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에는 <안티 오이디푸스> 4장 4절 ‘분열-분석의 첫째 정립적 임무’를 읽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3절에서 들뢰즈와 과타리는 분열-분석의 파괴적 임무를 언급하며, 이를 ‘무의식의 전적인 청소와 소파(搔爬)’라고 표현하지요. 이 임무는 정신분석이 만들어낸 가상들(오이디푸스, 자아, 초자아, 죄책감, 법, 거세...)을 ‘아주 참을성 있고 아주 신중하게’ 하나하나 해체하는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4절에서는 이 파괴적 임무들과 뗄 수 없는 또 다른 임무, 반드시 동시에 추진되어야 하는 ‘정립적 임무’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첫째 정립적 임무는, 모든 해석으로부터 독립해 주체에게서 그의 욕망 기계들의 본성, 형성 내지 작동을 발견하는 데 있다. 너의 욕망 기계들은 무엇일까? 네가 네 기계들 속에 들어가게 하는 것은 무엇이며, 나오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어떻게 작동할까? 너의 비-인간적 성들은 어떤 것일까? 분역-분석가는 기계공이요, 분열-분석은 오로지 기능적이다.” (535쪽)
들뢰즈와 과타리는 이 정립적 임무를 ‘기계론적 임무’라고 부르며, 분열-분석가를 기계공, 미시-기계공이라고 부릅니다. 이 기계공은 뭔가를 해석하거나 연출하는 자가 아니죠. 욕망 기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어떤 종합들을 행하고 어떤 고장들로 구성되는지, 어떤 흐름들과 어떤 생성들이 있는지를 발견하는 자입니다. 그렇게 해서 욕망의 흐름을 봉쇄하는 것들을 파괴하고 욕망 기계들을 재가동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분열-분석의 임무고요. 이를 위해 들뢰즈와 과타리는 욕망 기계의 ‘분자적 분산 요소’와 ‘기계적 배치체들’에 주목합니다.
앞에서도 본 것처럼, 욕망 기계는 '구조적 통일성'이나 '하나로서의 전체성'을 지니지 않습니다. 이 기계는 ‘부분대상들’을 부품으로 가지며, 이 부분대상들은 ‘작동하는 기계’ 또는 ‘일하는 부품들’로 불립니다. 이것들은 상호 독립성을 지니지만, “한 부품이 끊임없이 완전히 다른 기계의 부품과 관련되는 그런 분산 상태”(536쪽)에 있습니다. 이런 분산 상태가 무엇일지 잘 떠오르지 않는데, 저자들의 설명은 우리를 더욱 미궁으로 밀어넣습니다. ‘그것들은 동일한 존재물의 반대 규정들(인간의 성에서 남성과 여성처럼)이어서도 안 되고, 서로 다른 것 또는 현실적으로 구별되는 것(클로버와 뒝벌)이어야 한다.’ 마치 ‘구별되면서도 하나이다’ 같은 설명이어서 토론 중에 여러 이야기가 오갔는데요, 나중에 ‘기관 없는 몸’에 관해 얘기나눌 때도 그랬지만, 자꾸 어떤 실체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어서 이해가 더욱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애초에 욕망 기계의 핵심이 작동(연결, 접속, 생산)이듯, 그 부품들인 부분대상들도 작동과 기능의 측면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걸 자꾸 잊어버립니다. 하지만 욕망 기계와 부분대상들에 관해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것이, 무의식(욕망)의 작동 방식이 결핍과 아무 상관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는 점까지 토론에서 짚어보았습니다.
“부분대상들은 기관 없는 몸의 직접적 권력들이며, 기관 없는 몸은 부분대상들의 원료이다.” (542쪽)
‘기관 없는 몸’이 등장할 때마다 저희는 혼란스러워집니다. 4절에서는 부분대상들과 기관 없는 몸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이것들을 욕망 기계의 두 질료적 요소로 명명합니다. 기관 없는 몸은 기관들-부분대상들을 밀쳐 내거나 끌어당기고 전유합니다. 이러한 작용으로 기관 없는 몸은 ‘반생산의 무형의 유체’로, ‘흐름의 생산을 전유하는 받침대’로 생산됩니다. 하지만 기관 없는 몸은 부분대상들을 밀쳐낼 때조차도 이것들과 대립되지 않습니다. 이 둘이 대립되는 것은 유기체지요. 부분대상들은 조각나고 파열된 유기체와 같은 것이 아니며, 기관 없는 몸은 다시 접착된 하나의 유기체와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몸’이라는 단어 때문에 자꾸 유기체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지만, 들뢰즈와 과타리는 기관 없는 몸과 기관들이 하나의 전체로 통일되는 유기체와 같지 않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욕망은 바로 몸을 지나가고, 기관들을 지나가지, 결코 유기체를 지나가지 않는다.”(541쪽) 기관 없는 몸은 ‘하나의 전체’로서 생산되지만, ‘부분들 곁에 있는 하나의 전체’로서 생산됩니다. 이 전체는 부분들을 통일하지도 전체화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면서 ‘현실적으로 구분되는 하나의 새로운 부분’으로서 부분들에 덧붙습니다. 이런 ‘전체와 부분’의 관계도 나올 때마다 어려운데요, 한편으로는 이 두 요소, 기관 없는 몸과 부분대상들이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실제로 ‘하나의 같은 것, 하나의 같은 다양체’라고 표현되기도 하고요. 잡히지 않고 혼란스러운 개념들이지만, 이것들이 모두 무의식의 작동과 기능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계속 놓치지 말아야겠습니다.
4절 후반부에서는 기관 없는 몸이 ‘죽음의 모델’로 언급됩니다. 또 죽음의 모델과 구별되는 ‘죽음의 경험’을 저자들은 ‘무의식의 가장 일상적인 일’이라고 말합니다. 죽음의 경험은 삶 속에서, 삶을 위해, 모든 이행과 모든 생성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이런 규정들이 프로이트의 ‘죽음 본능’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라는 건 알겠지만, 죽음의 모델과 죽음의 경험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 ‘죽음을 분열증화하는 것’은 무엇인지 등에 관해서는 토론에서 이야기를 나눠보았지만 여전히 감이 잘 오지 않습니다. 뒤로 이어지는 죽음 본능에 관한 내용은 거의 나누지 못했는데, 다음 시간에 이어서 좀더 이야기해보면 좋겠습니다.
- 다음 시간에는 <안티 오이디푸스> 4장 5절을 읽고 메모를 적어옵니다.
- 간식은 민호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수요일 저녁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