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간에는 <안티 오이디푸스> 4장 1,2절을 읽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채운샘께서 지난 강의에서 핵심들을 짚어주셔서 큰 맥락은 어렵지 않게 이해하며 읽어나갔는데요. 토론에서 세세한 내용으로 들어가니 역시 알쏭달쏭한 부분들이 적지 않네요. 저희는 먼저 들뢰즈와 과타리가 재미있는 질문에 비유한 문제, 사회적 투자가 가족적 투자보다 먼저임을 보여주는 부분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닭이 먼저일까 알이 먼저일까? 아버지와 어머니가 먼저일까 아이가 먼저일까? 정신분석은 마치 아이가 먼저인 것처럼 군다(아버지는 단지 자기 어린 시절 때문에 아프다). 하지만 동시에 정신분석은 부모가 먼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아이가 아이인 것은 오직 한 아버지와 한 어머니와의 관계를 통해서이다.)”(459쪽)
저자들이 보기에 정신분석은 무한퇴행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관점에 목을 매는 것 같습니다. 정신적인 문제의 원인을 ‘아버지-어머니-아이’로 구성된 오이디푸스 가족 삼각형 안에서 찾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망상의 근원을 추적해보면, 그것이 우리가 속한 사회장, 경제장, 정치장, 문화장, 인종장, 인종주의장, 교육장, 종교장 등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사실 망상뿐 아니라 우리가 하는 모든 생각이 그러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들뢰즈와 과타리는 위의 질문에 대해 ‘아버지가 아이보다 먼저’라고 답합니다. 하지만 가설적인 의미에서만 그러할 뿐이며, 그 자체로는 의미 없는 이 말이 구체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고 밝힙니다. “사회적 투자들은 가족적 투자들보다 먼저요, 후자는 전자의 적용 내지 복귀에서만 생겨난다. 아버지가 아이보다 먼저라고 말하는 것은 실은 욕망의 투자란 무엇보다 아버지와 아이가 푹 빠져 있는, 이들이 동시에 잠겨 있는 사회장의 투자라고 말하는 것이다.”(461쪽)
무의식을 퇴행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단순한 재생산’이나 ‘생식’에 갇히게 된다고 저자들은 말합니다. 기껏해야 재생산의 대상에 도달할 뿐이고, 오직 순환의 관점만이 우리를 “재생산 주체인 생산에, 즉 무의식의 자기-생산 과정에 도달”(463쪽)하게 합니다. 무의식을 순환 운동의 관점에서 보아야 그것이 자기 생산의 과정임을 알게 된다는 의미인 듯한데요, 저희는 여기서 말하는 '순환 운동'이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토론에서는 질문만 떠오르고 정리되지 않은 채 넘어갔는데요,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연결 접속 채취를 반복하는 욕망 기계의 운동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무의식, 욕망, 욕망 기계라는 용어를 같은 의미로 쓰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이번 부분에서는 성욕과 리비도까지도 거의 같은 의미로 쓰고 있는데, 이것들은 모두 '분자적인 것'이기도 하지요.
지난 강의에서 샘께서 정리해주신 것처럼, 분자적인 것은 측정이 불가능합니다. 측정 불가능한 것을 측정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서 측정 단위를 부여한 게 바로 ‘그램분자적인 것’이지요. 따라서 ‘욕망’이 분자적인 것이라면, ‘사회체’는 그램분자적 욕망의 집적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둘의 관계를 설명하는 내용이 복잡하게 이어지지만, 저자들은 이렇게 정리합니다. ‘분자적 욕망 기계들은 그 자체로 그램분자적 거대 기계들 아래서 형성하는 배열형태들의 투자다.’ 나아가 분자적 욕망 기계들과 그램분자적 사회 기계들이 특정 조건 아래에서는 동일한 기계들이라고도 말합니다. 하지만 욕망 기계만이 자신이 기능하는 것처럼 자신을 생산합니다. 욕망 기계에서만 작동과 형성, 사용과 조립, 생산물과 생산이 합류합니다.
저자들은 욕망 기계와 사회 기계의 관계를 단백질과 DNA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분자생물학에서는 DNA만이 재생산될 뿐 단백질은 아니라고 가르치지만, 단백질은 ‘생산되는 것이자 생산단위’라고 저자들은 말합니다. “단백질이야말로 순환으로서의 무의식 또는 무의식의 자기생산을 구성한다. 즉 단백질은 욕망 기계들 및 욕망의 종합들의 배치체 속에 있는 궁극적인 분자적 요소이다.”(485쪽) 그렇게 생각하니, 분자적인 것과 그램분자적인 것의 관계, 욕망 기계와 사회 기계의 관계가 좀더 와닿습니다. 욕망 기계는 사회 기계 안에서 작동한다, 두 기계는 동일한 기계이기도 하다, 욕망과 사회는 분리될 수 없다, 욕망의 투자는 이미 사회장의 투자다...등의 말들도요.
토론에서 해결되지 않았던 ‘사회체와 기관 없는 몸'의 관계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요.
- 다음 시간에는 <안티 오이디푸스> 4장 3절을 읽고 메모를 적어옵니다.
- 간식은 재겸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수요일 저녁에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