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학기 마지막 시간에는 <안티 오이디푸스> 3장에 대한 채운샘의 강의가 있었습니다. 강의 전에 저희 질문을 먼저 받으신 샘께서는 한 번의 강의로는 택도 없는 저희 상태를 간파하시고, 감사하게도 한 번 더 강의해주시기로 하셨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저희 질문들 위주로 강의해주셨는데요, 앞에서부터 다시 맥락을 짚어주셔서 혼란스러웠던 부분들이 많이 정리되었습니다.
욕망기계와 사회기계
들뢰즈와 과타리는 1장에서 욕망을, 2장에서 정신분석과 가족주의를 이야기한 후 3장에서 사회를 분석합니다. 여기서 사회란, 개인과 집단이 모인 하나의 전체로서의 사회가 아니라, 도처에서 욕망기계들의 연결, 접속, 채취가 일어나고 있는 역동적인 체(體)로서의 사회를 말합니다. 그래서 저자들은 사회체라고 부르죠.
앞에서 보았듯이, 욕망은 연결하고 접속하며 흘러가는, 끊임없이 작동하는 기계와 같습니다. 만나고 흘러갈 뿐, 욕망 자체는 어떤 규정성도 지니지 않지요. 그런데 이렇게 흘러다니는 욕망기계들은 작동하는 순간 그것이 흘러다니는 '장'에 기입이 됩니다. 이름이 붙고 뭔가로 규정되죠. 이러한 ‘코드화’는 사회체가 욕망을 길들이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욕망기계가 작동하는 한 이를 기입하는 사회기계도 계속 작동하므로, 이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저는 ‘욕망이 사회장에 직접 투자된다’는 말이 계속 잘 와닿지가 않았는데요, 비슷한 의미로 이해되네요.
들뢰즈와 과타리가 사회체를 분석하는 이유도 욕망과 사회의 이런 관계 때문입니다. 우리 욕망을 이해하려면 그 욕망이 흘러다니는 사회적 배치, 사회적 장을 분석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사회제도를 분석하고, 그것을 구성하고 계속 재생산하게 하는 인자를 분석해야 하죠. 하지만 욕망은 자신에게 이름을 붙이고 자신을 규정하는 사회의 기입을 늘 흘러넘칩니다. 거기서 욕망기계의 혁명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샘께서 짚어주셨어요.
세 가지 사회체
3장에서 들뢰즈와 과타리는 원시 영토 기계, 야만 전제군주 기계, 문명 자본주의 기계로 명명하는 세 사회체를 분석합니다. 이 사회체들은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실제 사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샘께서 정리해주신 것처럼, ‘사회체가 욕망과 관계하는 전혀 다른 세 가지 방식’을 말합니다. 사회가 욕망을 제어하고 관리하는 방식, 그 욕망이 사회와 관계 맺으며 흘러다니는 방식에 있어서 세 사회체는 서로 완전히 다릅니다.
원시 영토 기계는 국가 이전의 사회체로, 신화적 스토리 속에서 살아가는 사회체입니다. 여기서 신화는 하나의 억압으로 작용하며 욕망의 흐름들을 코드화합니다. 이 사회체는 코드화되지 않는 것들은 추방하는 방식으로 욕망들을 제어하고 관리합니다. 하나의 중심이 생겨나는 것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국가가 생겨날 수 없습니다. 반면 전제군주 기계는 국가가 존재하는 사회체입니다. 우리는 흔히 국가의 출현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졌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들뢰즈와 과타리는 국가가 이미 완성된 상태로 단번에 출현했다고 말합니다. 국가의 작동 원리는 국가 이전 사회의 작동 원리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국가 이전의 사회와 달리, 국가에는 견고한 하나의 중심이 있습니다. 신과 관계하는 유일한 존재, 전제군주가 그 중심이죠. 그는 신의 목소리를 듣고 신의 명령을 전달하고, 신민들을 보호합니다. 그 대가로 신민들은 세금을 바치고, 그러면서 전제군주와 무한한 채무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이처럼 세금은 국가의 작동 원리이고, 그런 국가를 바탕으로 생겨나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입니다. 그래서 들뢰즈와 과타리는 전제군주 사회체를 ‘자본주의가 출현하기 위한 잠복기’로 보고요.
전제군주 사회체처럼 국가를 전제로 하지만, 자본주의의 작동 방식은 완전히 다릅니다. 전제군주 사회체는 모든 코드들을 덮어버리는 초코드화를 실행하여 욕망들을 단일하게 통제하는 반면, 자본주의 사회체는 코드들을 모두 풀어놓고 그 탈코드화하는 흐름에서 잉여가치를 뽑아냅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자본주의에 대해 보편적이라는 표현을 쓰는데요. 탈코드화하는 흐름들은 모든 사회체에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그 탈코드화하는 흐름들을 자기 생산의 근거로 삼죠. 극한을 계속 이전하며 모든 걸 자기 안으로 집어넣어버립니다. 이때 이용하는 것이 바로 ‘합리성’인데요, 탐욕마저도 합리적 논리 속에서 만들어내는 것이 자본주의라는 샘의 말씀에 정말 공감이 되었어요.
사회와 분리된 내밀한 영토로서의 가족
앞서 본 것처럼, 욕망기계와 사회기계는 따로 분리할 수 없습니다. 욕망적 생산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사회적 생산이 있고,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이 있으면 곧바로 욕망적 생산이 있습니다. 그러니 모든 욕망은 이미 사회적이고, 사회적 생산이 아닌 욕망적 생산은 없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마치 그렇지 않은 욕망이 존재하는 것 같은 환상을 만들어냅니다. 사회적 장과는 전혀 상관 없는 사적인 영역이 있다고 믿게 만듭니다. 들뢰즈와 과타리가 정신분석을 비판하는 지점이 바로 그 부분이죠. 정신분석은 사회적 장에 걸리지 않는 순수한 개인적 무의식이 있다고 전제합니다.
여기서 지난 시간 저희가 풀지 못한 문제가 정리됩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자본주의가 모든 걸 오이디푸스 가족 삼각형 안으로 집어넣는 것으로 체제를 유지한다고 지적하는데, 저희는 핵가족을 넘어 핵개인이란 말이 등장한 지금 같은 시대에도 여전히 그렇다고 할 수 있을지 궁금했지요. 하지만 가족 없이 혼자 살아간다고 해도, 사회적 영역과 동떨어진 내밀한 영역이 있다고 믿는다면 그건 여전히 가족주의라고 샘께서 정리해주셨어요. 모든 가족은 이미 사회적 장 속의 가족입니다. 사회적 장에 걸리지 않는 사적 영역이란 없습니다.
- 다음 시간에는 나들이 제본 III <오르가즘의 기능> 4장(‘심리학과 성이론의 차이’)을 읽고 메모를 작성해옵니다.
- 간식은 주영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수요일 저녁에 만나요!