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이 세미나가 마지막 학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어렵게만 느껴지던 <안티 오이디푸스>도 이제 마지막 4장만을 남겨두고 있네요. 들뢰즈의 저작들은 원래 어려운 게 기본값이지만, 개인적으로 <안티 오이디푸스>는 이전 저작들보다 적응하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습니다. 정신분석학과 경제학 관련 내용과 용어들이 익숙해지지 않아서 저자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더 잡히지 않았던 거 같아요. 하지만 후반부로 가면서 점점 더 흥미로워집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우리의 많은 문제들에 근본적이고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욕망’의 문제, 그리고 그 욕망과 분리될 수 없는 ‘사회’의 문제(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를 면밀히 분석하며 다른 길을 모색합니다. 4장에서는 그 길을 보여줄 ‘분열-분석’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어서 기대되네요.
이번 시간에는 <안티 오이디푸스>로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빌헬름 라이히의 <오르가즘의 기능> 4장 ‘심리학과 성이론’을 읽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 1장에서 라이히를 언급합니다. 그가 던진 물음이 <안티 오이디푸스>를 관통하고 있는 물음과 같기 때문인데요. 라이히 역시 이들처럼 프로이트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를 인식하고 이 둘을 결합하면서 넘어가려 했던 사람이지요. 라이히는 <파시즘의 대중심리>에서 물음을 던집니다. "왜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의 대공황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좌익으로 향하지 못하고 파시즘과 같은 급진적 우익에 경도되는가?" 그리고 들뢰즈와 과타리도 묻습니다.
“<왜 인간들은 마치 자신의 구원을 위해 싸우기라도 하는 양 자신들의 예속을 위해 싸울까?> 어째서 사람들은, 세금을 더 많이! 빵을 더 조금! 하며 외치는 지경까지 가는 걸까. 라이히의 말처럼, 놀라운 건 어떤 사람들이 도둑질을 하고 어떤 사람들이 파업을 한다는 점이 아니라, 굶주리는 자들이 늘 도둑질을 하는 건 아니며 착취당하는 자들이 늘 파업을 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왜 인간들은 몇 세기 전부터 착취와 모욕의 속박을 견디되, 남들을 위해서는 물론 자기 자신들을 위해서도 그런 일들을 바라는 지점까지 간 걸까?”(64쪽)
라이히와 <안티 오이디푸스>의 저자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속박을 견디고 예속을 위해 싸우게 되는 것은 어떤 오해나 착각에 의해서가 아니라고, 우리가 그 속박을, 그 예속을 정말로 ‘욕망’하기 때문이라고요. “대중들은 속지 않았다, 그 순간, 그 상황에서 저들은 파시즘을 욕망했고, 군중 욕망의 이런 변태성을 설명해야만 한다.”(65쪽) 라이히는 욕망을 통해, 욕망의 견지에서 파시즘을 설명하고자 했고, 들뢰즈와 과타리는 그러한 면에서 라이히를 ‘위대한 사상가’라고 칭하면서도 그가 충분히 답하는 데까지는 가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그는 “합리적으로 생산된 현실적 대상과 비합리적인 환상적 생산 간의 이원론”으로 되돌아가면서 “사회장과 욕망의 공통 척도 또는 동일 외연을 찾는 일을 포기”했다고 말입니다(65쪽). 이는 아마도, 토론에서 얘기 나눈 것처럼, 욕망과 사회가 분리될 수 없다는 점까지는 보았던 라이히가 결국에는 이 둘을 다시 구분하고 한 쪽에 대한 설명만을 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하는 것 같습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우리가 어째서 자신의 예속을 욕망하게 되는지 알려면 ‘욕망의 변태성’을 설명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욕망을 그런 식으로 작동하게 하는 외부의 원인을 찾게 됩니다. 토론에서도 그랬지요. 하지만 욕망은 외부의 힘에 의해 작동하는 게 아니라는 점과 그 작동의 메커니즘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이들의 작업이라는 이야기까지 토론에서 나눴습니다. 여전히 의문들이 남았지만, 4장을 읽어나가면서 해소되길 기대해봅니다.
<오르가즘의 기능>에 관해서는 주영샘께서 자세히 정리해주셨으니 참고해주시고, <안티 오이디푸스>도 마지막까지 잘 따라가보아요!
- 다음 시간에는 채운샘의 강의가 있습니다.
- 간식은 황리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수요일에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