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간에는 <안티 오이디푸스> 3장 7절을 읽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전제군주 사회체의 ‘야만적/제국적 재현’에 관해 다루고 있는 이번 부분도 혼자 읽을 때는 어렴풋하게 이해되던 내용들이 세미나를 통과하며 좀더 선명해졌네요. 저희는 전제군주 사회체 구성의 결정적 요소인 ‘근친상간’과 ‘초코드화’에 관한 문제로 토론을 시작해서 ‘야만적 재현’의 심층적, 표면적 요소들을 살펴보았습니다.
6절에서 들뢰즈와 과타리는 전제군주 사회의 특징이 ‘초코드화’라는 점을 지적했지요. 그 초코드화에 필수적인 것이 새로운 결연과 직접 혈연이었는데요. 7절에서 들뢰즈와 과타리는 새로운 결연과 혈연이 둘로 진행되는 근친상간, 즉 ‘족외혼’인 누이와의 결혼, 그리고 ‘부족으로의 회귀’인 어머니와의 결혼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을 설명합니다.
“이 이중의 근친상간이 목적으로 삼고 있는 것은, 하나의 흐름, 마술적이기까지 한 흐름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기존의 흐름을 초코드화하고, 그 어떤 내적 코드도, 그 어떤 감춰진 흐름도 전제군주 기계의 초코드화를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345~346쪽)
원시 사회에서 ‘욕망의 이전된 재현내용’이었던 ‘근친상간’은 이제 ‘억압하는 재현작용 자체’가 됩니다. 전제군주 사회에서 근친상간은 가능해졌지만 여전히 욕망의 흐름들을 해방하는 역할을 하지는 않습니다. 근친상간이 가능한 건 오직 전제군주뿐이기 때문이죠. 여전히 군주를 제외한 모두에게 근친상간은 억압 장치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사회체 재현의 심층 요소들이 이동하면서 재현의 표면 조직에서도 특이하게 바뀌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목소리와 표기행위의 관계’입니다.
원시 사회에서 표기행위는 목소리와 독립해 있습니다. 표기행위는 “목소리에 대답하고 반응하면서도 자율적이어서 목소리에 동조하지 않는 기호들을 몸들 위에 표시”(348쪽)합니다. 반면 전제군주 사회에서 표기행위는 ‘천상 또는 너머의 말 없는 목소리’에 의존합니다. 목소리는 노래하는 대신 구술하고 공포하고, 표기는 판이나 책에 고착되어 쓰이는 ‘글’이 됩니다. 입법, 관료제, 회계, 정세, 제국의 정의, 공무원의 활동, 역사 서술 등은 모두 전제군주의 수행원들에 의해 기록됩니다. 원시 사회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낱말들에서 사물들로, 몸들에서 명칭들로 도약”(350쪽)하고, 그것들이 구성하는 영토적 기호들의 사슬은 언제나 다의적으로 사용됩니다. 반면 전제군주 사회에서는 표기행위가 목소리와 동조하고 목소리로 복귀합니다. 표기가 목소리로 복귀함으로써 하나의 초월적 대상, 즉 무언의 목소리가 사슬 밖으로 도약합니다. 이 초월적 대상, ‘천상의 허구적 목소리’는 자신이 내놓는 글의 기호들을 통해서만 표현됩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이런 계시적 성격의 목소리가 바로 ‘오이디푸스에 이르는 형식적 조작들’의 첫 번째 조립임을 지적하는데요. 이와 더불어 ‘의미’에 대한 물음이 시작되고, ‘주해의 문제’가 ‘실효성의 문제’보다 우세해집니다. 언제나 이탈 가능한 사슬의 절편들 대신, “사슬 전체가 의존하는 이탈된 대상”(353쪽)인 ‘전제군주 기표’가 생겨납니다. “욕망은 욕망의 욕망, 전제군주의 욕망의 욕망”(354쪽)이 되었습니다.
전제군주 기표는 원시 기계가 억압했던 것, 즉 강렬한 토지의 충만한 몸을 재구성합니다. 하지만 이 재구성은 전제군주 자신의 탈영토화된 충만한 몸 안에 주어진 새로운 기반들과 새로운 조건들 위에서 행해집니다. 억압하는 재현작용인 근친상간은 그 의미와 장소가 바뀌게 되고, 새로운 충만한 몸으로 기관들을 기입하는 일을 수행합니다. 모든 신민의 모든 기관은 전제군주의 충만한 몸에 달라붙으며 거기서 그것들의 ‘내공적 대표’를 갖습니다. 이런 전제군주 기계에게 ‘최고의 위험’은 기관들의 항의(抗議), 기관들의 이탈이겠지요. 들뢰즈와 과타리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기관들이, 폭군에 맞서 일어난 시민의 기관들이 전제군주의 몸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그다음에 이 기관들은 사적 인간의 기관들이 되리라. 이 기관들은 사회장 밖으로 보내진 면직(免職)된 항문의 모델과 기억 위에서 사유화 되리라.” (361쪽) ‘사적 기관들’ ‘사유화’. 전제군주 기계의 가장 큰 악몽.
30쪽도 채 안 되는 분량인데, 의미를 확인할 부분들이 많아서 후반부 ‘죽음본능’과 ‘잠복성’에 관한 내용은 나누지 못했네요(어려운 부분이었는데요..). 후반부에서 들뢰즈와 과타리는 전제군주 사회에도 아직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잠복 후에야 나타난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잠복, 잠복 상태가 프로이트의 심리성적 발달단계 중 ‘잠복기’를 가져와서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듯하다는 점만 간단하게 나눴는데요, 다음 시간에 ‘원국가’와 ‘문명 자본주의 기계’를 다루면서 함께 논의하기로 했습니다.
- 다음 시간에는 <안티 오이디푸스> 3장 8~9절을 읽고 내용을 정리해옵니다.
- 간식과 후기는 윤순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수요일 저녁에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