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끝이 보인다! 이제 들뢰즈와 과타리는 <안티오이디푸스>의 논의들을 갈무리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이 엄청난 책과 함께한지 어언 일 년... 읽을 땐 안개 속에 있는 듯 헤롱거리다가 모여서 떠들면 뭐라도 발견한 듯 떠들게 되는 건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도 마지막 4부의 5장 ‘분열-분석의 두 번째 정립적 임무’까지 다다르긴 했습니다. 이제 부록만이 남았네요! 그럼, 이번 시간에도 여지없었던 더듬더듬-왁자지껄-‘아하!’의 장면들을 좀 스케치해보겠습니다.
내재적 이원성 : 분자적인 것의 모든 투자는 그램분자적이다
“근본적으로는 두 극이 있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두 극을 그램분자적 구성체들과 분자적 구성체들의 이원성으로 제시해야만 한다면,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제시하는 데서 그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 자체로 그램분자적 구성체의 투자가 아닌 분자적 구성체는 없기 때문이다.”(563쪽)
둘이지만 하나입니다. 체제에서 차이가 있어도 본성의 동일성은 계속됩니다. 분자적인 것과 그램분자적인 것, 욕망 기계들과 사회 기계들, 분자적 사슬과 코드 내지 공리계의 그램분자적 블록들. 이 둘의 관계는 대립이 아닙니다. 둘은 서로 다른 항이 아닙니다. 하나는 다른 하나와 외재적으로 구분되지 않습니다. 두 극의 이원성은 내재적 이원성입니다. 둘은 동시적입니다. “본래 뗄 수 없고, 또 하나의 동일한 생산을 구성”하지요. 그렇기에 분자적인 것과 그램분자적인 것이 이원적인 게 아닙니다. 이원성은 그램분자적-사회적 투자들의 내부에 있습니다.
사회장의 투자는 분열증적 극에도 편집증적 극에도 항상 있으며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왕복운동이 가능합니다. 이는 도처에 그램분자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이 있고, 둘은 포괄적 분리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 관계는 어느 쪽이 어느 쪽에 종속되느냐에 따라 변주되는데, 언제나 상호함축적입니다. 저희는 이것을 잠재적인 차원과 현실화되는 차원으로 얘기했습니다. 현실화되는 차원은 언제나 잠재적 차원에 의한 것이지만, 그런 현실화가 잠재성을 제지하기도 합니다. “큰 집합들, 큰 군집 형식들은 이것들을 운반하는 도주를 방해”합니다. 이것이 한 극이죠. 다른 극에는 도주 자체가 있는데, “그것은 사회적인 것을 부식시키고 꿰뚫는 구멍들의 다양체를 통해 사회적인 것을 도주시”킵니다. 어쨌든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층위는 사회장, 즉 현실화되는 평면입니다. “이 점에서 분열-분석의 첫째 테제는 다음과 같다. 모든 투자는 사회적이며, 온갖 방식으로 역사·사회장에 결부되어 있다.”(566쪽)
순서의 문제 : 군집 형식(그램분자적 구성체)이 선별한다
“최초의 군집성을 전제하는 것이 선별이 아니라, 오히려 군집성이 선별을 전제하고 선별에서 탄생한다. (...) 군집성들은 결코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창조적 선별에 의해 그것들을 생산하는 특정하게 규정된 형식들과 관련되어 있다. 순서는 군집→선별이 아니고, 반대로 분자적 자다양체→선별을 행하는 군집성의 형식들→선별에서 나오는 그램분자적 내지 군집적 집합들이다.”(568쪽)
“모든 투자는 그램분자적이고 사회적”이라면, 문제는 그 투자의 순서를 헷갈리지 않는 것입니다. 저희는 보통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떤 남자/여자가 어떤 남자/여자를 욕망한다. 이는 특정한 군집으로부터 특정한 욕망의 방향성 및 선택이 이뤄진다는 생각이죠. 특정 군집은 특정한 선별을 전제한다는 생각. 이는 욕망이 어떤 정체성 혹은 주체에 귀속된다는 식의 생각입니다. 유기체적이죠. 하지만 들/과는 다른 순서를 말합니다. 군집성은 맨 마지막입니다. 마구 흘러다니는 어떤 미시적 힘들이 먼저 있고, 그런 힘들에 방향성을 부여하는 ‘큰 수의 법칙들과 통계적 축적’이 존재합니다. 니체는 그것을 ‘통치 구성체들’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한 ‘군집성의 형식들’이 “조직들과 결핍들과 목표들을 고정하면서 전체화하고 통일하고 의미화하는 객체성들의 역할”을 합니다. 그 형식들이 욕망에 목적, 목표, 의도를 줍니다. 즉 선별을 행합니다. 군집이 선별하는 것이 아니죠. 군집 이전의 형식들이 선별합니다. 군집 내지 정체성은 그 선별의 결과로 따라나오는 것이죠. 예를 들어보자면, 무수한 분자적 흐름들이 있고, 그것들에 방향을 부여하는 형식들이 있으며, 그 선별의 결과로 나오는 그램분자적 집합들이 있게 됩니다. 정체성 내지 군집성, 즉 동성애/이성애/남성/여성의 규정은 마지막이죠.
