데 에너지 차원에서 보면, 에너지가 흐르지 못하고 계속 쌓이기만 할 때 어떤 일이 발생할까요?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에너지가 폭발하며 나오지 않을까요? 성적인 만족을 성기적 만족으로만 국한하면, 섹스를 잘해서 오르가슴을 느끼는 것이 사회적 문제의 해결 방법이냐는 질문이 나올 수 있는데요. 이것도 건강한 삶에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성 에너지, 리비도는 어떤 대상에도 투자될 수 있음을 고려할 때 오르가슴은 비성기적으로도 가능하겠지요.
우리 몸에 흐르는 리비도, 들뢰즈와 과타리가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말하는 욕망 기계는 어떤 것에 투자하느냐, 즉 무엇과 접속하느냐, 그리고 어떻게 연결되느냐에 따라 쾌락과 충만함에 차이가 발생합니다. 리비도와 욕망기계는 선악과 좋고 바쁨, 옳고 그름을 모릅니다. 다만 이것이 쌓여 막히지 않고, 잘 흘러가는 게 중요하겠지요. 라이히는 기존 정신분석학에서 성격 행동에 관하여 쓸 때 건강한지 아픈지를 판단하지 않고, 좋고 바쁨을 전제로 분별하는 점을 비판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도덕적이고 사회적으로 순응한 사람이 아픈 것과 규정을 넘나들어 위험한 사람이지만 건강한 것, 어떤 것이 더 나은 것인지 질문이 듭니다. 사회의 규정이 억압적이고 울혈이 생기도록 만든다면, 법과 도덕에 잘 따르면서 정신병으로 고통받는 게 부적합한 걸로 보이네요. 라이히가 오르가즘을 강조하는 지점이 욕망과 리비도의 관점에서 공감되었고, 우리의 성에너지와 긴장, 오르가슴으로 표현되는 분출과 만족에 대해 더 깊이 탐구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분열증
“나는 무엇보다도 분열증에 관심이 있었다. 정신의학은 환자의 상태를 기술하고 분류할 뿐, 아무런 치료도 하지 않았다.” (86p)
“사람들은 분석심리학이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차원에서 ‘욕망’을 파악했어야만 했다. 이 모든 것들이 깊은 생물학적 과정이었고, ‘무의식적 욕망’은 이것의 표현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92~93p)
“공식적인 정신의학은 오로지 분류에만 관심을 가지기 때문에, 갈등의 내용에는 혼란스러워 한다. 공식적인 정신의학에서는 환자가 공간적으로만 방향감각을 잃는지 아니면 시간적으로도 방향감각을 잃는지가 중요할 뿐, 환자가 무엇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 방향감각을 잃는지에는 관심이 없다. 보통 정신병 환자는 매우 조심스럽게 감춰져 있는 무의식적이거나 반만 허용된 성적인 생각들에 싸여 있다.” (95p)
“모든 사람은 어디선가는 옳다. 정신병 환자들조차도 특정한 장소에서는 원칙적으로 틀림없이 옳다. 그러나 어디에서?” (96p)
“분열증에서 특별한 것은 살아 있는 것, 즉 신체 속에서 생장적인 것을 경험한다는 것인데, 물론 그것은 예측할 수 없고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도착적인 성이라는 일상적 관념들로 표현된다.” (97p)
라이히는 기존 정신의학과 분석심리학에 대해 상기와 같이 비판했습니다. 이들은 환자를 어떻게 분류할 것인지에만 골몰할 뿐, 정신병에 걸린 이유와 증상의 내용에 관해서는 관심을 덜 가졌던 것이죠. 게다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욕망’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심층적으로 접근하지 못했습니다. ‘욕망’을 억압하고 조절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기에 앞서 이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하여 통찰이 필요합니다. 라이히는 깊은 생물학적 과정인 욕망을 기반으로 하여 정신병을 탐구하는데요. 그는 욕망을 억압하여 유기적으로 잘 조직화하면서 사회에 적응하는 걸 바람직하다고 본 프로이트와 다른 길을 갔습니다. 기존 정신분석학적 접근 방식이 병을 더 양산하고 증상을 악화시킬 수 있다고 봤던 것이죠.
