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간에는 <안티 오이디푸스> 3장 4절을 읽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3절에 이어 4절에서도 원시 사회체에 관한 내용이 이어지는데요, 이번 주에 중점적으로 나눈 내용에 관해서는 민호샘이 잘 정리해주셨으니, 저는 토론에서 나눈 이야기 하나만 간단히 덧붙여보겠습니다.
들뢰즈의 저작들을 읽어오며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저희는 생경한 용어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정신분석학과 마르크스의 용어뿐 아니라 그것을 변형시켜 사용하는데요. 이제 책의 중반을 향해하고 있는 만큼 조금 익숙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용어들이 있습니다. 저는 ‘투자’라는 말이 그렇습니다. 너무 익숙한 단어인데 익숙지 않은 곳에 쓰여서 이해가 되었다 안 되었다 하네요. 이번에 읽은 부분에서는 이런 식으로 표현됩니다.
“가족 속의 개개인이, 아무리 작더라도, 어떤 정신 구조로도 어떤 정감적 성좌(聖座)로도 환원될 수 없는 사회장, 역사장, 경제장, 정치장에 직접 투자한다는 것은 명백하다.”(291쪽)
“욕망을 통한 사회장의 무의식적 투자들을 발견하는 일...”(293쪽)
“... 욕망이 사회장을 투자하는 방식이 문제 되기 때문이다.”(303)
프로이트가 ‘리비도의 투자’를 언급한 것처럼 들뢰즈와 과타리는 ‘욕망의 투자’를 이야기합니다. 저희는 먼저 ‘투자’라는 용어가 ‘에너지를 쏟아붓는다’는 느낌을 가진다는 점, 투자하면 산출이 있듯이 뭔가가 산출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는 점 등을 생각해보았습니다.
4절에서 들뢰즈와 과타리는 원시 사회체에 ‘오이디푸스의 조건들’이 명백하게 주어져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토양에서는 ‘가족 콤플렉스로서의 오이디푸스’가 설립될 수 없음을 보여주지요. 원시 사회체의 가족들은 “결연과 혈연의 실천, 정치, 전략을 형성”(290쪽)하고, 이는 ‘사회적 재생산의 가동요소들’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누이는 늘 아버지, 어머니, 누이와는 다른 것으로도 기능합니다.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 외에도 인척이 있어서 능동적, 구체적 현실을 구성하고, “가족들 간의 관계들을 사회장과 공통된 외연을 지니게”(290쪽)합니다. 따라서 원시 사회체의 가족적 규정들과 사회적 규정들은 “영토 기계 속의 유일하고도 동일한 부품”(291쪽)이라고 저자들은 표현합니다.
이처럼 원시 사회에에서 가족 개개인의 욕망은 직접 사회장에 투자됩니다. 욕망은 가족으로 환원되지 않는 사회적, 역사적, 경제적, 정치적 장 속에서 작동합니다. 위의 인용문들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여전히 '욕망이 사회장을 투자하는 방식'이란 말은 알듯말듯하지만, 욕망을 작동의 차원에서 보지 않고 자꾸 주체를 상정하게 된다는 점이 이해를 방해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 외에도 ‘그램분자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이란 말도 참 와닿지 않았는데요. 이번 시간에는 얘기나누지 못했지만, 앞으로도 계속 언급된다고 하니 읽어나가면서 좀더 이해해보고 얘기나눌 기회가 있을 듯합니다.
- 다음 시간에는 <안티 오이디푸스> 3장 5~6절을 읽고 내용을 정리해옵니다.
- 간식과 후기는 문빈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수요일에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