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의 저작들이 대개 그렇지만, 《안티 오이디푸스》는 정말 어떻게 읽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지난 채운쌤 정리 강의 때는 ‘그렇군’ 하면서 듣다가도 정작 책을 읽을 때는 깜깜해지니까요. 토론하면서도 조금 느낌이 왔다가 돌아서면 또 사라집니다. ㅋㅋ 이 깡깡 소리나는 공부를 어찌해야 할까요... ㅠ 그나마 조금이라도 빨리 이러한 사유를 알았다는 것 정도가 위안이 될까요? 지금부터 한 10년 정도 공부하면 40에는 손톱만큼이라도 알 수 있겠죠. 그럼 혼란스러운 후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주인공은 무의식
4장 〈분열-분석〉에서는 ‘무의식이야말로 생산의 주체’라는 것을 얘기합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반복해서 ‘무의식’을 다르게 정의하려고 노력하는데요. 정신분석에서 무의식이 ‘억압된 의식’, ‘의식되지 않은 것’, ‘의식의 부정’ 같은 것으로 취급됐었다면, 분열-분석에서는 의식을 가능케 하는 잠재적 차원의 운동으로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정신분석에서 ‘오이디푸스’라는 관념을 무의식으로 억압하는 것을 치료로 봤다면, 분열-분석에서는 어떤 조건에서 ‘오이디푸스’라는 관념이 생산되는지에 주목하죠. 4장의 시작인 ‘사회장’이란 제목은, ‘오이디푸스’라는 관념은 애초에 가지고 태어나는 게 아니라 사회와 더불어 생산되는 것임을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들뢰즈와 과타리에 따르면, ‘오이디푸스’는 편집증자인 아버지가 자신의 아버지와 관련해서 아이가 됐을 때 발생하는 관념입니다. “오이디푸스는 신경증자의 어린 시절의 느낌이기에 앞서 편집증자 어른의 관념이다. 그래서 정신분석은 다음과 같은 무한퇴행에서 좀처럼 떠나지 못한다. 아버지는 아이여야 했지만, 아버지와 관련해서만 아이일 수 있었고, 또 이 아버지 자신은 자기 아버지와 관련해서 아이였다.”(460) 그러니까 ‘오이디푸스’는 아이였을 때의 성욕이 분출하는 게 아니라 이미 어른이 된 아버지의 욕망이 분출된 것이죠. 여기서 들뢰즈와 과타리는 오이디푸스가 형성되는 원리를 분석함으로써 욕망이 가족 같은 내밀하고 고유한 장소가 아니라 언제나 사회적 관계 속에서 형성되고 분출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오이디푸스적인 관념이 형성될 수 있었을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의식’에 주목해야 합니다. 정신분석에서 무의식은 의식의 퇴행을 통해 발견되고, 동일한 욕망만을 재생산하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그러나 들뢰즈와 과타리는 무의식의 운동 양상을 ‘순환’이라고 규정하는데요. 이때 ‘순환’이란 건 “무의식의 자기-생산”을 의미합니다.(463) 토론 때는 이 부분이 잘 풀리지 않았던 것 같은데요. 아마도 정신분석에서 의식과 무의식을 어떻게 얘기하든 결국 주체적인 욕망, 인격적인 무엇을 소환하는 데 그친다면, 분열-분석에서는 무의식적인 운동, 주체적이거나 인격적인 개인으로 환원되지 않는 운동이 언제나 작동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토론에서는 이를 생각의 주인공은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이라는 들뢰즈와 과타리의 주장이라고 했었죠. 들뢰즈와 과타리는 우리의 의고주의적 습성과 혁명적 권력도 무의식의 진동에 불과하다고 말하는데요. 저는 이 부분에서 뭔가 감탄하고 말았습니다. 과연 무의식을 어디까지 밀고 나갈 수 있는지 참 궁금해집니다.