정신병 환자들이 말하는 것이 다 옳은 것은 아니지만, 이들과 현명하고 진지하게 삶에 대해 얘기할 수 있다고 라이히는 말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어디선가는 옳다라는 관점하에서 환자들을 대했고요. 정신병 환자들도 특정한 장소에서는 옳은 것입니다. 저는 이런 라이히의 태도가 무척 인상적이었고 공감되었습니다. 물론 실천은 너무나 어렵지만. 우리는 사회적 상식과 도덕의 관점이 유지되는 곳에서 이들을 판단하며 틀렸다고 쉽게 말하지요. 정신병 환자가 아니더라도 나와 조금만 달라도, 사회적 규정에서 약간만 벗어나도 심판자의 위치에서 그들의 선악을 판별합니다. 그러나 타자들이 처한 상황과 조건에 우리가 놓인다면, 우리도 어떻게 변할지 장담할 수 없고요. 맥락과 조건 등을 전반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나의 잣대로 분별하고 배제하는 습관을 바꾸려고 노력해야겠습니다.
라이히의 열린 태도, 즉 모든 사람이 어디선가는 옳다라는 태도로 환자들은 라이히에게 솔직하게 얘기합니다. 임상을 통해 그는 분열증 환자들로부터 충동, 욕망이 어떤 것인지 발견하는데요. 분열증 환자에게서는 도착적인 충동들이 터져 나옵니다. 분열증 환자는 일부는 주위 세계로부터 차용해 오고, 일부는 자신의 자연스런 성의 방어에서 획득한 개념들과 생각들을 통해 자신의 기관 감각, 곧 생장적 흐름을 경험합니다.(97p) 라이히는 분열증에서 살아 있는 것, 생장적인 것을 경험하는 걸 중요하게 봤지요. 들뢰즈-과타리가 자본주의적인 분열증이 아닌 분열자를 얘기할 때 이런 점을 얘기한 걸까요? 물론 라이히는 그 살아있음, 생장적인 것이 도착적인 성으로 표현된 걸 얘기하며 이것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견고한 좋고 나쁨, 옮고 그름이 작동한 결과인데요. 환자들은 성감각의 세계가 너무나 직접적으로 강렬한 나머지 통상적인 사고와 삶으로부터 분리된 만큼 종종 외부 세계가 지닌 성적 위선을 통렬하게 꿰뚫어 봅니다. 그들은 현실을 경험할 뿐, 현실에 대한 어떠한 환상도 경험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관념론자들인데요. 부와 권력, 명예도 관념이고, 도덕과 종교도 마찬가지고요. 물론 이것들이 다 관념이니 공허하고 쓸모없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분열자들을 통해 우리의 충동, 욕망이 어떤 건지 보고, 우리가 환상 때문에 에너지의 흐름을 과도하게 억압하고 막는 건 아닌지 보려는 것입니다. 곧 읽게 될 들뢰즈-과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 4장 분열-분석 입문을 읽을 때 라이히의 분열자에 관한 임상이 도움 될 것 같네요.
# 정신병과 계급
프로이트는 부르주아 계급 사람들을 위주로, 특히 여성들을 대상으로 임상했고, 정신분석은 자유연상을 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이 필요했기에 정신병이 특정 계급에서 주로 나타나는 병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지요. 실제 봉건적인 정신치료 관념은 1922년에 빈민들을 위한 빈 정신분석 외래진료소가 문을 열었을 때 의학적인 작업의 요구와 충돌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정신의학자들은 온갖 구실을 들어 반대했고, 의사조합은 의료수입에 손해가 있을지 몰라 두려워했다고 하네요. 이런 정신분석 외래진료소는 오히려 라이히에게는 빈민들의 신경증 메커니즘에 대한 통찰력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정신분석은 대중치료법이 아니라는 게 분명했고, 신경증은 대중 질환, 즉 풍토병과 같은 유행병이지, 못돼먹은 여성들의 괴벽이 아니라는 걸 그는 알게 되었지요. 성기적 성기능의 장애가 외래진료소를 찾게 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고 하는데, 이 지점에서 라이히의 성에 관한 관심과 분석이 이해되었습니다.
