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에는 <안티 오이디푸스> 3장 3절을 읽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번 시간도 혼란의 도가니(^^;)였습니다만, 최대한 머리를 모아 나름대로 이해해보았습니다. 애매하거나 풀리지 않은 문제들은 앞으로 계속 읽어나가며 다시 생각해보고, 나중에 강의에서 도움을 받으면 되니까요. 이번 부분에서 들뢰즈와 과타리는 원시 사회에서의 ‘근친상간 금지’가 어떤 의미인지를 짚어보고, 정신분석에서 주장하는 오이디푸스의 문제가 원시 사회에서도 작동되는지를 살펴봅니다.
“이 충만한 몸(토지의 충만한 몸)은 출산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혈연은 이 몸 위에 표시된 기입의 최초 특성이다. 우리는 이 내공적 혈연, 이 포괄적 분리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나뉘지만, 단지 자기 안에서 나뉘며, 또 여기서는 같은 존재가 도처에, 모든 측면에, 모든 층위에, 내공의 차이를 지닌 채 있다.” (269쪽)
들뢰즈와 과타리는 원시 사회가 혈연에서 결연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내공들에서 외연으로의 이행’, 즉 “에너지와 내공의 차원에서 외연의 체계로 이행”(272쪽)한 것으로 표현합니다. 토지의 충만한 몸 위에 최초로 ‘혈연’이 기입됩니다. 이 ‘내공적 혈연’은 포괄적 분리(...이건...이건)의 차원이죠. 이 '강렬한 혈연'은 아직 확장되지 않았고, 인물들의 구별은 물론 성의 구별도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내공을 지닌 전(前)-인물적 변주들만을 포함하고 있는데요. 그렇기에 이 차원의 기호들은 근본적으로 ‘중립’이거나 ‘중의적’입니다. 그런데 이 최초의 내공에서 외연을 지닌 체계로의 이행이 일어납니다. 혈연들은 가문의 형식으로 ‘확장 혈연들’이 되어가고, 그러면서 인물들의 구별이 생겨나고 명칭들도 생겨납니다. 외연을 지닌 물리 체계가 형성되는데, 이 체계는 에너지 흐름의 차원에 속하는 것들 가운데 어떤 것은 지나가게 하고 어떤 것은 봉쇄합니다. 그렇게 ‘중의적인 기호들의 차원’은 ‘규정된 기호들의 체계’로 이행됩니다. 이러한 이행은 어떻게 일어나게 된 걸까요?
들뢰즈와 과타리는 신화에서 실마리를 찾습니다. 원시 사회에 남은 관습들이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보여주는데요. 신화는 온통 “중의적인 기호들, 포괄적 나눔들, 자웅동체 상태들의 세계”(276쪽)입니다. 이 세계에도 어머니, 아버지, 아들, 외삼촌, 아들의 누이가 등장하긴 하지만, 그 이름들이 가리키는 것은 인물들이 아니라, “<진동하는 나선운동>의 내공적 변주들, 포괄적 분리들이며, (...) 쌍둥이이면서도 자웅동체 상태들”(267쪽)입니다. 이 세계에서 아들은 어머니의 형제이고, 누이의 남편이고, 자신의 아버지입니다. 2장에서도 분열증을 설명하며 포괄적 분리의 예로 니진스키의 글을 가져왔던 것이 떠오르는데요(“<나는 아스피고, 나는 이집트 인이요, 붉은 피부 인디언이요, 흑인이요, 중국인이요, 일본인이요, 외국인이요, 미지의 사람이요, 바다새요, 육지를 나는 새요, 톨스토이의 나무요, 그 뿌리이다.>”144쪽). 들뢰즈와 과타리는 명칭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명칭들을 어떻게 사용하는가가 중요하다는 점을 지적했지요. 의미의 문제가 아니라 오직 사용의 문제가 중요하다고요.
하지만 이런 내공의 차원인 신화의 세계와 달리, 외연을 지닌 물리적 체계는 내공적 배아 혈연이 억압되어야만 구성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혈연들이 방계 결연으로 확장되는 한에서만, 누이와의 근친상간, 어머니와의 근친상간이 금지되는 한에서만 구성됩니다. 외연을 지닌 체계에서는 분리들이 포괄적이기를 그치고 배타적, 제한적이 됩니다. 이름들, 명칭들은 더이상 내공 상태들이 아니라 분간 가능한 인물들을 가리킵니다. 금지된 배우자로서의 누이와 어머니에게 분간 가능성이 설정됩니다. 하지만 인물들이 자신을 가리키는 이름을 갖고 있다고 해도, 금지들보다 먼저 실존하지는 않습니다. 어머니와 누이는 이들을 배우자로 금지하기 전에는 실존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따라서 들뢰즈와 과타리에 따르면, 우리는 근친상간의 ‘이쪽’ 아니면 ‘저쪽’에 있게 됩니다. 이쪽, 즉 분간 가능한 인물들을 알지 못하는 ‘내공들의 계열’에 있거나, 저쪽, 즉 인물들이 분간되지만 성적 파트너로는 불가능하게 만들어야 분간이 가능한 ‘외연의 체계’에 있거나.
그렇다면 이 ‘금지’는 애초에 어떻게 생겨나게 된 걸까요? 정신분석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욕망되었기에 금지된 게 아니라면 말입니다. 이번 토론에서 계속 헷갈렸던 부분이기도 한데요, 답을 얻지는 못했지만 저희는 앞에서 언급한 '억압'과 연결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외연의 체계가 구성되기 위한 내공적 차원의 억압. 3장 말미에서 들뢰즈와 과타리는 원시 사회체가 세 심급의 재현을 포함하고 있다고 정리합니다. '억압된 욕망의 대표(내공적, 배아적 흐름)'와 '억압하는 재현작용(결연),' '이전된 재현내용(오이디푸스)'이 그것인데요, 여기서 오이디푸스는 억압된 것도, 억압하는 재현작용도 될 수 없습니다. 억압된 것인 욕망의 대표는 ‘이쪽’에 있으며, 아빠-엄마를 모르기 때문이죠. 또한 억압하는 재현작용은 ‘저쪽’에 있으며, “인물들을 결연의 동성애적 규칙들에 복종시킴으로써만” 인물들을 분간합니다. 따라서 근친상간은 “억압된 대표에 대한 억압하는 재현작용의 소급적 효과일 따름”입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오이디푸스는 그야말로 극한이지만, 이제 사회체의 내부로 이행된 이전된 극한이다. 오이디푸스는 욕망이 사로잡히게 된 미끼 이미지이다(네가 바랐던 게 그거지! 탈코드화된 흐름들, 그건 근친상간이었어!).”(288쪽) 네... 어렵네요. 다음 절에도 오이디푸스의 문제가 이어지니 계속 읽어봐야겠습니다.
- 다음 시간에는 <안티 오이디푸스> 3장 4절을 읽고 내용을 정리해옵니다.
- 간식과 후기는 민호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수요일 저녁에 만나요!
외연의 체계가 구성되기 위한 내공적 차원의 억압
사실 존재의 조건에는 언제나 욕망적 생산의 흐름을 막고 방향을 틀면서 특정한 길을 내는 작업인 '억압하는 재현작용'이 있어야 한다는 설명이 와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