그런데 군집성의 형식이란 뭘까요? 저희는 선별자로서의 이 중간 단계가 매우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했는데요. 첫째는, 욕망이 결코 주체에 종속되지 않음을 보여주기 때문이고, 둘째는, 욕망적 생산이 아무렇게나 접속되지 않음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즉 욕망은 훈련의 영향을 받으므로 다르게 훈련시킬 여지가 있음! 그러나 이 형식들은 원래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디서 올까요? 들/과는 그 형식들이 바로 사회체들의 충만한 몸(토지, 전제군주, 돈-자본)이라고 합니다. 그것들이 욕망적 생산의 목표들과 목적들을 고정하는 권력 형식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욕망의 분자적인 생산들과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닙니다. 형식들은 “생산력들의 내공적 발전 상태 내지 발전 단계에 의존한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사회적 생산은 특정한 조건들 아래에서 욕망적 생산 자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 특정한 조건들은 사회체 내지 충만한 몸으로서 군집의 형식들이며, 이 형식들 아래에서 분자적 구성체들은 그램분자적 집합들을 구성한다.”(569쪽)
분열-분석의 테제들 : “어안이 벙벙한 욕망이로다”
“첫째 테제―모든 투자는 그램분자적이고 사회적이다”
“둘째 테제―사회적 투자들 속에서 계급 내지 이해관계의 전의식적 투자와 욕망 내지 집단의 무의식적 리비도 투자를 구별하라”
“셋째 테제―사회장의 리비도 투자는 가족적 투자들과 관련해 1차적이다”
“넷째 테제―사회적 리비도 투자의 두 극” 반동적·파시즘적·편집증적 극과 혁명적·분열증적 극
들/과는 친절하게도 헷갈리지 말아야 할 길들을 차근히 제시해줍니다. 세미나에서 저희가 가장 흥미롭게 이야기한 것은 두 번째 태제와 관련한 것이었습니다. 사회장에 투자되는 것, 즉 우리가 말하고 생각하고 느끼고 원하면서 현실화시키는 것들은 전의식적인 투자와 무의식적인 투자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전의식, 즉 언어로 끌어올려 번역할 수 있는 영역은 계급, 인종, 이해관계, 이데올로기, 목표, 가치관, 신앙 등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가치와 사상과 이념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위해 투쟁하고, 그것을 느끼기도 하지만 리비도는 그런 길목만을 따라 흐르지 않습니다. 그런 가시적이고 가지적인 요소들만 가지고는 설명되지 않는 흐름이 보입니다. 이해관계도, 계급적 입장도, 그 어떤 납득 가능한 인과도 아랑곳 않고 뻗치는 기이한 욕망들. “왜 대중들은 파시즘을 욕망했을까?” 이 깊은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욕망의 무의식적인 리비도 투자를 생각해야 합니다.
리비도 투자는 체제가 아니라 근원과 관련됩니다. 그램분자적인 것이 아니라 분자적인 것, 종합들이 의존하고 그것들을 조건 짓는 힘들과 에너지들의 발전 정도에 관여하는 것이죠. 목적이나 의도, 이해관계 이전의 차원으로 투자되는 것이죠. 의미나 목적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투자에서 의미나 목적이 나오죠. “무의식적 리비도 투자는 우리가 다른 쪽보다 오히려 이쪽에서 우리의 이해관계를 찾도록 규정하며, 우리의 모든 기회가 바로 거기에 있다고 설득함으로써 그 길 위에 우리의 목표들을 세우도록 규정한다. 왜냐하면 사랑이 우리를 거기로 몰아가니까.”(572쪽) 그러니까 무의식적 리비도 투자에는 이유나 원인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유는 사후에 마련되는 것입니다. 쾌/불쾌라는 설명으로도 부족하죠. 이해관계 없는 사랑, 사심 없는 사랑이 흘러다닙니다. 결코 충분히 흐를 수도 절단할 수도 코드화할 수도 없는 흐름들.