라이히는 정신의학에서도 정신분석에서도 환자들의 사회적 생활 조건에 대하여 질문하려고 하지 않은 점을 비판하는데요. 빈곤과 물질적 고통이 있어도 이것이 치료와 관련된 사안으로 간주되지 않은 점을 발견합니다. 이와 함께 그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정신질환의 성적인 병인이 부르주아적 변덕이라고 판단하면서 신경증을 만들어내는 것은 물질적 곤궁이라는 라이히의 의견에 반박하는 점도 비판합니다. 정신의학과 마르크스주의자들 모두 환자들이 처한 상황과 증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관심이 없는 점이 공통적이네요. 라이히는 정신병의 원인이 가족 등 개인적인 상황에 국한된 것도 아니고, 물질적 곤궁처럼 사회적 조건도 해당하는 것을 봤습니다. 빈곤층 사람들의 신경증은 곤궁 속에서 무언가 이성적인 것을 시도하려는 능력, 스스로를 더 효과적으로 관철하는 능력, 노동시장의 경쟁을 견디는 노력, 뭔가를 생각하는 능력을 황폐화합니다. 라이히는 신경증을 단지 ‘부르주아 처녀들의 사치’로 볼 수 없고, 모든 이들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적 학살에 맞선 거칠고 노골적인 반란이라는 의견을 제시했지요. 라이히의 글을 읽기 전까지 신경증 등 정신병은 문명사회에서 부유하게 사는 계층들이 주로 걸리는 질환이라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그의 임상 결과와 이론을 보니, 오히려 빈곤층이 더 위험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다만 이들의 정신병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을 뿐이고요. 라이히는 기존 정신의학의 규정성, 이분법적인 개념에 반기를 들고, 열린 태도에 기반한 임상을 통해 욕망이 어떤 것인지, 쾌락의 메커니즘, 분열자의 생장적인 것의 경험 등을 발견하며 분석했는데, 그는 시대를 굉장히 앞서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이번에 읽은 장에 살짝 언급된 오르곤 에너지에 관하여 얘기를 많이 나눴는데요. 파격적이고 시공간을 뛰어넘는 그의 연구와 행동은 사이비, 광기처럼 인식되었고요. 안타깝게도 그는 미국법정에서 법정모독죄로 언도되어 연방형무소에서 심장발작으로 옥사했습니다. 그가 오랜 생물학적인 관찰과 임상실험 등을 통해 발견한 미지의 생명 에너지인 오르곤 에너지에 대해 더 궁금했는데, 동양철학의 기(氣)와 같은 것 아닌까라는 생각도 해보았지요. 오르곤 에너지는 생명 물리학적 현상에 가까운, 즉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 돌과 같은 사물 등에도 있는 그런 에너지라고 합니다. 어쨌거나 심리학 뿐만 아니라 생물학, 수학, 물리학, 천문학, 물리학까지 전방위에 걸쳐 연구하고 오르고노미라는 학문체계를 형성한 비운의 학자 라이히는 다음에 더 공부해보기로 하고, 다음 주에는 다시 들뢰즈-과타리의 문제로 돌아가 보아요.^^
기승전性과 오르곤 에너지...지난 시간 토론 주위를 계속 맴돌던 두 주제였죠.ㅎㅎ 라이히의 글도 정리해주신 것처럼 흥미로운 지점들이 많았어요. 쾌락을 정신적인 질로 본 점도 그렇고, 분열증자들이 '살아 있는 것, 즉 신체 속에서 생장적인 것'을 경험한다고 보았던 점도 그렇고요. 지난 토론에서 조금씩 나눴던 내용들을 잘 정리해주셔서 읽으면서 다시 떠오르네요. 후기 감사해요 샘!^^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