“필경 무의식의 놀라운 진동들이, 망상의 한 극에서 다른 극으로 오가는 진동들이 존재한다. 가끔 최악의 의고주의들 한가운데에서도 뜻밖의 혁명적 권력이 풀려나오기도 하고, 거꾸로 그것이 파시즘으로 향하거나 파시즘에 갇혀 버려 다시 의고주의에 빠지기도 한다. (…) 무의식의 이 진동들, 리비도적 투자의 한 유형에서 다른 유형으로의 이 은밀한 이행들, 그리고 종종 이 두 유형의 공존은 분열-분석의 주요 대상들 중 하나이다.”(465)
사회체와 기관 없는 몸
사회장을 분석할 때, 들뢰즈와 과타리는 이것이 마치 우리 사고 혹은 욕망의 기원이라고 얘기하지는 않습니다. 분명 가족적 투자보다 사회적 투자가 우위에 있는 것처럼 말했지만, 애초에 ‘가족적 투자’와 ‘사회적 투자’의 실체가 어딘가에 따로 있는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철저하게 욕망을 사회적인 것, 관계적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때 관계를 구성하는 존재들도 인격적인 개인이 아니라 이미 어떤 집단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죠.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이 기계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잘 모르겠네요.)
따라서 들뢰즈와 과타리는 어디까지나 가족적 투자가 아니라 그것의 전제가 되는 사회적 투자를 분석하고,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사회적 투자가 일어나는 사회체를 분석합니다. 그런데 이때 우리의 의식이 항상 무의식의 작동 속에서 특정하게 나타나듯, 사회체 또한 ‘기관 없는 몸’이란 잠재적 차원의 작동 속에서 나타납니다. 저희가 앞에서 살펴봤던 것처럼, 사회체는 동일한 모습으로 나타난 적이 없습니다. ‘원시 영토사회’, ‘전제 군주사회’, ‘자본주의 사회’ 모두 독특한 사회체였죠. 여기서 사회체들이 이렇게 존재할 수 있는 근거 동시에 다른 사회체로 이행할 수 있는 근거가 ‘기관 없는 몸’입니다.
토론에서는 ‘사회체가 기관 없는 몸을 포함하는 것이냐’, ‘사회체와 기관 없는 몸은 포함관계가 아니다’ 이런 얘기들이 오갔는데요. 끝날 때까지 뭐가 더 정확한 것인지 후기를 쓰는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회체의 극한에서 기관 없는 몸이 나타난다는 문장과 편집증과 분열증이 기관 없는 몸 위에서 나타난다는 문장 둘 다 있기 때문인데요. 어디서는 사회체와 달리, 기관 없는 몸은 생산과 투자를 담당하는 주체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또 어디서는 기관 없는 몸에서 생산과 투자가 일어난다고 말해서 헷갈립니다...
중요한 건 기관 없는 몸의 두 측면, 그램분자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을 대립적이지 않게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편집증과 분열증 둘 중 하나가 더 낫다고 얘기하지 않는 것처럼, 그램분자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 둘 중 하나만이 정확한 분석이라고 얘기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우리의 편집증적 사고가 분열증의 작동과 분리할 수 없는 것처럼, 그램분자적인 것도 분자적인 것을 전제하지 않고 나타날 수 없음을 말하려는 것 같아요. 토론에서는 개체의 죽음에 대한 이해를 예로 들어서 설명했었죠. 그램분자적으로 봤을 때는, 개체의 죽음은 소멸이지만, 분자적으로 봤을 때는 ‘소멸’이 아닌 ‘생성’과 ‘변형’입니다. 정확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들뢰즈와 과타리의 논의를 이분법적으로 보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까지 얘기한 다음에는 시간이 거의 다 됐습니다. 그래서 2장 ‘분자적 무의식’은 거의 얘기하지 못했는데요. ㅎㅎ;; 다음 시간에 마저 얘기하기로 했으니, 다음 후기에게 토스하겠습니다!
저는 욕망과 사회, 기관 없는 몸과 사회체, 분자적인 것과 그램분자적인 것의 관계가 들뢰즈가 전작들에서 이야기하는 '잠재적인 것과 현실화된 것'의 관계처럼 느껴져요. 넘 도식적이긴 하지만요.ㅎㅎ 매번 헷갈리고 돌아서면 또 모르겠지만, 끝까지 함 따라가보자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