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간에는 <안티 오이디푸스> 3장 8,9절을 읽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매번 그렇지만 어려운 부분이 많았는데요, 특히 8절에서 다루는 ‘원국가(原國家)’ 개념을 둘러싸고 여러 의견들이 오갔습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원시 사회와 전제군주 사회를 이야기한 후 자본주의 사회로 가기 전에 ‘원국가’라는 개념을 설명합니다. 저희는 이 원국가의 정체가 무엇인지, 저자들이 언급한 다른 사회들과 어떤 관계인지를 두고 논의했지만 결론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기원으로서의 원국가(Urstaat), 모든 국가가 되고자 하고 욕망하는 영원한 모델. 이른바 아시아적 생산은, 이 생산을 표현하는, 즉 이 생산의 객관적 운동을 구성하는 국가와 마찬가지로, 별도의 구성체가 아니다. 그것은 기초 구성체요, 모든 역사의 지평을 이룬다. 도처에서 우리는 역사적·전통적 형식들에 앞서며, 국가의 재산, 벽돌처럼 쌓인 공유물, 집단적 의존관계 등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제국기계들을 발견한다. 더 <진화된> 각각의 형식은 가필된 양피지와도 같다.”(371쪽)
8절 첫부분에 등장하는 원국가에 대한 묘사입니다. 우선 원국가는 어떤 국가나 ‘별도의 구성체’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는 언급이 눈에 들어옵니다. 기원으로서의 국가의 모델, 국가의 시초를 의미는 것 같은데요, 도처에서 ‘제국기계’들을 발견한다는 구절도 그렇고, ‘기원적인 전제군주 국가’라는 표현도 있어서, 원국가가 전제군주 사회체를 의미한다고 보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별도의 구성체가 아니라고 밝히기도 했고, ‘범주로서의 국가’나 ‘추상’이라는 표현을 생각하면 그렇게 보는 건 무리일 듯합니다. 그래서 전제군주 국가처럼 절대 권력을 욕망한다는 의미일뿐 원국가와 전제군주 국가를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의견도 있었고요. 그런가 하면 ‘유일한 국가’라는 소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원국가는 '국가는 하나뿐임'을 의미하며, 다양한 국가의 모습은 그것이 다른 형식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라는 설명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더 진화된 각각의 형식은 가필된 양피지와도 같다’는 위 인용문의 구절도 비슷한 의미로 읽히네요.
저자들은 원국가를 설명한 후 ‘국가의 진화’ ‘국가 생성의 두 양상’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냥 ‘국가’로 부르는 것의 정체도 저희는 애매했어요. 어떻게 보면 이 부분은 전제군주 국가와 자본주의 국가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더 이상 국가는 유지되어 벽돌처럼 된 영토성을 초코드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돈, 상품, 사유재산의 탈코드화된 흐름들을 위해 코드를 구성하고 발명해야만” 한다든가, “국가는 더 이상 파편들을 통치하는 초월적 법이 아니”며 “자신의 기의들의 배후에 나타나 자신이 의미화하는 것에 의존”한다는 등의 설명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또 이런 문장도 있습니다.
“우리는 늘 다음과 같은 괴물 같은 역설에 거듭 빠진다. 즉 국가란 전제군주의 머리에서 신민들의 마음으로, 또 지적 법칙으로부터 이 법칙을 벗어나거나 이 법칙에서 놓여난 물리 체계 전체로 이행하는 욕망이라는 역설에. 국가의 욕망, 즉 가장 환상적인 탄압 기계 역시도 욕망이며, 욕망하는 주체요 욕망의 대상이다. 욕망, 그것은 기원적 원국가를 새로운 사태 속에 다시 불어넣고 원국가를 가능한 한 새로운 체계에 내재하게 하고 새로운 체계 내부에 있게 하는 데서 언제나 성립하는 조작이다.”(377~378쪽)
들뢰즈와 과타리는 국가가 ‘욕망의 운동 자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이, 국가를 욕망의 차원에서 분석한 것으로, 전제군주 국가가 어떻게 자기 생산을 지속할 수 있을지를 분석한 것으로 읽힌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각자 조금씩 다른 관점으로 읽은 듯한데 의견을 하나로 모을 수가 없었어요. 그만큼 의미가 모호하게 느껴지는 8절이었습니다.
원국가에 이어 9절에서는 본격적으로 자본주의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저희는 자본주의의 탄생이 탈코드화된 흐름들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탈코드화된 흐름의 만남, 결합, 이것들 간의 반작용이 있어야 한다는 점, 그런데 이 만남은 우발적이라는 점, 결국 '우발의 세계사'가 있을 뿐이라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탈코드화된 흐름은 어느 사회에서나 있어왔지만, 이것들의 우발적인 만남이 없었다면 자본주의는 생겨날 수 없었다고 저자들은 분석하지요.
“자본주의 기계는 자본이 혈연 자본이 되기 위해 결연 자본이기를 그칠 때 시작된다. 자본은 돈이 돈을 낳거나 가치가 잉여가치를 낳을 때 혈연 자본이 된다.”(387쪽)
혈연 자본이란 말 그대로 '돈을 낳는 자본'을 말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낳지 않는 자본은 사라집니다. 이전 사회에도 화폐가 있고 시장이 있었지만 “시장 자본 또는 금융자본은 비자본주의적 생산과 단지 결연 관계에 있으며, 전-자본주의국가들을 특징짓는 저 새로운 결연에 들어”(387쪽)갑니다. 자본은 늘 ‘관계’와 함께 갑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잉여가치, 이윤)을 낳는 자본만을 추구할 뿐입니다. 극한은 계속 이전되고, 돈을 낳는 모든 것은 투자 대상이 됩니다.
이번 시간에 9절의 내용을 많이 나누지 못했는데, <자본론 공부>에서 보았던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를 비롯해서 반생산에 관한 내용 등은 다음 시간에 10절 ‘자본주의적 재현’과 함께 더 논의하기로 했습니다. 이제 정말 3장도 얼마 안 남았네요.
- 다음 시간에는 <안티 오이디푸스> 3장 10절을 읽어옵니다.
- 간식은 영임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수요일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