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간에는 <안티 오이디푸스> 5절 후반부와 부록(‘욕망 기계들을 위한 프로그램 결산’)을 읽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5절은 분열-분석의 둘째 정립적 임무를 이야기하며 책을 마무리하는 절이기도 한데요, 마지막에 ‘혁명적 운동들과 관련한 분열-분석의 임무’에서 저자들은 앞에서부터 중요하게 언급해온 ‘과정’에 관해 이야기하지요. 지난 시간에 미처 나누지 못한 부분이라, 이번 시간에는 그 이야기로 토론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분열-분석의 부정적 임무가 폭력적이고 거칠어야 하는지 보았다. 즉 탈가족화하고 탈오이디푸스화하고, 탈거세하고, 탈남근화하고, 극장, 꿈, 환상을 해체하고, 탈코드화하고, 탈영토화해야 하는가를 - 이는 끔찍한 소파(搔爬)이며 악의적 활동이다. 하지만 모든 것은 동시에 행해진다. 왜냐하면, 과정은 동시에 해방되기 때문이다.”(627쪽)
5절의 마지막에 저자들은 분열-분석의 파괴적 임무와 정립적 임무를 요약하며, 이 과정은 동시에 이루어지고 동시에 해방된다는 점을 짚습니다. 그러면서 과정을 멈추지 말 것, 과정을 공전시키지 말 것, 과정에 목표를 주지 말 것, 과정을 완성할 것을 당부하지요. 들뢰즈와 과타리는 ‘분열증적 과정’을 ‘혁명의 퍼텐셜’로 봅니다. 분열자도 혁명가도 모두 ‘도주’하는 자이나, 분열자는 그 도주의 과정을 중단한, 혹은 공전시키는 자입니다. 그러니 과정을 멈추거나 공전시키지 말라는 말은 이해가 가지만, 과정을 멈추지 않으면서 완성하라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저자들은 이 과정을 ‘새로운 대지’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새로운 대지는 과정을 멈추거나 과정에 목표들을 정해 주는 신경증적 내지 변태적 재영토화들 속에 있지 않으니까. 새로운 대지는 이제 더 이상 뒤에 있지도 않고 앞에 있지도 않다. 그것은 욕망적 생산의 과정의 완성과 일치한다. 이 과정은 진행하고 있는 한, 그리고 진행하는 만큼 언제나 이미 완성되어 있다.”(628쪽) 자본주의는 탈영토화한 흐름들을 자신의 공리계 안으로 집어넣으며 곧바로 재영토화합니다. 이때 새로운 대지란 자본주의 공리계 안으로 편입되는 재영토화가 아닌, 다른 방식의 영토화를 말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토론에서 나눴는데요. 다른 영토화란 무엇일 수 있을지, 저희는 5절에서 언급한 ‘과정으로서의 예술’과 연관시켜 생각해보았습니다. 그 예술에서 중요한 요소가 ‘연줄의 부재’라는 점도 짚어보았고요.
연줄이 부재한 연결. 이는 욕망 기계와 그 부품들의 관계를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죠. ‘포괄적 분리’의 관계, ‘현실적 구별’의 관계로도 불리며, 뒝벌과 클로버의 예도 여러 번 등장했고요. 들뢰즈와 과타리는 “예술이 자기 고유의 위대성, 자기 고유의 천재에 도달하자마자, 욕망 기계들을 설치하고 기능시키는 탈코드화와 탈영토화의 사슬들을 창조”한(608쪽) 예로 베니치아파의 회화와 화가 터너의 경우를 듭니다. 이런 예술들은 “코드들을 부수고 기표들을 파괴하고 구조들 밑을 지나고 흐름들을 통과시키고 욕망의 극한에서 절단들을 행”(609쪽)하는데, 그것은 ‘하나의 돌파’라고요.
“우리는 화가 터너에게서, 종종 <미완성> 그림들이라 불리는 가장 완성된 그림들에서 이를 본 적이 있다. 천재가 나타나자마자, 더 이상 어느 유파에도, 어느 시대에도 속하지 않고, 하나의 돌파를 행하는 어떤 것이 생긴다. 그것은 목표 없는, 하지만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는, 과정으로서의 예술이다.”(609~610쪽)
자본주의의 코드들과 기표들, 이미지들에 익숙한 우리에게 이런 예술은 ‘미완성’으로 보이거나 아예 예술로 보이지 않습니다. 목표들, 유파들, 시대들에 의해 특징지어진 ‘고유하게 미학적인 그램분자적 집합들’에 속하지 않기 때문인데요. 저희는 이처럼 기존의 질서, 기존의 것들과의 연줄이 부재한 생성이 바로 과정으로서의 예술이고,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는 과정, 새로운 대지가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부록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욕망 기계 총정리’ 느낌의 글이었는데요, 욕망 기계들(기발한 물품들, 도구들, 환상들과 아무 관계가 없는)의 작동, 사회/기술 기계들과의 관계, 충만한 몸과의 관계 등을 흥미로운 예시들과 함께 다시 짚어줍니다. 욕망 기계는 “구별되는 요소들 내지 단순한 형식들의 다양체”이며, 이 요소들 내지 단순한 형식들은 “이것들이 한 사회의 충만한 몸 <위에> 있는 한, 또는 이것들이 현실적으로 구별되는 한, 이 충만한 몸 위에서 연계되어 있다”(657쪽)고 정리합니다. 연줄이 부재한 요소들이 충만한 몸 위에서 연계되어 있는 다양체가 욕망 기계라는 설명인데요. 여기서 ‘기계화하는 심급’이라고도 언급되는 ‘충만한 몸’이 무엇인지, 기관 없는 몸과는 어떻게 다른지 토론에서 이야기를 나눠보았지만 명확한 답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강의에서 도움을 얻게 되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자, 어찌 되었든 끝까지 왔네요! 여전히 모르겠는 것투성이지만, 그래도 들뢰즈와 과타리가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는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처음엔 외계어 같기만 하던 개념어들도 익숙해져서(이해와는 별개로!) 헤어지려니 아쉬운 마음까지 드네요. 마지막 과제를 하면서 아쉬운 마음을 달래야겠습니다.^^
- 다음 시간에는 채운샘의 정리 강의가 있습니다. <안티 오이디푸스> 전체에서 원하는 개념을 골라 정리해옵니다.
- 간식은 혜원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수요일 저녁에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