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간에는 <안티 오이디푸스> 3장의 마지막인 11절 ‘마침내 오이디푸스’를 읽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앞서 들뢰즈와 과타리는 자본주의가 출현하고 나서야 오이디푸스화가 시작되었다는 점을 강조했지요. 사회구성체들을 하나씩 살펴본 후 마지막으로 자본주의를 분석하며 저자들은 오이디푸스 체계의 탄생 배경과 작동을 설명합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 중 하나로 가족이 사회장 밖에 놓이게 된 점을 꼽습니다. 원시 사회, 전제군주 사회와 달리, 가족이 사회와 분리되면서 ‘사적 영역’이 되었다는 겁니다. 개인들은 한편으로, 자본주의의 추상적인 공리계 속에 놓이면서 기능으로서 존재하게 됩니다(‘사회적 인물’). ‘인물화된 자본으로서의 자본가(즉 자본의 흐름에서 파생된 기능으로서의 자본가)’나 ‘인물화된 노동력으로서의 노동자(즉 노동의 흐름에서 파생된 기능으로서의 노동자)’처럼 말입니다. 또 다른 한 편으로, 제한된 가족의 장소에서 아버지, 어머니, 아이로서 형식적으로 규정됩니다(‘사적 인물’). 이 인물들은 무엇보다 자본주의가 생산한 이미지들인데요, 자신의 내재장을 이미지들로 채운다는 점은 자본주의의 또 다른 특징이기도 합니다. “이미지들의 군림은 자본주의가 분열들을 이용하고 흐름들의 방향을 바꾸는 새로운 방식”(447쪽)입니다. 이제 결연과 혈연들은 더 이상 가족을 지나가지 않고 돈을 지나갑니다. 그러면서 가족은 ‘소우주’가 됩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이는 자본의 이미지들의 허상이 되며(<자본 씨, 대지 여사> 그리고 그들의 아이인 노동자...) (...) 모든 것은 아버지-어머니-아이의 삼각형으로 복귀하며, 이 삼각형은 사람들이 자본의 이미지들을 가지고 그것을 자극할 때마다 <아빠-엄마>라고 대답하며 공진한다. 요컨대 오이디푸스가 도래했다. 오이디푸스는 1차 수준의 사회적 이미지들을 2차 수준의 사적 가족 이미지들에 적용하는 자본의 체계에서 탄생한다.”(445쪽)
오이디푸스가 도래하면서 모든 건 가족으로 귀결됩니다. 들뢰즈와 과타리의 재미있는 비유처럼, “출발 집합에는 사장, 족장, 사제, 짭새, 세리, 군인, 노동자 등 모든 기계와 영토성, 우리 사회의 모든 사회적 이미지가 있”지만, “도달 집합에는, 극한에는 단지 아빠, 엄마, 나만 있으며, 아빠가 받은 전제군주 기호, 엄마가 떠맡은 잔여 영토성, 나뉘고 절단되고 거세된 나만 있”습니다.(446쪽) 모든 것을 오이디푸스 삼각형 안으로 집어넣기. 이는 자본주의가 체제를 유지하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저희는 궁금해졌습니다. 오이디푸스화가 모든 걸 가족 삼각형 안으로 집어넣는 것이라면 가족의 형태나 가족 개념이 많이 달라진 지금은 어떠한가? 여전히 들뢰즈와 과타라가 분석한 것처럼 작동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최근에는 핵가족을 넘어 ‘핵개인’이란 말이 등장할 정도로 가족은 점점 해체되고 있지 않은가? 일본의 사회후견제도라든가, 영화 <어떤 가족>에 나오는 가족의 경우처럼 아빠-엄마-나로 이루어진 가족이 더는 존재하지 않을 때도 오이디푸스가 작동한다고 볼 수 있을까? 모든 걸 가족으로 환원한다는 의미를 꼭 ‘가족’에 국한해서 볼 게 아니라, 욕망이 가족 삼각형의 구도를 갖게 되는 모든 경우(법-결핍-환상적 퇴행)에 오이디푸스가 작동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자본주의는 결핍을 생산함으로써 유지되는데 그처럼 결핍을 생산하는 모든 방식을 오이디푸스화로 볼 수 있을까? 아니면 오이디푸스화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결핍이 생산될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에 답변하며 한참 동안 토론이 이어졌는데요, 역시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두 가지 경우를 나눠서 설명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 외에도 자본주의 사회의 ‘언표행위’에서 ‘언표 주체’와 ‘언표행위 주체’의 의미, 전제군주 사회와 자본주의 사회 모두에 해당되는 듯한 ‘무한 부채’와 ‘양심의 가책’의 정의 등에 대해서도 논의했지만 결론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다음 시간 강의에서 정리되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 다음 시간에는 채운샘 강의가 있습니다. 3장에서 질문들을 뽑아오시면 됩니다.
- 간식은 재겸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수요일 저녁에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