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는 요즘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가장 어렵다는 3장 ‘미개, 야만, 문명’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본격적으로 사회체 분석이 이뤄지고 있는데요. 각종 사회체를 수시로 오가는 와중에, 이번 주 범위인 4절 ‘정신분석과 민족학’은 원시 영토 기계 분석을 매듭지어가고 있는 듯합니다. 역시나 큰 메시지는 “원시 사회체에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같은 건 있을 수가 없어!”이겠지만, 보다 디테일하게는 원시사회를 분석한 인류학자들의 작업을 비판하며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해지는 개념은 ‘이전(移轉)’, ‘보편성’, ‘극한’ 등이었습니다. 저희의 중구난방 논의는 이 개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읽을 때는 전혀 모르겠던(그래서 일단 넘어갔던) 구절들이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렇게저렇게 짜맞춰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느낌일 뿐이지만 소중했습니다(!).
오이디푸스가 보편적이라고?
“실상 오이디푸스가 보편적인 것은 그가 모든 사회에 출몰하는 극한의 이전이기 때문이며, 모든 사회가 자신의 가장 깊은 음화로서, 즉 욕망의 탈코드화된 흐름들로서 절대적으로 두려워하는 것을 왜곡하는 이전된 재현내용이기 때문이다.”(307쪽)
논의의 시작은 결론과도 같은 이 아리송한 문장으로부터였습니다. 모두가 인용했지만, 그래서 중요한 듯 하지만, 온갖 난해한 용어가 섞여 있어 뭔지는 잘 모르겠는 문장입니다.
우선 들/과가 왜 굳이 오이디푸스의 보편성을 언급하고 있는가를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원시 사회체에는 오이디푸스가 실존한 적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고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 보았듯, 원시사회에서 아버지, 어머니, 누이는 늘 아버지, 어머니, 누이와는 다른 것으로도 기능합니다. “모든 것이 아버지나 외할아버지의 이름으로 내몰리는 대신, 오히려 이 이름이 역사의 모든 이름으로 열려 있었다.”(294쪽) 그럼에도 이 기이한 삼각형의 보편성이 이야기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들/가는 지금 수많은 민족지학자들은 상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20세기 내내, 인류학의 연구로부터 문화주의자들과 정신분석가들은 아프리카나 인디언 부족들에도 오이디푸스 혹은 오이디푸스 엇비슷한 것이 존재함을 찾아냈습니다. 오이디푸스는, 변주된 형태를 띠더라도, 모든 사회에 보편적으로 실재한다고 말한 것이죠. 하지만 들/가는 이를 반박합니다. 오이디푸스는 바로 식민화의 결과로 시작된 것이며, 언제나 “가족주의 관점에 대한 완고한 옹호”(302쪽)를 공통 전제로 삼고 있었다고 말이죠. 들/가가 보기에 보편성이 주장되는 방식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정통 정신분석가들의 방법으로, “오이디푸스를 기원에 있는 정감적 성좌(聖座)로 만”드는 것입니다. 즉 오이디푸스가 모든 정서 중 가장 꼭대기에 ‘모태적 기원’으로서 존재하며 그것이 계통발생적 유전으로 전달된다는 주장입니다. 다른 하나는 문화주의자들의 방법인데, “오이디푸스를 하나의 구조로 만드는” 것입니다. 즉 오이디푸스가 개체의 생물학적 성숙 과정이라는 구조 안에서 기능하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오이디푸스가 사회체의 기원에 있느냐 구조에 있느냐. 보편성의 이 두 가지 의미는 ‘극한’에 대한 사유를 필요로 합니다. 들/가는 그 두 가지 주장을 반박하면서, 보편성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극한의 세 번째 수준을 고려해야 한다고 합니다.
오이디푸스는 이전된 극한이다
“오이디푸스는 하나의 극한이다. 하지만 극한의 뜻은 많다.”(305쪽)
그런데 대체 극한이 뭘까요? 세미나에서는 극한을 일종의 한계, 임계, 리미트, 넘어가면 질이 변해버리는 제한선 등으로 이야기했습니다. 들/가는 극한의 뜻만 해도 세 가지라고 말합니다. 극한은 처음 중간 끝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모태의 역할을 하는 개시 사건’일 수도 있고, ‘등장인물들을 매개하고 관계의 정초를 확보하는 구조적 기능’일 수도 있고, ‘종말론적 규정’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중 두 가지는 앞서 정신분석가와 문화주의자들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들은 오이디푸스를 기원 또는 구조에서 발견하고자 했죠. 하지만 들/가는 오직 세 번째, 말미로서의 극한이라는 의미에서만 오이디푸스가 하나의 극한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런 극한 역시 다섯 가지로 나눠지니 더 살펴봐야 합니다.
