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간에는 <안티 오이디푸스> 4장 5절을 읽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5절을 마지막으로 <안티 오이디푸스>의 본문은 끝나지만, 1973년 증보판에 추가되었다는 '부록'이 아직 남아 있지요. ‘욕망 기계들을 위한 프로그램 결산’이라는 제목에서 유추되듯이, 욕망 기계를 정리해주는 글이 아닐까 싶습니다. 5절에서는 마지막 부분인 만큼 중요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었는데요, 우리가 계속 궁금해하던 문제, 라이히가 제기한 중요한 질문(‘왜 대중은 파시즘을 욕망했을까?’)과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답해주고 있어서 토론도 더욱 흥미로웠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민호샘이 잘 적어주셨으니, 저는 간단하게만 덧붙여보겠습니다.
저는 욕망과 사회의 관계, 분자적인 것과 그램분자적인 것의 관계를 어렴풋이 ‘잠재적인 것과 현실화된 것’의 관계로 생각하게 되었는데요. 5절에서 둘의 관계를 묘사하는 부분을 읽으면서도 그런 인상을 받았습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본성이 동일하지만 체제가 다른 두 극’으로 설명하지요. 욕망 기계와 사회 기계, 분자적 구성체와 그램분자적 구성체, 욕망적 미시-다양체와 큰 사회 집합들... 표현은 다르지만 모두 ‘동일한 본성을 지니지만 다르게 드러난 두 체제’를 일컫는 말입니다. 둘의 관계는 이렇게 표현되지요. 사회 기계는 그 톱니바퀴들 속에 욕망 기계들의 부품을 갖고 있다, 사회 기계들 바깥에 실존하는 욕망 기계란 없다, 욕망적 미시-다양체들은 큰 사회 집합들 못지 않게 집단적이다. “코드 내지 공리계의 그램분자적 블록들 전반을 가로채고 재생산하지 않는 분자적 사슬도 없으며, 분자적 사슬의 단편들을 포함하거나 밀봉하지 않는 그런 블록들도 없다”(563쪽)
도처에 그램분자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이 있고, 이것들은 ‘포괄적 분리’의 관계에 있으며, 이 관계는 두 방향에 따라 변주합니다. 하나는 분자적 현상들이 큰 집합들에 종속되는 방향이고 , 다른 하나는 분자적 현상들이 큰 집합들을 자신에게 종속시키는 방향입니다. 후자는 분열증적 도주의 방향인데요, 이런 도주는 “사회적인 것을 부식시키고 꿰뚫는 구멍들의 다양체를 통해 사회적인 것을 도주”시킬 뿐만 아니라, 언제나 사회적인 것에 직결되어 있으며, “파열해야 할 것을 파열시키고 몰락해야 할 것을 몰락시키고 도주해야 할 것을 도주시키는 분자적 충전들을 도처에 배치하고, 각 지점에서 과정으로서의 분열증으로 변환”(565쪽)하게 합니다.
이런 도주를 감행하는 ‘분열자’와 ‘혁명가’는 한 끗 차이라는 설명도 흥미로웠는데요. 들뢰즈와 과타리는 둘의 차이를 “도주하는 자와 그가 피하는 것을 도주하게 할 줄 아는 자의 차이”(565쪽)로 보았죠. '분열자는 혁명적이지 않지만, 분열증적 과정은 혁명의 퍼텐셜'이라고 표현합니다. ‘임상 존재로서의 분열자’는 분열증적 과정을 중단한 자를 말하는데요, 들뢰즈와 과타리는 5절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 과정을 욕망적 생산의 과정으로 언급합니다. 그러면서 이 과정을 ‘중단’하지 말고 ‘완성’할 것을 주문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 과정은 진행하고 있는 한, 그리고 진행하는 만큼 언제나 이미 완성되어 있다.”(628쪽) 이 '과정의 완성'에 대해서는 한참 앞에서도 잠시 언급되었던 것 같은데, 다음 시간에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포함해서 뒷부분을 마저 이야기해보고 '부록'으로 들어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 다음 시간에는 <안티 오이디푸스> ‘부록’을 읽고 메모를 적어옵니다.
- 간식은 문빈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수요일 저녁에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