“가장 낙후된 자들, 가장 배제된 자들이 자기들을 압제하는 체계를 열정적으로 투자하는 일이 흔히 있는데, 이들은 바로 그 체계에서 이해관계를 찾고 또 측정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어떤 이해관계를 항상 발견하는 것이다. 이해관계는 언제나 뒤따라 다닌다.”(574쪽)
이 구절을 정말 와 닿습니다. 왜 우리가 우리의 예속을 열망하게 되는지, 왜 스스로를 억압하는 것을 불쾌해하면서도 즐기는지가 이해가 됩니다. “타인들과 자기 자신의 짭새로 있는 것, 바로 이것이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것이다.” 가난하고, 못 배우고, 바보 같아서 파시즘에 끌리는 게 아닙니다. 마친가지로 아리아인의 부흥이라는 장엄한 목적 때문도 아니죠. 그렇게 규정가능한 이유나 이해관계보다 더 먼저 어떤 끌림이 있습니다. 그건 연설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 각 맞춘 군대의 모습에, 혹은 그들의 로고나 어떤 특징에 끌리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박정희의 30년 된 허리띠에 끌립니다. 암살당한 그 순간에도 거기에만 눈이 가는 것이죠. 그 옆에 수발들던 여배우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문제되지 않습니다. 모두가 감명 깊게 읽었다고 한 문장을 인용합니다.
“목표 없는 폭력이여, 기쁨이여, 흐름들에 의해 횡단되고 분열들에 의해 절단되는 기계의 한 톱니바퀴라고 자신을 느끼는 순수한 기쁨이여. (...) 리비도 속에서 일종의 예술을 위한 예술이여. 은행가, 짭새, 군인, 기술 관료, 관료 등 각자가 자기 자리에서 잘 노동하려는 취향이여. 또한 노동자, 조합 등도 왜 이렇지 않으랴. 어안이 벙벙한 욕망이로다.”(574쪽)
저희는 세 번째 테제에 대해서도 재미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언제나 가족보다 사회체가 선행한다는 건 반복되어온 말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특별했던 점은 들/과가 프로이트에게서 프로이트를 넘어갈 요소를 발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프로이트 자신은 잘 모르고 있지만요. 그것은 바로 가족삼각형을 향하지 않는 욕망들에 대한 이례적인 증언들입니다. “프로이트가 연구한 증례들 어디에나 현존하는 하녀들의 주제에는, 프로이트 사상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망설임이 (...) 생산되고 있”(584쪽)습니다. 하녀나 귀족 여성으로 향하는 욕망들, 비-가족적인 대상들로 향하는 욕구들. 정신분석은 그것들을 모두 가족적 상징으로 덮으려고 시도했지만, 그러한 시도는 성공적이지 않습니다. “가족-되적 절단들이 지나가지 않는 가족이란 없으며, 리비도는 비-가족적인 것을, 말하자면 ‘가장 부유한 자 내지 가장 가난한 자’의 때로는 동시에 이 둘의 경험적 형태들 아래서 규정된 다른 계급을, 성적으로 투자하기 위해 이 절단들에 휩쓸려 들어간다.”(586쪽) 아이가 어머니를 욕망할 때조차, 아이는 거기서 어떤 독실한 여인, 부유한 여인, 하녀나 왕녀, 젊거나 늙은 여자, 동물이나 성녀를 봅니다. 아버지는 결코 순수한 아버지가 아니라 CEO거나 희생하는 노동자거나, 선생님이거나, 다른 무언가이빈다. 밀고 들어오는 것은 사회장이지요. 부모 자신은 이런 저런 지대 속에 할당된 채 등장하지만, 부모와는 다른 형태로 등장합니다. 사회장만이 욕망의 조직자요, “내공 지대들의 리비도 투자를 규정”합니다.
뒤의 이야기들은 다음 시간에 부록과 함께 이야기 나누면 될 것 같습니다! 이제 슬슬 왜 들/과가 <안티오이디푸스>로 그치지 않고 <천개의 고원>을 써야했는지가 궁금해집니다!
후기를 읽다보니, 지난 시간에 나눈 재미난 이야기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ㅎㅎ 둘이면서 하나인 그램분자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 선별의 문제, 어안이 벙벙한 욕망의 문제... 뒤로 가면서 들뢰즈와 과타리는 우리가 계속 궁금하게 여겼던 문제들에 답을 해주고 있어서, 읽기도 토론도 더욱 흥미진진해집니다~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