절대적 극한은 현실화된 것의 끝자락에서 결코 현실화되지 않고 남아 있는 잠재성 같은 것입니다. 사회적 생산의 극한으로서의 욕망적 생산, 코드들과 영토성들의 극한으로서의 탈코드화된 흐름들, 사회체의 극한으로서의 기관 없는 몸.
상대적 극한은 특히 자본주의 구성체에서 끊임없이 대체되고 확장되며 뒤로 물러나게 되는 벽입니다. 위기를 먹고 사는, 반자본주의적 운동을 먹고 성장하는 자본주의의 임시적일 뿐인 끝이죠.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언제나 그래 왔듯’이라는 할리우드 재난영화의 클리셰가 잘 요약하고 있는 극한입니다.
현실적 극한은 사회체(아마 전-자본주의 구성체)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가혹한 현실’입니다. 원시 영토 기계에 불시에 등장한 화폐의 흐름. 전제 군주 기계에 등장한 상인들의 흐름. 한 사회체가 최선을 다해 저항하고자 하는 임박한 죽음의 기호가 그것입니다.
상상적 극한은 신화로 투사되어 영위되는 욕망적 생산 자체(강렬한 배아 내류, 근친상간의 이쪽, 똥의 파동)입니다. 외연을 가진 사회체가 형성되려면 언제나 내공적 차원은 신화적 모태 안으로 넣어야 했습니다.
이전된 극한은 왜곡과 전도를 통해 사회체 내부 및 중간으로 옮겨진 극한입니다. 임계는 신화라는 상상 속에 배치되지도 않고 실질적 위협으로 현실화되지도 않으면서 “결연의 재현과 혈연의 대표 사이로”, 즉 외연적 관계와 내공적 흐름 사이로 위치하게 됩니다. ‘이전’이란, 금지라는 형성 행위 앞에 이미 ‘금지될 만한 욕망’이 있었다고 순서를 바꾸는 일입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욕망은 욕망은 ‘금지할만한 욕망이기에 금지된’ 것으로 뒤집어서 설정되게 되지요. 이는 일종의 안전장치입니다. 포괄적인 두려움을 약화시키기 위해 강물의 흐름을 막고 몰아서 극한을 특정한 욕망-금기-억압 구도에 넣어두는 것이죠. 이러한 극한의 이전은 모든 사회에서 일어납니다. 들/가는 이것이 “그다지 깊지 않은 수많은 개울에 물줄기를 돌리거나 하여 그 강의 두려운 힘들을 쫓아내는 일과도 같다”(307쪽)고 말합니다. 지난 주 범위에서, “근친상간, 그다지 깊지 않은 개울인데 중상을 받누나”(281쪽)라는 구절이 나왔었는데요. 근친상간이란, 따로 존재하는 ‘금지될 만한 욕망’이 아니라 무수한 욕망적 생산 중 하나였고, 사회체가 사회적 생산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제한되고 억제되게 되는 욕망이었습니다. 그것을 특정한 코드 속에서 금기적 욕망으로 만드는 작업은 어느 사회체에든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일어났지요. 오이디푸스 역시 이러한 이전된 극한의 하나입니다. 오이디푸스가 보편적이라면 이전된 극한이 보편적이라는 의미에서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회구성체에 오이디푸스라는 극한이 ‘점유되어’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전된 극한에 오이디푸스가 자리잡기 위해서는 자본주의-가족주의라는 특정한 조건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이제 이 이야기는 차차 등장하겠죠?
3장은 정말 시작부터 혼란 그 자체였는데, 읽어나가면서 이야기가 조금씩 짜맞춰지는 느낌이 드네요! 이번 주에는 오이디푸스가 왜 보편적인지, 극한이란 무엇인지 조금 정리된 것 같습니다. 이제 전제군주기계로 넘어가는데, 그건 또 얼마나 (어려우면서) 재미질까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