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간에는 <안티 오이디푸스> 4장 3절을 읽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제목(‘정신분석과 자본주의’)에서 알 수 있듯이, 3절에서는 정신분석과 자본주의가 어떻게 서로를 전제하며 강화하는 관계에 있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둘이 매우 긴밀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번 부분에서 그 구체적인 연줄에 관해 풀어주고 있어서 흥미롭게 읽었는데요. 저희는 먼저 이 연줄에 관한 이야기로 토론을 시작했습니다.
“리카도가 재현 가능한 모든 가치의 원리로 양적 노동을 발견함으로써 정치경제학 또는 사회 경제학을 정초한 것과 마찬가지로, 프로이트는 욕망의 대상들과 목표들의 모든 재현의 원리로 양적 리비도를 발견함으로써 욕망 경제학을 정초한다. 리카도가 노동의 주체적 본성 내지 추상적 본질을 발견한 것과 마찬가지로, 프로이트는 욕망의 주체적 본성 내지 추상적 본질을 발견하는데, 이들은 욕망과 노동을 객체들, 목표들 또는 특히 심지어 원천들에 결부해 왔던 모든 재현을 넘어갔다.”(500쪽)
자본주의는 이전 사회체들과 달리 탈코드화된 흐름들 위에 구성된 사회체입니다. 하지만 탈코드화의 흐름들은 자유롭게 흘러가지 못하고 곧바로 ‘인조적이고 인공적인 재코드화’의 운명을 맞이하게 되지요. 탈코드화된 흐름들은 코드들의 자리를 대신한 공리계 속에 묶여버리는데, 노동과 욕망에 관한 코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리카도가 추상적 노동을 발견하고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발견하면서 노동과 욕망은 ‘주체적이고 추상적인 본질’을 지니게 됩니다. 이러한 본질은 정치경제학과 정신분석 둘 모두의 발견이고, 이전의 재현 체계를 넘어서며 새로운 재현 체계를 구축합니다. 맑스는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고 하네요. “주체적•추상적 본질이 자본주의에 의해 발견되는 것은 재차 사슬에 묶이고 소외되기 위해서요, 또 이 일은 객체성으로서의 외부적이고 독립된 요소 속에서가 아니라, 사유재산이라는 주체적 요소 그 자체 안에서라는 점이 진실이라고.”(505쪽)
들뢰즈와 과타리는 탈코드화된 흐름들의 공리화를 조건 짓는 것이 ‘사유재산이라는 형식’이라는 점을 지적합니다. 자본주의의 인조적 재영토화들의 중심을 구성하는 것도, 자본주의의 이미지들을 생산하는 것도 모두 사유재산의 형식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사유재산이라는 형식’은 정신분석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들뢰즈와 과타리에 따르면, 사유재산에서 재현되는 ‘주체적•추상적 노동’은 사유화된 가족에서 재현되는 ‘주체적•추상적 욕망’을 상관항으로 갖습니다.
“정치경제학은 그 첫째 항을 떠맡고, 정신분석은 그 둘째 항을 떠맡는다. 정신분석은 정치경제학을 공리계로 삼는 적용 기술이다. 요컨대 정신분석은 자본주의의 고유한 운동 속에서 둘째 극을 되찾는데, 이 운동은 규정된 커다란 객관적 재현들을 무한한 주관적 재현으로 대체한다.” (506쪽)
자본주의와 정신분석은 모두 사유화, 사적 영역이라는 형식에 기반합니다. 자본주의 공리계에 붙잡혀 있는 욕망의 탈코드화된 흐름들은 사적 영역인 가족장으로 필연적으로 복귀하게 됩니다. 라이히는 정신분석이 사회적 탄압에 복무하는 방식을 고발했지만, 들뢰즈와 과타리는 그가 정신분석과 경제적 메커니즘의 의존 관계를 보지 못했다는 점에서 충분히 멀리 간 것이 아니라고 비판했지요. 정신분석은 코드가 해체되면서 아무것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다시 믿게 만들고, 이들에게 ‘사적 영토성, 사적 원국가, 사적 자본’을 다시 만들어줍니다. 들뢰즈와 과타리가 제안하는 ‘분열-분석’은 바로 이런 까닭에 “거꾸로 전력을 다해 필요한 파괴들에 전념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과업을 위해서는 그 어떤 악의적 활동도 결코 지나치지 않으리라.”(521쪽)
후반부에서 들뢰즈와 과타리는 우리가 가장 궁금해하는 물음을 던집니다. ‘욕망적 생산의 탈코드화되고 탈영토화된 흐름들은 어떻게 해야 인조적인 재영토화의 영토성으로 복귀하지 않을까?’ 앞에서도 이들은 ‘과정으로서의 분열증’을 이야기한 바 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일 수 있을지는 잘 떠오르지 않는 게 사실입니다. 이번 부분에서는 ‘광기’에 관한 규정이 흥미로워 토론에서도 이야기를 나눴는데요. 저자들에 따르면, 탈영토화된 흐름들은 재영토화에서 ‘광기의 흐름의 상태’로만 존속하는데, 이 흐름이 ‘광기의 흐름’으로 정의되는 이유는, 이것들이 다른 흐름들 속에서 공리계들과 재영토화의 적용들을 빠져나가는 모든 것을 재현하기 때문입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광기에 대한 정신의학의 규정에 대항하여 ‘반-정신의학의 참된 정치’를 이야기합니다. “반-정신의학의 참된 정치는 1) 광기를 정신질환으로 변형하는 모든 재영토화를 해체하고, 2) 모든 흐름에서 그 분열증적 탈영토화 운동을 해방하는 데 있으며, 그 결과 이 성격은 어떤 특수한 잔여물을 광기의 흐름으로 규정할 수 없으며, 노동, 욕망, 생산, 인식, 창조의 흐름들 역시도 그 가장 깊은 경향성 속에서 변용한다. 광기는 더 이상 광기로서 실존하지 않으리라.”(532쪽) 이들은 광기가 과학과 예술을 포함한 모든 다른 흐름의 협조를 받는 한 광기로 실존하지 않을 거라고, ‘정신질환으로서의 광기’라는 재영토화를 해체할 수 있을 거라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탈영토화된 흐름들을 재영토화하는 자본주의의 속도를 따라가는 일은 참 만만치가 않지요. 그럼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를 쓰고 따라가며 ‘전력을 다해 필요한 파괴들에 전념하는 일’ 외에는 없어 보입니다. 저희가 마지막에 주목한 문장에서처럼, 빠르면서도 아주 참을성 있고 아주 신중하게, 말이죠.
“분열-분석은 자신의 파괴적 임무에 있어 가능한 한 가장 빨리 진행해야 하지만, 또한 환자가 개인사(個人史)에서 겪는 재현적 영토성들과 재영토화들을 차례로 해체하면서 아주 참을성 있고 아주 신중하게만 진행할 수 있다.”(528쪽)
- 다음 시간에는 <안티 오이디푸스> 4장 4절을 읽고 메모를 적어옵니다.
- 간식은 영주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수요일 저녁에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